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0권 3화
이그드라실이 가질 수 있는 기억능력은 언 듯 계산했을 때 단순히 넘길 수 없을 만큼의 대량을 보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녀의 정신체에 내 기억을 모조리 쑤셔 박아도 큰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게 기본적인 계산법이기도 하다.
반대로 나의 경우 평균 수명이 100년도 되지 않는 인간이 아니던가.
이런 기 싸움의 결과에 누가 더 유리한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강행했다.
그녀의 정신이 완전히 붕괴해 무너질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까운 확률로.
[끄윽?! 이......이 무슨?! 오냐! 그래 한번 들어와 보거라! 한낱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여의 기억을 버텨내는지 한번 보자꾸나! 필시 그대의 머리는 과도한 기억의 여파로 부서져 내릴 터!]
대체 내가 어떻게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짓을 저지르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그녀가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곧 광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향해 소리치던 그녀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이......이게 무슨......]
그녀는 내가 고작 20년도 살지 못한 일반적인 인간이라고 알고 있는 모양인데.
애석하게도 내가 가진 기억의 양이 많다.
전생의 삶 20여 년가량.
이곳에서의 삶 10년보다 조금 긴 시간.
그리고.
회랑에서 보낸 시간 1000년.
인간의 뇌는 140여 년 분의 기억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보통 기억하는 것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메모리라도 한계는 존재하는 법이기에 초월적인 존재가 아닌 이상 인간은 초당 수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한 것만 남긴 채 소거하는 방식을 쓰니 말이다.
그렇기에 사실상 천 년이라고 해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그리 많을 수가 없다.
그래야 정상인데.......
애석하게도 나는 강해진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정신을 강화해 기억을 잃지 않게 바꾸는 것으로 기억을 보관했다.
그러니까.
[이......이게 무슨?! 아아아아악!!]
넌 지금 보통 인간 기준 수만 년, 혹은 수백만 년에 달하는 기억을 단숨에 받은 거란 소리다.
단순히 삼천 년 이상을 존재해온 페르세르크나 수천 년을 살아가는 그 비만 도마뱀들조차 망각은 하는 생물이라는 건 제법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런 기억 교환 과정은 지금껏 두 번 있었다.
첫째가 페르세르크였고.
둘째가 세계수 이그드라실이다.
페르세르크의 경우 권능의 본래 주인이었기에 과부하가 되는 기억의 대부분은 들어오기 전부터 걸러져 버려지지만 이그드라실은 그런 안전장치가 없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세계수의 의지라 해도 단번에 방대한 기억을 얻는다면.
결과야 뻔하지.
온몸을 버둥거리며 발버둥 치는 그녀에게서 물러난 채 나는 비틀거리며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내가 그녀에게 내 기억을 심어 넣었듯. 그녀 또한 내게 300년에 달하는 기억을 심어 넣었다.
천 년이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작 300년 가지고 그러냐 하면 할 말이 없긴 하다만.
실상 그 정도 기억도 적은 양은 아니니까.
반사적으로 내게 달라붙어 내 머릿속의 기억을 빠르게 소거시키고 필요한 것만 남기기 시작한 페르세르크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저항하지 마라, 본녀가 그대를 지킬 테니!
"......"
그럼 어떻게 하냐고 반박해주고 싶은데 당장은 단어 하나하나 조합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대량의 정보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져 가는 이그드라실과 대치한 채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인상을 찌푸리길 한참이 흘렀다.
고요한 몇 분간의 스펙싸움이 시작되고 결국 승리한 것은 이쪽이었다.
[그으으아아아아아악!!!]
온전히 정신체로만 이루어진 이그드라실은 내가 가진 방대한 기억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동시에 페르세르크는 그녀의 300년 가까운 기억 대부분을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린 뒤 단 한 가지 정보만을 남겼다.
이그드라실이 도망친 장소.
멀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내게서 도망쳐야 한다고 느꼈고.
남은 힘을 모조리 쥐어짜내 공간을 넘었다.
현재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동 능력은 사실상 하나로 줄어있다.
오히려 좌표를 계산하는 공간이동 계통의 마법보다는 원시적이지만.
상관은 없었다.
