# 21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9권 12화
76. 가면을 쓰는 자와 통곡하는 소녀.
대화는 길지 않았다. 어차피 인질인 에밀리아라는 작은 여자가 깨어나지 않는 이상 기다려 본들 의미는 없었으니 말이다.
딱히 거짓이 느껴지지 않는 미소에 일면 안도하며 팔란제국으로 돌아온 나는 사령부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어수선한 분위기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설마 그사이에 불닭이가 사고를 쳤던 것인가.
라고 여기기엔 분위기가 다급하진 않았다.
쉴 새 없이 이동하는 병사들은 하나같이 무장상태였고,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싸움이 터지지 않는 이상 이럴 리는 없을 거다.
사령부를 벗어나 괜히 소란이 일지 않게 조용한 곳에 데려다 둔 불닭이는 그 자리에 분명 존재했다.
"불닭아."
-삐......삐익?
내 질문에 커다란 짚단 위에 늘어져 있던 불닭이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따뜻한 날에 잘 자다가 일어난 탓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너 또 무슨 짓 했냐?"
내 질문에 벌떡 일어난 녀석이 한두 발 물러나더니 이내 삐익 울어대며 날개를 펄럭거렸다.
그리고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을 표현한다.
위풍당당하게 타올라야 할 화염도 꺼뜨린 채 땅에 머리를 비비고 내게 다가와 억지로 어서 쓰다듬으라는 듯 머리를 들이미는 꼴을 보니 거짓은 아닌 듯싶었다.
"아니야?"
-삐익!!
"그래, 잘했어."
그리 말하며 오는 길에 준비한 고깃덩어리를 아공간에서 꺼내 주자 녀석은 이 상황을 모면했다고 생각했는지 허겁지겁 고기를 물어뜯고는 내게서 물러났다.
"데이비님. 불닭이 매우 공포 증상. 이는 옳지 않은 육아 방법이라고 명시."
"맞아."
인간의 아이를 이런 식으로 키웠다간 세상에 다시 없을 썩을 부모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신수 불닭이는 언젠가 내가 늙어 죽는다 해도 살아남을 녀석이다.
한번 태어나 완전히 성장한 신수의 수명은 부모의 목숨이 가지는 굴레에서 벗어나며 짧게는 600년.
길게는 특정 조건이 조합된다는 하에서 무한정으로 살아간다.
내가 없어진 이후에 이곳에 남게 될 녀석이 만약 포악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면.
그리 좋은 미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차라리 지금 선을 확실히 그어두는 게 좋지."
-그건 마치 동물들의 서열정리와 다를 게 없군.
"왜 아니겠냐."
내가 하면서도 그리 마냥 기분 좋은 방식은 아니었다.
"그럼 뭐 때문에 이렇게 어수선한 것인지?"
"팔란제국 황태자님의 시신을 찾았다는 수색대의 보고가 있었다고 해요오."
"드디어 찾았나 보네요."
내 질문에 로브를 여미며 다가온 평범한 인상의 소녀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인상은 평범하지만, 미소가 밝게 빛이 나는 소녀다.
다만, 평소의 단조로운 백색의 로브가 아닌 고풍스럽고 우아한 디자인의 고급 로브와 법모를 쓰고 있다는 게 달랐다.
"그 지팡이는 또 뭡니까. 신성석 까지 박아넣으셨네."
마나가 응집된 게 마나석이라면, 신성력이 응집된 덩어리는 신성석이라 부른다.
사실 원류는 같지만.
가공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 데다 성국에서 그렇게 이름 붙여 사용하니 내가 태클을 걸 건덕지는 없다.
"헤헤, 어떤가요오? 저 좀 성녀 후보 다운가요?"
성녀 다운가가 아닌 성녀 후보다운가.
스스로의 위치를 잘 알기에 오만하지 않다는 말은 이런데에 쓰이는 것이리라.
그녀는 정말 말 그대로 천부적인 성녀 체질이었다.
"뭐, 제법 우아해 보입니다."
"피......왕자님은 생각보다 여성을 대하시는 데에 무드가 없으시네요."
"평생 독신으로 사실 분이 그런 말 해도 안 넘어갑니다."
"네에?"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생 독신이요?"
"말 못 들었습니까?"
"글쎄요오......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정말 몰랐다는 듯 중얼거리는 걸 보니 성국이 얼마나 꽉 막힌 곳인지를 전혀 모른다.
성녀도, 교황도.
두 계통의 최상위 권위자들은 결혼을 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배우자의 입김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굳이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기보단 일부러 쉬쉬한 모양인데 어지간히 순진했는지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모양새였다.
같은 성녀후보인 앨리스는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만.
"흐음......."
"그거야 나중에 가 보면 알 일이지요. 어차피 성녀후보님은 아직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시신을 찾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요. 이것 참......씁쓸하다 해야 할지이.......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지이......."
