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9권 13화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 죽는 멍청이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지껄이시는 거죠? 그만두세요. 저는 이날 이후부터 오라버니 같은 냉혈한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요."
"일리나."
"더는 할 말이 없어요. 큰 오라버니께 애도할 생각이 없다면 내려가 주세요. 당장!"
"후우......."
말끝을 흐린 채 물러나는 그를 노려보던 일리나는 당장에라도 일어날 것처럼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는 제 오라버니의 시신을 꼭 부여잡았다.
심장이 없는 시신.
다른 부위는 멀쩡한데 언데드가 되었다고 심장이 사라지는가.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사령왕 데이안 혹은 리치 클레르 오르판이 그 전에 손을 써둔 것이리라 예측할 뿐이다.
그 이유는 나도 아직 파악할 방법이 없지만 말이다.
"말발이 꽤 능숙하시네요. 어지간해선 그냥 속아 넘어가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전혀 모르겠네요. 마냥 좋은 기분은 아니니 이 정도만 합시다."
천천히 물러나 내 쪽으로 다가오는 살리반을 보며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만 저었다.
"저는 형님과 정적이니까요. 형님이 죽는 걸 원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저와는 늘 반대의 입장에 있던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제가 황태자가 되겠네요."
그의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고풍스러운 백색의 법의와 법모를 쓴 리나 성녀후보와 그녀를 따르는 휘하 신관들이 도열하며 천천히 화장터로 걸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이따금 시끌거리던 좌중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뿌우우우우!!
이윽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도열한 채 일제히 무거운 나팔 소리를 울리자 참석을 위해 온 이들이 하나같이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 슬프지 않아도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이기에 흉내라도 내는 것이다.
딸랑!
이윽고 대사가 없는 고요한 제령식이 시작되었다.
팔란 제국을 포함한 성국의 영향을 받은 모든 장례식은 이렇게 치러진다.
시신을 화장하기 전 신관이 찾아와 그 혼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춤을 추고. 그 혼이 죽어 신의 품에 안기기를 기원하는 기도와 춤을 올린다.
리나 성녀의 몸은 사실 그렇게 유연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 뻣뻣함 속에서도 사자(死者)를 애도하는 진심은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딸랑!
그녀의 지팡이에 달린 신성석과 그 아래 달린 방울이 딸랑거리며 그녀의 주변으로 순백색의 빛무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옅은 광채 속에서 그 빛줄기들은 그녀를 떠나 황태자의 시신을 맴돌며 넓게 퍼지기 시작했고. 이내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며 그 꼬리를 길게 만들었다.
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어둑어둑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법의가 스치는 소리와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
그 안에서 나는 말없이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일리나를 보았다.
고요한 화장식은 그렇게 지속되는 듯 보였다.
혼을 달래는 의식이 끝을 맺으면 이제 시신을 화장하는 것으로 끝이 나야 했다.
하지만.
"아......아아......안 돼......안 돼"
제령식이 끝나고 리나 성녀후보가 물러남과 동시에 문제가 생겼다.
화장을 위해 횃불을 들고 올라오던 기사들을 제친 채 일리나가 달려들어 시신을 부여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아아! 오라버니! 오라버니 눈 좀 떠봐요......흐.흐흑, 제가 잘못했어요. 내가......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좀 더 오라버니 곁에서 자리를 지킬 테니까. 눈 좀 떠봐요. 제발요......네? 오라버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황녀저하!"
"놔!! 흑......흐아아앙!! 오라버니, 오라버니!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끄흑......흑."
이성적인 논리는 다 내버려둔 채 통곡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제발 눈 좀 떠보세요! 제발, 죽지 마세요! 저랑 오래오래 살기로 하셨잖아요!]
통곡하는 그녀의 모습에 놀란 이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신을 놓지 않고 차갑게 식은 황태자의 얼굴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씁쓸한 감정이 들게 만들 지경이었다.
-표정이......좋지 못하군.
"괜한 기억이 떠올랐네."
벌써 혼이 기억하는 횟수로 천 년도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의 기억은 거의 트라우마처럼 박혀서 씁쓸함을 쉬이 떨쳐내지 못했다.
아물 수 없는 상처는 회복하는 게 아니라. 시간으로 덮는다고 했던가.
아직까지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씁쓸해지는 것이 아마 그 증거가 아닐까.
전생의 기억을 자각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였으니. 만약 그때 당시에도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이거 놔! 오라버니! 오라버니! 저 일리나에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예뻐해 주시던 동생 일리나라구요! 제발......."
