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9권 14화
5분이라는 시간은 초로 잡으면 300초가량.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이들에겐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다만, 현실을 인지하고 일리나는 그 5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말과 함께 그와의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가 끝을 맺기 무섭게 주변의 혼을 안정시키던 음악이 서서히 멎어 들어갔다.
두 사람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 건덕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만큼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비워버렸다.
들어봐야 의미가 없거든.
덜컹!!
타이밍은 예술이라고 한다.
바깥에 쓰러져 있던 기사들을 발견한 다른 기사들이 급히 검을 빼 들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멍한 얼굴로 가만히 있는 일리나를 향해 말했다.
"네 그 작은 오라비."
"......"
"사람이 완벽할 수야 있나. 좋아하진 않더라도 미워하진 마라."
이 말뜻을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만. 요령이 없는 인간들은 대개 잘해줘도 욕을 먹더라.
-아마 살리반 황자는 황실로부터 극도의 질타를 받겠지. 본녀가 다른 황자였다면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는 거로 작정하고 물어 뜯을 게야.
"가장 큰 건, 살리반을 경계하던 귀족들 중 일부가 일리나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설 거라는 소리다."
팔란제국엔 수많은 황자들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일리나를 말없이 지지해주던 건 오로지 황태자뿐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기회만 생기면 일리나를 물어뜯을 황자들이 득시글거린다는 소리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래라면 황실에서 극진하게 대접해야 할 텐데."
"서로 바쁜 입장이니 거기까지 갔다간 얼마나 시간을 더 먹을지도 모르겠네요."
"이곳이니 더 안전합니다. 황실은 권력의 암투로 사실상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곳이니까요."
간단한 하인과 하녀들부터 시녀나 시종, 집사장, 혹은 기사들까지.
누가 누구의 편인지 확실하게 나눌 수가 없다.
그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일리나의 방에 가셨다지요. 녀석은 어떻던가요."
"그 사단을 만든 본인이 그런 말을 해본들, 이해는 못 해 드립니다."
"하하. 그렇군요. 본론으로 가시죠."
담담하게 말한 그가 서류를 내밀었다.
"황실에서 보낸 공문입니다.
그 안에는 첫 줄에 큼지막한 글귀가 적혀있었다.
팔란제국과 라운왕국의 군사 동맹조약서.
"왕자님께서 전해주신 요구사항은 단순합니다. 팔란제국과의 군사동맹."
"맞습니다."
내 말에 그가 짧게 신음했다.
"하지만 라운왕국은 이미 린디스 제국과 어느 정도 군사 동맹상태라는 건 알고 계시는지요? 제 정보에 따르면 왕자님이 린디스제국의 데오르트 황제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팔란제국 황실에선 이런 답변을 내렸습니다."
거부.
팔란제국은 중립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 만큼.
"한 국가의 편애. 혹은 반대의 경우도 저희는 내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저희 팔란 제국의 입장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다만, 살리반은 다르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찌이익!!
"다만, 이건 황실에 눌러앉아 이 사태가 터졌음에도 앉아 구경이나 하고 있는 꼴통 x끼들이 내린 결론이지요.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말끝을 흐린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팔란제국은 은혜를 입고 입을 씻을 만큼 몰염치한 제국이 아닙니다."
거대한 국가이기에 팔란제국은 린디스 제국과 같았다.
"다만 확실히 하지요. 이유를 물어야겠습니다. 어째서 이런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제안을 저희 황실에 하셨는지."
그의 말에 내가 말없이 차를 음미했다.
"이유라고 할 것 있습니까. 정보통이 단단한 팔란제국이라면, 제가 지금 영지에 무엇을 모으고 있는지 모르진 않을 텐데요."
내 말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인스 영지는 실제로 저희 팔란제국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영지입니다. 다름 아닌 팔란제국이 독점 판매하던 달의 풀 잎사귀를 독자적으로 재배한 곳이니까요.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대량의 식량 구입. 수성에 필요한 물자재와 성벽 축조, 및 보수 자재.
그리고. 대량의 무기.
"전쟁을 가늠하고 계신 겁니까?"
"정확히는 이쪽이 막는 쪽입니다."
내 대답에 그가 짧게 신음했다.
"이 종족의 문제로군요."
"눈치 빠르시네요."
"한나라의 황태자를 노리는 이. 이 정도도 몰라서는 최강 대국의 황자라 부를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국가가 여러 크고 작은 사건을 내고 있지만 제가 아는 한에서 하인스 영지나 라운왕국과 충돌하는 국가는 없었습니다."