"이제 와서 씁쓸해한들 뭐가 달라집니까. 시신이라도 찾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겠지요."
과거 리인포스 알파의 일을 처리할 때.
제 동료인 환술사 트레브에게 기습 치명상을 당해 사망한 얼음속성 마법사 시오 하울의 경우와는 달랐다.
그가 죽은 건 오래지 않았기에 부활 여부라도 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황태자가 사망한 지 공식적으로 일주일을 너끈히 넘은 만큼 이건 내가 아니라 내 스승인 로 아이아스가 와도 완전한 소생은 불가능하다.
완전한 소생은.......
"왜 그렇게 보십니까?"
성녀후보 리나의 눈매는 어딘가 누군가와 매우 닮은 구석이 있다.
마치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 같은 초롱초롱한 눈매.
그러니까.......
나를 바라보던 영지 대리관리인이자 과거 내 시녀로서 나를 보살펴왔던 에이미와 닮았다.
"아뇨. 데이비 왕자님을 두고 제가 제령을 해도 될는지......."
"저는 성국 소속이 아닙니다. 제령은 성국의 역할이고, 또 당신의 역량이죠."
"그런가요오......."
일단은 큰 행사이니 말이다.
제국의 황족이 죽은 만큼 당연 신관들이 제령을 하는데 이번엔 성녀후보 리나가 와있는 만큼 그녀가 나서주고 그만큼 팔란 제국에서 무언가를 더 받아내려는 심산이 엿보였다.
이래서 성국도 사람 사는 곳이라더니.
"아이구 착하다아."
-삐익.......
헤실헤실 웃으며 겁도 없이 불닭이에게 다가가 부리를 쓰다듬어주던 리나 성녀후보는 천부적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게끔 만드는 무언가의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매력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진 못해도 그녀를 해칠 생각은 들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것이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힘의 원천이었으리라.
"물리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이렇게 착한 아이가 물다니요. 조금 욱하는 느낌은 있지만, 천성은 착하고 어진 아이인 것을요오......."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이라고 했던가.
벌써 성녀의 문턱에 발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뿌우우우우!!
저 멀리서 병사들의 귀환 소식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돌아왔나 보네요오. 저는 바로 가 볼게요 같이 가실래요오?"
"얼굴은 비쳐야겠네요."
* * *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백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도열했다.
척!! 척!!
그리고는 성문부터 들어오는 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검을 절도있게 움직여 경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선두에 선 일곱 마리의 백마를 시작으로 10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오와 열을 맞추듯 절도있는 자세로 커다란 관을 지고 한발 한발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관 속에 있는 인물은 보통 귀족, 혹은 황족이 아니었다.
엄연히 대륙 최강국이라 불리는 팔란제국의 황태자였다.
선두에 서서 행렬을 이끌고 있는 일리나의 표정은 상상 이상으로 참담해 보였다.
서클릿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겉으론 티를 내려 하지 않고 있었지만, 냉기가 느껴지는 그 표정은 평소 여느 때보다 더욱 차가워 보였다.
가면이라는 것이 저런 것일까.
이번 사태의 원흉인 네크로맨서들의 처단이 끝난 마당에 남은 가장 큰 사안은 다름 아닌 팔란제국의 황태자의 시신을 되찾는 것.
그리고, 오랜 싸움 끝에 결국 일리나는 제 오라비의 시신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시신은 멀쩡해......그런데......."
"그런데?"
"없더라, 심장이......."
다른 시신에 비해 황태자의 시신은 그나마 멀쩡했다.
뚜껑이 열린 관 안에는 수많은 꽃과 함께 한 남성의 시신이 곱게 뉘어져 있었다.
신관들이 부단히 노력했는지 부패한 부분은 어떻게든 가린 듯 보였지만 이미 한번 부패하기 시작한 이상 이것은 그저 겉보기만 좋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오라버니는 아바마마와 같이 대륙의 평화를 극도로 지지하는 파였어."
전쟁이 벌어져선 안 된다고.
"평화가 생기면 여유가 생기고, 증오의 굴레가 끊어지면 각 국가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중립적으로, 어긋남 없이 바라볼 수 있다고 외치던 게 오라버니였어."
그 과정에서 팔란제국을 위해 모든 것을 생각하는 살리반이나 극단주의적인 다른 황자들과 충돌하긴 했지만.
"오라버니는 사실상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전쟁을 완전히 막는 쪽으로 지지하시던 분이셨으니까."
"각별했던 사이였나?"
"글쎄. 모든 황족이 나를 좋아하는 건 아냐. 실제로 대부분의 황족은 나를 견제하고 있지만......, 큰 오라버니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고."
간 크게 자신을 건드릴 멍청한 황족은 없다는 게 그녀의 입장이었다.