지금껏 참아온 모든 눈물을 터뜨리듯 통곡하는 그 모습에 국장에 참석한 이들 중 여성 구성원들은 대놓고 눈시울을 붉히며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그나마 여성보다 감수성이 딱딱한 편인 남성들조차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내쉴 지경이니 얼마나 씁쓸한 광경인지는 더 말해 무엇할까.
"훌쩍......이러지마세요. 황녀님...... 이렇게 우시면 황태자님도 좋은 마음으로 떠나지 못하실 거에요."
눈시울을 붉힌 채 나서서 일리나를 끌어안아 뒤로 떼어내는 리나 성녀후보의 말에 그녀는 화장터에서 끌려나가면서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안 돼! 아직 오라버니께 하지 못한 말도 많은데! 지금까지 부끄럽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한마디도 지금까지 못 해 드렸는데 이렇게 보내드릴 순 없단 말이야!"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그녀의 힘은 리나 성녀후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결국 나선 것은 그녀가 거느리고 있는 화이트버드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황녀 저하.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거 놔!! 너희들 목을 모두 처 버릴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그때 저희의 목을 치십시오!"
단호하게 외치며 일리나를 들쳐메고 물러나는 기사들을 두고 살리반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기사들이 천천히 올라가 얇은 나뭇가지와 부싯깃에 불을 붙였다.
"아......아아아......안 돼!!"
절규하며 무너진 일리나가 다시 불 속으로 뛰어들려 한다.
철썩!!
이에 살리반은 결국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이 못난 것!"
"......"
이를 악물고 살리반을 노려보던 그녀의 모습에 살리반은 결국 검에 손을 올렸다가 이를 악물었다.
"일리나를 데려가라. 국장이 끝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감시해."
"......"
그의 말에 화이트 버드 소속 기사들이 당황한 듯 시선을 돌렸다.
"뭣들 하나. 네 녀석들이 일리나의 기사들이라지만 차후 황태자가 될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원한다면 반역으로 처넣어주마."
싸늘한 말투.
거부하는 순간 베어버릴 것 같은 살기가 일자 기사들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이내 조용히 통곡하고 있는 일리나를 부축해 물러났다.
"보기 좋지 않은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담담한 얼굴로 답하며 그가 참가 인원들에게 고개를 숙이자 몇몇은 상상 이상으로 냉혹한 그 모습에 놀란 듯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황태자의 시신에 불이 붙으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에 나는 말없이 한 손을 허공에 때렸다.
투웅.......
옅은 소리와 함께 손끝으로 딸려 나온 커다란 지팡이를 가볍게 움직여 바닥을 퉁! 때렸다.
[7서클]
[레인 커스텀]
그리고는 나머지 손에서 꺼내 든 한 장의 부적을 검지와 중지에 끼운 뒤 눈을 감았다.
[주작의 인]
[제령의 불]
꺼지지 않는 화염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어둑어둑하지만 비가 올 날씨는 아니었을 텐데.
갑자기 쏟아지는 빗소리에 참가 인원들이 당황했지만, 다행히 그들이 있는 곳은 방수 처리된 천막으로 가려져 있어서 비를 맞는 이는 없었다.
다만.
"배려는 여기까지 해드리겠습니다. 이쪽도 슬슬 가봐야겠네요. 불은 꺼지지 않을 겁니다. 혼이 무사히 주신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기원하지요."
"감사......합니다."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면서 말없이 시신을 바라보던 살리반은 이내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입을 뻐끔거렸다.
-미안합니다?
'울고 싶어도 참아야 할 때가 있는 거다. 그놈의 잘나신 왕족이라는 족속들은. 신경 꺼.'
저절로 혀가 차졌다.
[끄윽......흡......흐읍.으흑.]
억지로 무언가를 참는 듯한 소리는 내가 그곳을 벗어날 때까지 들려왔다.
* * *
일리나가 감금된 방은 그래도 황녀가 머무르는 방인 만큼 으리으리하기 짝이 없었다.
"문 열어."
담담한 내 말에 기사들이 창으로 입구를 가렸다.
"아무도 들어가셔선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문 열어."
담담한 내 말에 기사들의 표정에 불쾌함이 어렸다.
"데이비 왕자님. 무례인 것은 아오나, 황녀 저하 홀로 계신 방에 들일 순 없습니다."
"그럼 한숨 푹 자."
내 미소에 기사들이 당황하려던 찰나.
그들은 순식간에 눈을 까뒤집고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냥 두고 가기엔 마음이 조금 걸린다.
끼이이익!!
고요한 문이 열리며 보인 것은 커다란 침대 위에 주저앉은 채 공허하게 창밖의 비를 바라보고 있는 일리나의 모습이었다.
