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9권 21화
78. 개전
스릉!!
날카로운 쇠 울림과 함께 뾰족한 레이피어의 끝이 나를 향해 겨누어진다.
두 명의 엘프는 조금이라도 수가 틀렸다간 내 목을 노리겠다라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의 전력이 내게 미치는가, 미치지 않는가는 신경 쓰일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퉁!!
물론, 내 곁에서 그 꼴을 그냥 지켜볼 생각이 없는 녀석이 있지만 말이다.
"륀느, 경고해, 당장 무기를 내리지 않으면 륀느가 높게 평가하는 무기를 사용."
평소보다 더 거대한 빠루를 꺼내 늘어뜨린 채 녀석이 음산하게 경고해왔다.
"전쟁광이라, 웃기지도 않은 소리. 우리 숲의 주민들은 모두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오, 당신이 우리를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뭐라고?"
그의 말에 내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내뱉어야지."
"뭐......뭐요?!"
"라운 왕국에서 잘살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와 멋대로 행동을 제약하고 끼어든 건 네가 모시는 그 미치광이 나무다."
"인간!!"
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대화 자체가 사실상 의미가 있었을까.
신목을 과도할 정도로 맹신하는 엘프들, 그들 중에서도 일부는 광신에 가까운 믿음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 광신에 가까운 믿음은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일어난 폭음과 함께 먼지가 걷히자 참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와 유르겐은 움직이지 않았고.
한켠에는 두 명의 엘프가 미동도 없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사자를 죽이다니,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작자들이었군."
"상대를 죽이는 무기를 뽑았으면 뒤질 거라는 생각도 하셨어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유르겐을 내려다보았다.
"최후통첩이오, 데이비 왕자. 숲의 주민을 돌려준다면 당신의 목숨 하나로 그 이상의 피해는 없을 것이오."
"사태파악 아직 못하는 모양인데, 시작은 너희가 했다만, 끝맺는 건 너희가 정하는 게 아니야."
서걱!
짧은 쇠 울림이 울려 퍼졌다.
"끄윽?!"
동시에 제 목을 부여잡은 유르겐이 움찔거렸다.
"데이비 왕자님."
"대화가 의미가 없었네요. 자리는 여기서 파하도록 하죠."
"그래야겠군요."
팔란 제국이 중립의 입장에서 회담을 개최하였다지만, 살리반의 입장에선 저들의 편을 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담한 살리반의 대답에 유르겐이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 멈칫했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그대로 물러났다.
애초에 의미 없는 회담이었다.
회담장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나를 따라 왔던 윈리가 제 손에 쥐고 있던 스태프를 더욱 꼬옥 쥐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오라버니."
"빠져."
"싫어요!"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진 않았기에 나는 단호하게 녀석을 제지했다.
"윈리."
"오라버니는 매번 그러세요! 위험한 일은 매번 홀로 감당하시려고 하시죠! 언제까지 저는 오라버니께 도움만 받아야 하나요?! 저도 도울 수 있어요!"
확실히 4서클 마법사는 보기엔 엉성해 보여도 상당한 전력이긴 하다만.
다른 이도 아니고 윈리이기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도 전쟁에 참가하겠다는 고집을 부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전쟁이 애들 장난 같아?"
"저도 알아요....... 야적들의 습격이 계속되던 때에 죽어가던 이들을 얼마나 봐왔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번엔 말리셔도 저는 참전할 거에요! 꼭 도움이 될 거라구요."
고집이 단단히 붙은 그 모습에 내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들어주지그래?
'미쳤냐?'
-그대는 동생을 너무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어.
'이건 전쟁이야, 페르세르크. 전쟁은 미치광이들이나 하는 거고, 이번에는 내가 전부 보호할 수 없어.'
이 전쟁의 근원인 세계수를 끝장내기 전엔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내가 세계수와의 싸움을 위해 전장을 이탈하는 순간 어느 쪽이 함부로 우세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대는 자신이 강해서 남을 깔보는 경향이 너무 심해.
'네가 내 입장이 되어 보던가. 얼마나 불안한지 넌 모를 거다.'
조금이라도 생각을 잘못했다간 수많은 이들이 죽는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결과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후방보조는 어떠한가?
"......"
단호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윈리를 지켜보던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후방으로 빠져. 전방에 나서는 건 절대 허락 못 한다."
결국, 마지노선이란 그런 것이었다.
전방에 서서 엘프들을 막아줄 팔란 제국군의 사이에 들어가는 건 내가 허락할 수 없었다.
"바리스와 페일트리스 후작이 5천의 병사를 데리고 후방에 자리를 잡을 거다. 넌 거기서 바리스 녀석과 합류해."
"......알겠어요. 오라버니가 절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렇게라도 보여드릴게요."
"그래, 다만, 절대 다치지 마라. 그게 약속이다."
"약속할게요."
자신만만하게 말한다만.
전쟁은 생각보다 쉽게는 안 돌아간다.
* * *
"가시나요?"
방안에 구금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에밀리아는 자신의 처지가 현재 이곳에서 불청객이고, 인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듯 묵묵히 자신의 장비들을 점검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이나를 보며 에밀리아가 복잡하게 물었다.
"네. 데이비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네요."
"당신은 동족과의 싸움이 두렵지 않은가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저는 모르겠네요. 인간과 우호적이라곤 해도 인간을 위해 동족과 적대하는 건 사실 상상하기 힘드니까요."
그녀의 말에 커다란 대거를 집어 들고는 홀더에 채워 넣은 아이나는 무심하게 홀더를 허리춤에 걸었다.
"귀가 길다고 다 엘프가 아닙니다. 에밀리아님."
"네?"
"신목의 성자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 때,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제 동생을 노린 순간부터 나는 종족을 등졌습니다."