담담한 그의 말에 나는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것은 저희가 모르는 측면. 즉 드워프나......아니면 세상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숲의 종족......엘프, 혹은 아직 왕자님이 숨기고 계실지 모르는 다른 종족 정도겠군요."
그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드워프는 아닐 겁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륙 각지에 있는 드워프들이 왕자님께 호의적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엘프인데......."
담담하게 말한 그가 눈을 반짝였다.
"적이 감당 못 할 정도로 강한 건 아니겠죠. 왕자님이 해주신 업적을 보고 그걸 못 믿는 멍청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희 팔란 제국이......."
말을 끊은 그가 내가 말하지 않은 사실을 꼬집었다.
"왕자님을 노리고 있는 그 엘프와 관련된 세력이 지나가야 할 길목에 있다는 것."
이 소름 돋는 새끼.
-그대가 할 말은 아니야.
"감탄 나오네요."
나야 오래 살았으니 대충 눈에 보이는 게 있다지만.
그는 나와는 다른 의미로 천재였다. 정치, 혹은 기 싸움에 관해서 말이다.
-어쩌면, 처음 앨리스 성녀후보를 지지한 건.......
'뻔하지, 기회를 보고 성국의 콧대를 짓눌러버리려는 수작이겠지. 물론, 나라는 존재가 예상 밖이었겠지만.'
이런 놈은 가급적 오래 상대해서 좋을 게 없다.
숨긴다고 해본들 계속해서 파고들 테니 말이다.
다만, 아군이라면 이만큼 든든한 세력도 없으리라.
"팔란제국의, 아니 차기 황태자의 공식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허리를 꼿꼿이 편 그가 품 안에서 다른 종이를 꺼냈다.
"차후 팔란제국과 하인스 영지의 완전 동맹제의서입니다."
"그쪽에서도 받아가시겠다? 이야기가 다르네요."
"사실 왕자님의 도움을 받았으니 응당 해드려야 하지만, 서로에게 나쁘지 않을 제안입니다."
"몇몇 항목이 거슬리네요."
내 말에 그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의 조건에는 팔란제국이 하인스 영지에 대량의 물자를 지원하거나 기술적인 지원을 한다는 항목은 제법 좋다.
다만,
"라운왕국을 을로, 팔란 제국을 갑으로 표기한다. 차후 200년간 갑과 을은 서로의 존속에 위험이 될 만한 적이 출현할 시 반드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서로를 구원한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을의 문제입니까?"
"그런 자잘한 건 관심 없습니다. 다만, 이런 노예 계약은 사양하죠."
찌이익!!
이번엔 내가 계약서를 찢어버렸다.
존속에 위험이 되는? 대놓고 내 힘을 이용하겠다는 소리와 뭐가 다른데.
그딴 호구 잡히는 계약은 사절이다.
"보통 다른 국가들은 서로 팔란제국의 위세를 업으려 들 텐데 말이죠."
"애석하게도 제가 제국의 힘이 두려워서 동맹제안을 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제국급의 대국이 엘프와 손을 잡고 공격해올 시. 그에 따라 죽어갈 죄 없는 생명의 수를 줄이려고 하는 거지.
"제 말뜻. 이해하시겠지요."
"......"
거짓을 판별하려는 지 그가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로 적정선만 지키면 됩니다. 위험할 땐 도와주지요. 하지만 그게 강제되어선 곤란합니다."
내 말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일전에 일리나, 그 아이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곳을 다 건드리는 한이 있어도 왕자님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팔란제국을 위하는 길이라며 호언장담했지요. 사실 그땐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겼습니다만......."
짧게 신음한 그가 물러났다.
"왕자님은 정말 인간이십니까?"
"보시다시피 인간입니다. 딱히 팔란제국엔 유감이 없기도 하고요."
"좋습니다. 비밀 카드로 남겨두도록 하지요. 다만, 말 같지도 않은 핑계로 서로 간의 도움을 외면하는 사태는 없었으면 좋겠군요."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부분."
검지로 찢어진 계약서의 한 항목을 가리켰다.
"저는 마음도 없는 남녀가 만나서 하는 결혼 따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
"황자께서는 본인의 동생을 너무 과보호하시는 경향이 있는군요."
보모 노릇이나 하라고?
사양한다.
그곳에는 일리나와 나의 정식 국혼에 관한 제안이 적혀있었다.
* * *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 질문에 그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정보에 나타난 심리는 생각보다 가드가 약했다.