그녀가 괜히 팔란제국의 금지옥엽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병에 걸렸고 수인천대 사상이 남아있던 린디스 제국의 막내 황녀인 에이리아와는 다르게 그녀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모든 견제를 뿌리치고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잡은 말 그대로의 여린 체격의 여장부 그 자체였다.
"일리나."
그때 관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일리나의 곁으로 살리반이 천천히 다가왔다.
"살리반 오라버니?"
"일리나, 미안하지만 형님의 국장은 수도가 아닌 이곳에서 치러야 할 것 같다."
그의 말에 일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게 무슨?! 안 돼요!"
"아니, 이건 차기 황태자로서의 결정사항이다. 토를 달지 마라."
담담하게 말한 그가 일리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손 치우세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 차기 황태자요?! 큰 오라버니가 돌아가시고 사망이 확정되는 시신을 되찾을 때까지 연기한 것이 다 그 이유 때문이었나요?!"
"미안하다."
격분하는 일리나는 급기야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는지 악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이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자 그녀는 제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 채 내게 안겨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준비과정도 필요하니 약 일주일 후에 화장을 할 거다. 데이비 왕자님, 왕자님께서는 저희 형님과 면식이 없으나......제 동생을 봐서라도 한번 참석해주십시오."
"흐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본연의 표정을 지우지 않고 제의를 해왔고 말없이 통곡하는 일리나를 보던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버렸다.
* * *
일주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살리반은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막혀버린 하인스 영지와의 식량 거래에 응했고, 자국민을 구호하는 데에 쓸 식량을 제외한 잉여 식량의 일부를 하인스 영지에 특별히 매각했다.
그는 의외로 정이 없어 보였지만, 일 처리 하나만큼은 또, 제국으로서의 약속 하나만큼은 확실히 지켜냈다.
그 모습을 일리나가 차가워도 저렇게 차갑다며 비난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팔란제국의 황태자는 황태자로서는 실격인 인물이지만, 인간으로서도 상당히 괜찮은 양반이기도 했다.
"오라버니는 너무 낙천적이셨죠. 언젠가 전쟁이 벌어지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올 거라고......, 문제가 생겼을 때 창, 칼이 아닌 외교로, 손을 맞잡고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했고요. 나는......나는 그런 오라버니가 너무 좋았어요."
목재로 만들어진 커다란 받침 위에 뉘 여진 황태자의 시신을 보며 일리나가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울고 싶은데 누군가가 있는 옆에선 절대 울지 않으려 애쓴 탓인지 피골이 상접 해 보였다.
그 와중에도 사기 같은 외모는 빛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병약한 미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형님은 그 세상이 오기엔 너무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본인의 힘으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알았지. 그게 가능한 건 오로지 나뿐이라고."
담담한 살리반의 중얼거림에 일리나가 독기어린 눈매로 그를 노려보았다.
"오라버니가......희생이 뭔지 알기나 해요?!"
그녀의 격한 외침은 애석하게도 주변인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시신의 바로 곁에 있던 두 사람과 청각이 예리한 몇몇에게만 들릴 뿐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팔란제국의 황태자의 국장인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청각이 모두가 동물처럼 예리하진 않으니 말이다.
"일리나."
"놓으세요! 살리반 오라버니는 정말 밉습니다. 큰 오라버니가 살아 계실 적에 오라버니를 조금이라도 도왔다면......그리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의 외침에 살리반은 쓴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래......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 하지만 정치는 네 생각만큼 쉽게 돌아가는 게 아니다. 일리나, 질문을 하마. 나는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형님의 국장을 이곳에서 치른다. 만약 네 말대로 수도로 올라가서 그 일을 치렀을 때."
"......"
"그때 문제가 생긴다면 넌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철이 없는 것을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가족 간이라고 볼 수 없는 살기가 서로 뒤섞여 서로를 노려본다.
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고, 냉정했다.
그런 두 사람의 싸움을 보면서도.
나는 아무런 반응도, 말도 하지 않은 채 페르세르크를 향해 말했다.
'거의 영화네. 페르세르크, 팝콘 없나?'
-인성이 아주 예술이군.
'네가 조금씩 물리력을 쓸 수 있는 건 알고 있다만, 쓸데없이 나서지 마라.'
-그냥 두고 볼 게야? 그래도 일리나 저 아이는 그대가 정을 준 아이이지 않나.
두 사람과는 다르게. 나는 그 두 사람의 사이에 있는 무언가의 잔재와.
삐릭.
상태 창에 출력된 한 가지를 보고는 짧게 혀를 찼다.
[오염의 마지막을 뒤처리. 오염되어 윤회의 고리에 오른 혼의 정화. 불응 시 차후 윤회의 궤도에 이상 현상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
"협박하는 척하면서 쓸데없는 오지랖 부리기는 쯧......."
그 오지랖의 대상이 과연 일리나 일지.
아니면 나를 향한 오지랖일지.
누군가가 죽었다라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오래 남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