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0권 5화
"헉......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휘리릭......툭.......
[같이 놀자.]
"흐아아아악!!!!"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금발의 사내는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종잇조각을 보기가 무섭게 눈을 부릅뜨며 내달렸다.
사방은 새카만 어둠이다.
분명 익숙한 길일 텐데 지금은 너무도 낯설었다.
상대는 자신의 피를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는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 같잖은 짓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지쳐서 멈추면 종이가 한 장씩 날아든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하리만치 섬뜩했다.
[술래잡기.]
처음엔 숨어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신목의 성지의 엘프들? 자신이 다스리는 이들이긴 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자신의 목숨이 가장 중요한데.
문제는 저 괴물 같은 여성 엘프, 아니 정확히 엘프의 탈을 쓴 기괴한 괴물은 그 틈 사이에 숨어있던 자신을 정확히 찾아내 유유히 엘프들 사이를 파고들어 왔고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그때 그는 보았다.
그 괴물이 지어 보이던 의미 모를 무시무시한 미소를 말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헉......헉......"
체력이 달려 그대로 무너진 그가 눈을 부릅떴다. 부상이 제법 컸던 탓에 도망갈 힘도 남지 않았다.
이젠 종이가 날아와도 도망갈 여력도 되지 않게 되어버렸다.
툭......
이윽고 그의 앞에 종이가 한 장 떨어졌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엘프의 언어였다.
[찾았다.]
툭!
또 한 장.
[재밌어.]
툭!
또 한 장.
[재밌어.]
그 말을 끝으로. 나무기둥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있던 신목의 성자는 눈앞의 검은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는 무언가에 눈을 부릅떴다.
'저벅저벅'
소리는 걸음걸이라기보단 끈적끈적한 타르에 휘감긴 무언가가 기어오는 듯한 소리였다.
"오......오지 마......오지 마!"
형체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의지는 점차 강렬한 패닉에 빠져들어 갔다.
숨은 거칠어지고 눈동자는 새빨갛게 충혈된 채 쉴 새 없이 데굴데굴 굴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끼고 어떻게든 발로 지면을 밀어 뒷걸음질 쳐보지만.......
나무는 단단했고 그의 몸은 뒤로 가지 못했다.
"오지 마......."
이젠 울상이 된 얼굴로 소리치는 그의 정신이 박살 나기 직전.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검은 무언가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
죽은 듯 눈동자만 굴리던 그는 숨소리를 내는 것도 잊은 채 입을 천천히 벌렸다.
휘리릭......툭.
그리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인기척 너머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잡혔네?]
"......"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같이 놀자. 술래잡기.]
다시 한 번 날아든 종이와 함께 사내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흘러내리는 무언가에 눈을 부릅떴다.
밝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런데.
그 머리카락의 길이가 심하게 길었고, 실시간으로 길어지면 자신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흐윽......흐히힉! 히히히히히히히힉!!"
그의 눈이 급속도로 팽창되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마치 홀린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웃음소리가 한순간에 멎으며 그의 눈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크게 뜨여졌다.
"......"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섬뜩한 웃음을 짓고 있는 소녀가 천장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며 기괴하게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 * *
현대의 이그드라실.
정확히는 전전대의 이그드라실 '알'은 마치 오랜 회포를 풀겠다는 듯 에밀리아를 품에 안아 들고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그녀의 의지에 따라 허공이 갈라지며 연녹빛의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한 균열이 생겨났다.
"오호......"
[어서 따라오려무나.]
빙그레 웃는 그녀를 따라 들어간 곳은 아름답다던 엘프의 숲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황홀경이었다.
세계수의 근원석이 잠들어있는 공간은 다름 아닌 세계수 거목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차원 공간이었다.
초월적인 의지가 공을 들여 깎고 다듬어놓은 듯한 커다란 제단과. 그 제단 아래로 이어지는 작은 폭포에는 새파란 빛을 내뿜는 투명한 샘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그 안에는 지금껏 본 적 없던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외형을 지닌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고, 공간의 위쪽에 깔린 가지들엔 윤기가 돋는 깃털을 가진 새들이 저들끼리 지저귀고 있었다.