[축지]
가볍게 발을 두어 번 바닥에 튕긴 내가 마치 구름을 밟듯 허공을 뛰어넘었다.
동시에 마치 세상이 일변하듯 주변이 뒤바뀌었다.
그리고 신목의 성지로부터 더 안쪽으로 이어진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청명한 푸른 빛을 머금어 속이 환하게 비치는 푸른 호수를 향해 기어가고 있는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게서 도망친 이그드라실이었다.
[자비로우신 주신이시여, 마에 신음하고 있는 당신의 몸을 구원하소서.......]
힘겹게 중얼거리며 필사적으로 호수를 향해 기어가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 나는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조용히 물었다.
"주신이 답해주진 않지?"
[......]
"그럴 수밖에."
주신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잔인한 자거든.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방해하는 자는 설사 자신이 만들어 낸 초월체라도 버리는 괴물.
그게 지금은 세계수일 테지만.
언젠가는 내가 될 수도 있다.
"원한다면 호수에 몸을 담가도 좋아. 보아하니 신과 소통할 때 몸을 담그는 신성수 같은데."
내 말에 그녀가 파르르 떠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대체......대체 인간이 어떻게......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방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단 말이더냐! 그리고 또 회랑은 또 무엇이야! 이건 세상의 섭리에 어긋난 공간이다!]
"직접 겪은 나도 어처구니없는데, 너라고 쉽게 이해가 될까."
그녀는 나를 흡사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
[인간이......아무리 인간이라고 해도 천 년......아니 그 이상의 정보를 기억한 채 버틸 수는 없는 법.......]
그녀의 몸은 이미 발끝부터 바스러져 사라지고 있었다.
아직 세계수치고는 너무 어린 그녀였다.
모든 생명체는 성장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세계수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직 작은 아이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세계수의 의지라고 해도 고작 500년도 살지 못한 아이가, 갑작스레 제 기억의 수십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정보를 단번에 머릿속에 담게 된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직접 찾아오긴 했지만.
결국,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대는......]
"나는 네 기억이 없어. 몇 개만 빼고 모조리 지워버렸거든."
망각이 불가능한 나라고 해도 내 머릿속에 들어오기 전에 쳐낼 수 있는 존재가 있으니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대로 안전장치가 없었기에 그녀는 기껏해야 20년도 살지 못한 인간의 기억일 뿐이라며 무시했고.
정신이 붕괴되었다.
하.......
내 말에 그녀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선에 담긴 나를 보는 감정은 이제는 두려움으로 바뀌어있었다.
[여......여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 죽고 싶지 않다......죽고 싶지 않아!!]
그녀의 발작적인 외침에는 극도의 공포가 어려있었다.
[여는......여는......이전 대의 의지처럼 죽을 생각 따윈 없다!!]
그리 말하며 필사적으로 기어들어 간 그녀가 호수에 손을 담갔다.
우웅!!!! 쿠웅!!
동시에 하늘에서 보랏빛 숲을 환하게 비출 정도로 강렬한 빛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아......아아...... 이럴 순 없어......이럴 순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주신 프리아 여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듯 보이지만.
빛을 받은 그녀의 육신은 불규칙하고 난폭하지 않고, 오히려 고고하게 바스러져 갔다.
[죽고......싶지 않아...... 여는......그저......]
순식간에 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그녀의 육신은 곧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졌고 그 후 남은 것은 반짝거리는 흩날리는 가루와. 작은 빛으로 만들어진 구슬이 전부였다.
의지체의 소멸은 제법 조용했고. 화려했다.
-데이비.
말없이 빛으로 분해되는 이그드라실을 보던 나는 천천히 내 귀를 잡아당기는 페르세르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그드라실이 처음 태어났을 때, 가장 처음 운명의 흐름을 보았을 때 본 게 무엇인 줄 알고 있는 게야?
"뭔데?"
세계수는 건재하지만, 결국 그 의지체는 바스러져 무너져 내린 것이다.
외부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론 그녀는 스스로 사멸했다.
-인간에게 죽는다는 미래. 다만 지금 같은 상황은 아니었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결과적으론 들어맞았다.
-이그드라실은 극도로 죽는 것을 두려워했어. 그래서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외부 세력을 극도로 경계한 것이겠지.