"지지리 궁상이네."
"데이비......."
내 중얼거림에 놀랄 법도 했건만.
일리나는 공허한 시선으로 창밖의 비를 보다 내게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는......."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
"라고 하진 않으마, 이번 일은 유감이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좋지 못한 꼴을 보였네."
"사랑하는 가족이 죽으면 누구든 슬퍼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까 새삼스러울 게 있나."
쏴아아아아!!
고요한 방안으로 빗소리가 여지없이 들려왔다.
"비가 와......오라버니의 눈물일까. 아직......하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오글거리는 표현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부끄러움을 감지할 만큼 이성적이지 못했다.
"멍청하기는, 비는 하늘에 떠 있는 물이 무게가 일정 이상 되면 그냥 쏟아지는 거다."
담담한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팍 찡그려졌다.
"날 웃기려고 그런 거라면 10점에 2점을 줄게."
"웃길 생각도 없고. 궁상떠는 꼴 보려고 여기 온 것도 아니니까 이쪽 봐."
담담하게 말하며 내가 그녀의 이마에 준비해둔 부적을 철썩 소리 나게 붙였다.
"꺅! 이게 무슨 짓!......"
"하고 싶은 말 있다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면 기회가 생겼을 때 해야지.
"그쪽도 하고 싶은 말 많을 것 아닙니까. 길어야 5분입니다. 그 안에 하고 싶은 말 다하고 가십쇼."
내 말에 부적을 떼어내려던 일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지며 몸이 움찔거렸다.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약탈범입니다. 궤도에 올라가 있던 당신의 혼을 잠시 하이잭 해온 것뿐이고요."
하이잭이라는 단어는 이곳에선 없는 단어이긴 하지만.
알아먹으라고 한 소리도 아니고, 상황도 비슷하니 상관없으리라.
그의 영혼을 불러오기 위해 고생 좀 했다.
이후 나는 다시 일리나를 보며 경고했다.
"명심해, 5분이다. 5분 이후엔 황태자의 혼과 함께 궤도에 올라있던 다른 영혼에 이상이 올 거다. 그리고 네 영혼도 불안정해질 거고."
내 말에 굳어있던 그녀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큰......오라......버니?"
역시나 내게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에겐 목소리가 닿았으리라.
[8서클 흑마법]
[구원의 목소리]
죽은 연인을 살려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한 사령술사가 8서클에 들어서서 만들어낸.
윤회의 궤도에 담긴 아주 순간적인 법칙을 찾아 비트는 마법이다.
당연 필멸자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대가는 무시무시하다만.
그녀를 구원하려는 건지, 아니면 그녀의 입장을 받아들인 내게 생색을 내는 것인지, 모를 주신 프리아 여신의 오지랖 덕분에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데......데이비? 내가......내가 꿈을 꾸는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일리나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이 여자가 시간 귀한 줄을 모르네.
"이래서 사람은 곁에 있을 때 잘해야 돼. 잊지 마라, 5분이다. 음악이 끝나는 순간 눈을 감고 입도 다물어. 그 이상 대화하는 순간 너도 망자가 될 거다."
그런 주제에 나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 잘해드리지 못했고.
그것은 언제고 평생의 한으로 남을 것이다.
일리나와 이미 죽은 황태자는 생각 이상으로 각별한 우애를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었고, 한마디 하지 못하고 보낸 것에 평생의 한을 둘 것이라면.
차라리 힘이 있는 내가, 명분도 있겠다. 한 번 정도 못 도와줄까.
"......"
대답하지 않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나는 방의 한구석에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공간에서 필요한 물건을 뒤적거리다 작은 피리 하나를 꺼내 들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죽은 혼은 안도의 길을 떠나 기억을 내려놓고 새로운 생을 살아가길."
담담한 전주와 함께 낮고 묵직하면서도, 홀가분한 음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혼곡은 더럽게 안 맞는 장르긴 한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이잭 당한 혼들이 일제히 발작을 일으킬 테니 진정시켜줄 수밖에.
자, 다들 줄들 서시고. 한때에 죽은 혼까지 춤추게 만든 음유시인이 만든 마법 연주를 들려드릴 테니.
인간의 혼을 상대로는 주술이 더욱 안정적이긴 하지만 내가 소환한 신수는 고작 불닭이 하나뿐이니 이 대신 잇몸이렷다.
무거우면서도 느린 진혼곡이 울려 퍼지자 일리나는 이로 입술을 꽉 깨물며 억지로 울음을 참고는 천천히 미소 지어 보였다.
떠나는 이에게 그녀가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그것은 아마, 걱정 말라는 미소였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