앞장서서 공간으로 들어선 '알'은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소탈하게 걸음을 옮겨 가지에 열린 황금색의 과실 하나를 따서 내게 던져주었다.
[하나 들거라.]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황금 사과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 향이 더욱 그윽한 느낌이었다.
"이거......세계수의 열매구나."
[그래, 누구 때문에 힘을 반절 잃어 제대로 된 효능을 발휘할진 의문이다만.]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건네준 과실은 보통 과실은 아니었다.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연금술에서 가장 얻기 힘든 재료 물건인, 세계수의 열매.
이그드라실 열매라고.
문제는 내가 한 차례 세계수 거목에 테러를 가한 후라 그 힘이 상당히 소모되어있다는 점이었다.
스윽.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세계수의 과실은 세계수의 의지가 있어야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보통 구하기 쉬운 과실은 아니다.
"어이구, 이 귀한걸. 좋은 재료구만."
[예끼, 욕심이 많은 놈이로고.]
혀를 쯧쯧 차며 걸음을 옮긴 그녀는 하늘하늘한 의상을 곱게 여미고는 부드럽게 조각된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본래 세계수는 이곳에서 나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닌 게야. 그래, 우선 급한 문제부터 해결해야겠지.]
"지금 상황을 알긴 압니까?"
[오랜 시간을 살아온 초월자의 혼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게 아니더냐. 이미 혼이 쇠하여 사라진 내가 어찌하여 여기에 다시 나타났는지.]
그녀의 말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확실히 정상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무엇을 원하느냐?]
"이곳의 자치권, 엘프들의 생사여탈권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겁니까?"
[그럴 수야 있느냐. 다른 것을 요구하거라. 내가 내놓을 요구는 숲의 아이들의 목숨과, 이곳의 자치권, 그리고 문화다.]
"많이 뻔뻔하시네."
내 말에 그녀가 키득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희고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동시에 그녀의 손 위로 호박색의 구슬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만 약속해준다면, 이걸 내어주마.]
"뭡니까 그건."
말을 하면서도 페르세르크의 권능을 사용해보지만.......
[보옥]
-......
-......
돌아온 것은 정체불명의 설명 하나뿐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초월적인 혼의 기억조차 뒤집어 밝혀버리는 페르세르크의 권능이 먹히지 않은 유일한 물건이었다.
[사실 나로서도 잘 알진 못하네.]
"그런데 그걸 협상 카드로 내놓겠다는 겁니까?"
[그래, 이게 언젠가 네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내게 건네줄 것이 있다고 말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중요한 물건이라면 그걸 그냥 내줄 리가 없었다.
"약탈하면 안 됩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거라. 애초에 넌 엘프들이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저들에겐 손 하나 대지 않았을 것 아니더냐. 자비를 부탁하마, 저들의 목숨과 문화를 보호해다오.]
"그렇게 이득은 아니네요."
담담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 영지에 살던 내 영지민들을 핍박한 것도 당신의 전대 세계수였고, 목숨을 위협하며 협박한 것도 전대 세계수였습니다."
거기에 나는 말을 멈추지 않고 이어나갔다.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선제공격을 한 것도 그 여자의 짓이었고. 이곳까지 오는 길에 그 여자가 저지른 꼬장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리고는 말끝을 흐리며 그녀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그렇게 시비란 시비는 다 걸어놓고 저들을 살려주라고? 내가 이 정체불명의 보옥 하나에 내 영지민, 그리고 나를 위해 싸워준 인간들의 목숨을 퉁칠거라 생각했습니까?"
쾅!!
위협하듯 주먹으로 그녀의 뒤편에 놓인 매끈한 나무를 후려치자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그......그만두세요!"
기겁한 에밀리아가 벌떡 일어나 나를 말리려 들었지만 이내 '알'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희생을 잊는다면 오히려 실망했겠지.]