페르세르크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죽고 싶지 않아서. 가장 두려워했기에 가장 증오했다니.
또 운명을 극도로 신봉하면서. 자신이 죽는다는 운명에서 벗어나려 그렇게 발버둥 쳤다니 웃길 따름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제법 자신의 생에 자신감이 있던데."
-그녀가 인간과 단절하고 200여 년이 흘렀을 때. 그때 운명이 바뀌어서 보였던 모양인 게지.
그때부터 조금씩 뒤틀렸던 모양이다.
운명을 보는 눈이.
우스운 일이었다.
그 무엇보다 운명을 신봉하는 이그드라실이.
사실 가장 먼저 운명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친 희생자라니.
그녀가 극도로 운명을 신봉한 이유는.
뒤바뀐 운명에서 그녀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 운명이 절대 바뀌면 안 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건 꼴이 된 것이다.
세계수의 잔재를 손에 쥔 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세계수 거목은 존재하지만 의지체는 사멸했다.
세상을 떠받치는 힘은 거목 본체와. 의지체 모두가 존재해야 가능하다.
그런 만큼.
한번 죽은 의지체는 다시 새로운 의지체가 되어 태어날 필요가 있었다.
* * *
사라진 이그드라실의 의지체를 대신해 새로운 의지체가 태어난다.
거대한 싸움의 여파로 인해 신목의 성지는 몇몇 곳을 제외하곤 반 폐허가 되어버렸다.
엘프들의 입장에서 나는 갑작스레 쳐들어와 저들이 모시는 신이자 부모인 이그드라실을 죽이고 삶의 터전을 박살 낸 무뢰배일 뿐이었다.
한번 뒤틀린 사이에 무슨 변명이든 무슨 상관일까.
신목의 성지에 있는 모든 엘프가 꽉 막힌 광신도라고 할 순 없지만 지금 상황에 해결법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본래라면 힘으로 밀어붙이면 간단한 일이었다.
실제로 압도적으로 유리하며 선택폭이 넓은 건 이쪽이지 저쪽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세계수가 사라지는 시간은 한참이었다.
조금씩 흩어지는 빛의 가루는 몇 시간이고 사라지지 않았고 그동안 나는 하나도 남김없이 그녀의 사멸 과정을 지켜보았다.
-세계수급의 고위 영혼이 사멸하는 걸 보는 건 흔한 경험은 아니지.
'그래.'
물론, 이그드라실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안돼......."
"안돼!! 신목의 어머니시여!!"
뒤이어 싸움의 여파에서 불안함을 느꼈는지 저마다 무기를 쥐고 찾아온 엘프들은 완전히 사라지는 이그드라실의 잔재를 보며 통곡하고 오열했다.
그 수는 신목에 존재하는 엘프들을 생각해보면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에이션트 가드도 두엇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싸울 수 있는 이는 모조리 긁어온 느낌이었다.
부모처럼 모시는 신목이 눈앞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한 꼴이니 어찌 분해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은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나는 단신으로 이그드라실을 쳐 죽인 무시무시한 괴물로 보일 테니 말이다.
말없이 사라지는 빛가루를 보던 나는 곧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엘프들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머......멈춰라!! 네놈의 악행도 여기까지다!!"
그 외침에 내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시비는 지들이 걸어놓고, 내가 나쁜 놈이라 이건데.......
"경고하는데, 칼 내려라."
"웃기지 마라!!"
말이 통할 놈들이 아닌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노아스. 다 죽여."
원하는 대로 악인 한번 못 되어줄까.
쿠우웅!!!!
아직 정령에너지가 남아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면을 뒤틀며 나타난 거대한 흙의 거인 노아스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엘프들의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그의 위압적인 기운을 본능적으로 느낀 엘프들의 경악스런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어리석은 놈들!!]
콰아앙!!
세계수가 엘프들에게 굉장히 신성하고 신적인 존재라면.
사실상 정령왕도 그에 밀리지 않는 신성함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거대한 지진을 일으켜 일대를 뒤흔들어버린 노아스는 엉거주춤하는 엘프들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내뻗었다.
콰드드득!!
동시에 거대한 흙의 손이 지면에서 튀어나와 엘프들을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