설사 그게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종족이 될지라도.
"엘프들은 저와 유리아, 혹은 달의 숲 주민들을 보며 배신자라 욕하겠지요."
"엘프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요."
"그래서, 그런 그들의 비난이 무서워서 가족 하나 못 지킵니까?"
잘못된 건 세계수지 이쪽이 아닌데.
그 말이 에밀리아의 마음속에 싹트고 있던 세계수에 대한 불안함과 불신이 조금 더 크게 발아했다.
"데이비님은 인간이 못된 인간입니다."
"......"
"하지만, 지금의 신목의 성자와는 다르게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아닙니다."
말끝을 흐린 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겉으로 로브를 두르며 후드를 눌러 썼다.
"또 자신의 사람은 확실히 지키려고 합니다. 그게 한 종족과의 전쟁이 될지라도. 반대로 지금의 세계수는...... 그렇게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지키고 있습니까?"
방문을 나서는 아이나를 보며 에밀리아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계수의 결정과 행보는 솔직히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엘프였다.
세계수를 모시고 그 의지체를 따르는 숲의 종족.
그렇기에 잘못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돌아설 용기는 쉽게 나지 않았다.
* * *
대규모 엘프 병력들의 속도는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진군해왔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수만.
한 종족의 병력이라고 봤을 때. 절대 많은 수라고 할 순 없지만, 단순 1차적인 공격대의 숫자라고 생각하면 이보다 몇 배는 더 많을 거라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었다.
세계수는 하인스 영지를 공격하는 군대에 엘프를 포함하여 신목의 주변에서 살던 수많은 정령수들을 동원했다.
일반 동물과 다르게 정령의 힘을 조금이나마 사용할 수 있는 정령수들은 이미 충분히 무기를 지니고 있었고, 하나의 이념에 의해 움직이는 정령수들의 공격은 어지간한 방식으론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것도 사실이었다.
본래라면 저들의 공세를 역으로 부숴가며 신목까지 밀고 가는 게 우선이다만.
저들이 대비도 없이 이곳까지 오진 않았을 테니 단번에 유리해지진 못하더라도 시간을 끄는 데에 특화가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협곡의 끝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내 발치에 놓인 세 개의 수정구를 통해 전장의 상황을 속속들이 보고받았다.
[저들은 3방향으로 군대를 나누어 진격하고 있습니다. 다만, 게릴라전을 위해 파견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실패한 것으로 보아 일정 거리에 닿는 순간 저희를 감지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연락하는 살리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 전쟁을 할 때 상대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게릴라 전은 중요하다.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 말이다.
그런데 게릴라 전을 위해 파견된 부대가 그들의 근처에 가기도 전에 모조리 들켜 사살당한 것을 보면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거리까지 탐지가 뻗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진군 준비는요?"
수정구를 통해 질문을 던지자 대답이 다시금 들려왔다.
[준비 자체는 되어있습니다. 저들의 군세가 흐트러지는 순간 언제고 들이닥칠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습니다.]
"게릴라전은 이쪽에서 하지요."
가까이 가면 들키기 때문에 게릴라전을 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멀리서 노크라도 해드려야지.
엘프들의 감지 범위 바깥에 위치한 거대한 협곡의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마침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엘프들을 발견하고는 허공에 주먹을 가볍게 두드렸다.
투웅!!
동시에 내 손끝에 커다란 스태프 하나가 끌려 나왔다.
-오오......초월의 종언!
여전히 초월의 종언만 보면 눈을 반짝이는 페르세르크였다.
우우우웅!!
초월의 종언이 가진 힘은 마법의 축소와 거대화.
하지만, 그것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이 스태프가 아무런 힘도 없는 불량품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스태프는 마법 사용의 보조 역할일 뿐 권능 자체는 추가적인 힘일 뿐이니 말이다.
묵직하고 커다란 스태프를 붕붕 돌리던 나는 그들이 일정 거리까지 오기를 말없이 기다렸다.
"륀느. 공격이 떨어지는 순간 디셉티콘 편대에게 공격 명령 내려."
"명령 인수."
담담하게 답하며 눈을 반짝이는 륀느였다.
[엘더 브레인, 명령 인계, 포화전술을 채택. 이외의 병력은 호위.]
[명령 인수]
[명령 인수]
저격용 골렘인 스나이퍼와 미니건 형태의 마탄을 발사하는 저거노트의 답변이 들려왔다.
[아울러 륀느, 추가 명령 인계. 메가트론 천벌포모드 가동.]
[천벌포격 가동. 사용 시 마나의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메가트론의 신무기가 마음에 드는지 륀느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조금 들 떠 있었다.
처음으로 세상에 디셉티콘 편대의 골렘들이 반쯤 공개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살리반이 머리가 좋은 이라면 이 사실을 밖에 토로하진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내 사람이 아닌 외부인에게 처음으로 골렘을 드러낸 꼴이었다.
륀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사정거리 안까지 들어온 엘프 군단을 향해 망설임 없이 스태프를 휘둘렀다.
동시에 대량의 마나가 몸 안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6서클]
[광폭계]
[멀티 익스플로전]
치직......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은 소리였다.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도 모른 채 행군을 지속하고 있던 엘프들은 갑작스레 반짝거리는 자신들의 주변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콰아아앙!!!!
그것은 곧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이쪽에서 제대로 된 공격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콰아앙!!!!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폭음과, 새카만 연기.
터져나가는 대지를 보며 나는 품 안에서 꺼낸 마나석 하나를 손에 쥐어 그대로 부서뜨린 뒤 허공에 흩뿌렸다.
마나의 촉매가 부족하면 채워 넣어야지.
"포화 개시."
[포화]
콰앙!!
한 차례 제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는 엘프들의 본진을 향해 대량의 광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