그리 말하며 그녀는 쥐고 있던 호박색의 보옥을 내게 던져주었다.
[가져가시게, 어차피 네게 전해주었어야 할 물건이니.]
"흐음......"
큰 힘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으니.......
"나중에 조금 긁어서 성분 분석이라도 해 보자고."
[추천은 못 하겠군. 내가 본 미래엔 그것이 네 앞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네. 가지고 있어 봐야 나쁠 것 없겠지.]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신의 의지로 인해 소멸했어야 할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내게 건네주는 물건이라 하면......
-역시, 신의 의지가 그대에게 건네주는 물건일지도 모르겠군.
팍팍 밀어준다는 느낌은 드는데 그만큼 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곳 주민들과 네 사이에 생긴 골은 오랜 시간 메워지지 않을걸세,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날름 입을 씻었다간 피바람이 불테고.]
"열매를 주기적으로 제공해주시죠. 지금 것처럼 어정쩡한 것 말고, 제대로 된 거로."
뜯어내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내 말에 그녀의 눈에 피곤함이 어렸다.
[그 열매 하나를 맺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는가?]
"업보라 생각하십쇼."
[씁쓸한 일이로고, 좋아, 까짓거 내어주지. 헌데, 그걸 어디에 쓰려고?]
"나중에 쓸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엘프들의 목숨과 문화, 자치권은 보장해주겠습니다. 다만."
싸움을 걸어왔고 패배했으면 많은 것을 빼앗길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숲과 밖의 관계에 대한 전권은 내게 넘기세요."
내 말에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녀가 나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본래라면 노발대발하며 난리를 쳐도 이상하지 않으련만.
에밀리아도, 세계수 '알'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엘프는 세상 밖으로 나왔고, 그에 따라 수많은 국가가 접촉을 시도할 겁니다. 그 외교권은 내게 있다는 걸 확실히 해줘야겠습니다."
두고 봐라.
두고두고 뼛속까지 빨아먹어 줄 테니.
너희들은 싸움 잘못 걸었다.
[정말 위험한 제안이군.]
"싫다면 타협은 없는 겁니다."
[끄응......좋네. 가져가시게.]
억울하고 분해도 지들이 어쩔 텐가. 결국, 저들은 패배했는데.
목숨을 거둬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안도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혹여 그대와 적대한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습니다. 나는 엘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별수 없군. 교섭은 성립일세.]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돌아섰다.
그때였다.
[암운이 오고 있어, 전대의 이그드라실이 했던 미래의 예견은 불안정했지만 정확한 것도 분명 있었네.]
"마왕 페르세르크는 부활하지 않을 겁니다. 설사 부활한다 해도 당신이 생각하는 미래는 오지 않을 테고."
[아니, 마왕 페르세르크가 문제가 아니야.]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주신 프리아 여신이 어째서 자네 같은 존재를 용인하고 계속해서 거래를 제시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게야.]
"자세히 말해보시죠."
[함부로 발언할 사안은 아니지. 다만, 자네......]
빙그레 웃은 그녀는 곧 내가 놀랄 한마디를 건넸다.
[다른 세상에 있어야 할 생물이 이곳에 있는 걸 보았을 테지? 과연, 단순히 우연일까?]
"......"
[많은 건 보지 못했네, 다만, 주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었고, 그 안에서 생길 앓는 소리를 자네가 처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겠지.]
"개소리."
[나는 자네가 죽인 세계수와는 달라. 미래를 위해서라면 자네와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네, 아니, 나는 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네와 손을 잡을 거야.
"엘프들은 반발할 텐데."
세계수를 맹신하던 그들이라고 해도 극도로 증오하던 나와 손을 잡는다니 웃긴 노릇이다.
[어째서 새로운 세계수도 아니고, 제법 인간에게 호의적이던 내가 다시 깨어났는지.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걸세.]
그녀와의 대화는 거기서 끝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