[너무 심적인 피로가 과하니 자리를 파하고 싶다.]
나와 대화하는 것에 상당히 속으로 밀리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러면서도 티를 내지 않았으니 보통 인상은 아닌 모양이다.
"왜 거짓말했습니까?"
내 질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일리나는 몰라야 합니다. 더러운 정계의 일 따윈."
"이대로 돌아가면 황자님은 다른 황자들의 질타를 무수히 받을 텐데요?"
멍청이도 아니고, 어떤 놈이 황태자의 시신을 차기 황태자의 명령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변명으로 조촐하게 치러버리겠는가.
그가 그 사실을 몰랐을까?
그럴 리가.
내 말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국의 모든 귀족. 그리고 황족들에게......."
말끝을 흐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게 천천히 다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일리나 그 아이가 저와 사이가 좋아졌다는 소문이 퍼져선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었다간......."
말끝을 흐린 그가 쓰게 웃었다.
"그 아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도, 또 지금처럼 자유로운 새와 같은 삶을 지킬 수도 없어집니다."
더러운 진창에 빠지는 건 한순간이다. 아무리 깨끗한 옷을 입어도 흙탕물에 빠져있는 이가 물장구를 치는 순간 더러워진다.
"이곳에서 화장을 해달라는 건 단순히 형님의 어리광이었습니다. 자신과 함께 싸운 병사들의 넋을 죽어서도 위로하겠다는 유치찬란한 이유였지요. 하! 들어줄 가치도 없었습니다."
"사망한 황태자께서 존경할만한 인격자라는 사실은 분명하네요."
모든 것을 가질 한나라의 황태자가. 자신의 죽을 길을 알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뒤에 숨겨진 약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 출전 전......, 형님께서 제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네, 편지라 쓰고 유서라 읽는 멍청한 종이였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사기에 잠식된 몸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 적혀있더군요."
-설마.......
'그래서 심장이 없었구나.'
심장을 뽑아간 건 언데드도. 모종의 무언가도 아닌.
살아 있던 황태자의 수하였던 모양이었다. 마나유저에게 심장은 힘의 근원이니까.
익스퍼터 최상급인 황태자가 살아서 그 힘으로 언데드가 되어 제 백성을 죽이지 못하도록.
자신의 힘을 대부분 깎아버리는 그만의 극단적인 선택.
"물론, 그 정도였다면 당연 저도 듣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형님의 부탁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여동생을 지킬 건 너뿐이다.
현재 팔란제국에서 살아 있는 황녀는 단 하나뿐.
일리나 데 팔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정계의 귀족이나 황족들이 그녀에 대한 경계를 풀게 할 방법은?
"이번 사태. 본래 이곳을 담당하고 지키는 병단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화이트버드입니다."
화이트 버드.
바로 일리나가 담당하고 있는 병단이다.
"본인이 생각이 없어도 저쪽에서 물고 늘어지면 엇! 하는 순간에 심해로 끌려들어 가는 겁니다. 일리나는 영특하지만, 능구렁이를 상대할 재주는 부족합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악수를 청해왔다.
"그러니 든든한 방패가 필요하지요. 귀족들과 타 황자들은 이번 사태를 두고 일리나의 책임에 대해 물고 늘어지겠지요. 그 아이를 보호해주는 화이트버드의 통솔권한을 빼앗으려 들 겁니다."
"흐음......."
내가 손을 잡지 않고 고민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가 나서야지요."
"나선다라......."
"제가 이곳에서 형님의 국장을 치르고 공식적으로 차기 황태자로서라는 입장을 표명한 이상 제가 형님의 기세를 여기서 묻어버리고 제 본색을 드러냈다고 생각할 겁니다. 당연, 그 누구도 눈앞의 큰 적이 생긴 마당에 긁어 부스럼인 일리나를 건드릴 여유가 사라지는 겁니다."
차기 황제는 나라고 못을 박겠다.
그러니 쓸데없는 곳에 시선 두지 말고 내게 덤벼라.
경쟁자였던 형의 국장까지 외곽에서 멋대로 치러버릴 만큼 막무가내로 나오기 시작한 살리반.
다른 이들은 유서의 내용을 모르니 이 행동은 살리반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포고로써 영향력을 가진다.
강대하고 위협적인 적 앞에서 자잘한 문제는 잊어버린다. 시선을 돌리는 간단한 정치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는다.
명예, 자부심. 또는 언젠가는 보내올지도 모를 동생의 미소까지도.
진실이 묻혀있을 영원한 시간 동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