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0권 7화
서방의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진 않지만, 국왕 크리아네스에게는 여러 가지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첫째, 내가 가장 의문을 표했던, 연합국가인 '현' 국이 어째서 라운 왕국과 사돈을 맺었느냐는 것이었다.
"흐음."
서부국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던 나는 내 다리를 베고 잠들어있는 윈리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려 주었다.
제 친언니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무작정 따라가고 싶다고 울상을 지어 보이던 녀석이다.
고된 행군이겠지만 이번이 아니면 어쩌면 평생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못 해줄 것도 없었다.
"저...... 골 때리는 것 보게............형님, 그 멧돼지 녀석 저리 치워버릴까요?"
귀엽게 잠든 윈리를 웬수 보듯 바라보던 바리스가 혀를 짧게 차며 물어왔다.
"그냥 내버려 둬라. 뭐 어떠냐, 귀엽기만 한데. 그리고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귀여워요? 형님, 진지하게 드리는 질문이지만 저 무식한 망아지가 정말 귀여우신 겁이니까? 쟤는 악마예요. 악마!"
한번 의욕이 샘솟더니 밤낮없이 마법 공부를 하더라.
저런 의욕과 노력, 그리고 내가 해준 혈도 확장 안마라면 20대 후반엔 5서클도 불가능하진 않다.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대륙 최고 천재 마법사라 불리는 율리스가 20대 후반의 나이로 5서클에 들지 않았던가.
"도대체 뭘 하기에 거기에서 호의호식하면서도 피곤해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보십쇼. 형님, 저는 왕궁에 남아 밤낮없이 이렇게 뺑이를 치고 있는데!"
"뺑이? 너 그 말투는 어디서 배웠냐."
내 말에 바리스가 물끄러미 한편에 앉아있던 륀느를 바라보았다.
"이리와."
"뤼......륀느, 이것을 낮게 평가. 평화적인 해결책을 강구할 것을......"
"3초."
"......으그그그그"
표정을 팍 구긴 채 뭉그적거리며 다가오는 녀석의 뺨을 사정없이 잡아당겨 버리자 녀석이 앓는 소리를 냈다.
[차를 대령할까요.]
그런 마당에 넓은 마차의 한쪽에서 준비하고 있던 에나벨이 시녀복장을 입은 채 다가와서 종이에 글귀를 적어 보여주었다.
대기하는 동안엔 한쪽에 배치된 흔들의자에 앉아 망부석마냥 움직이지 않던 녀석이다.
사실 겉보기엔 그저 차가운 인상의 여성이지만, 녀석의 전투방식은 솔직히 나조차도 섬뜩섬뜩한 편에 속했다.
"유리아가 준비해준 게 있을 텐데."
[생리적 혐오감을 유발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이것을 에나벨이 추천하지 않습니다.]
"괜찮아. 맛은 좋으니까."
내 말에 바리스가 잔뜩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형님, 어째 그 기괴한 차를 참 좋아하십니다?"
재료를 듣자마자 맛있게 음미하던 차를 그대로 바닥에 뿜어버린 바리스는 파리해진 안색을 숨기지 못했다.
"맛이 좋거든."
신목의 성녀, 에밀리아에겐 고문 도구로 사용했다만, 나는 사실 이 차들을 상당히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맛이 좋거든. 기가 막히게 중독성도 있다.
그래서 어느새 보니 나도 모르게 찻잔을 음미하고 있더라.
"이 정도면, 사막 뿔 나방의 체액을 빨아먹는 것보다는 낫지."
"세상에......그 기괴하게 생긴 걸 먹는다고요?"
그래, 살기 위해서 먹었었다. 사막에서 식수를 구할 방법이 어디 흔한 줄 아느냐?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으니 훈련을 무사히 마쳤지.
지금 생각하니 내게 생존기술을 가르쳤던, 사실상 회랑 최강자인 헤라 클래스는 정신병자가 틀림없다.
바리스와 윈리만 대동한 채 이동하는 여행은 사실상 오랜만이었다.
"이전에 펠리스티 공국으로 향하던 때가 생각나네요. 그땐 형님이 어찌나 걱정이 됐는지 모릅니다."
"보통은 그렇지."
"사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계신 걸 알았다면 덜 억울했겠네요."
킥킥거리면서도 녀석은 손에 든 서류를 놓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정치를 배우려는 마음가짐 자체는 보기 좋았다.
최소한의 인물만 대동한 채 서부로 향하는 여행길은 단조로웠고 조용했다.
사실 산적이라는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간 큰놈이 왕실 기사가 호위하는 마차를 습격할 생각을 하겠는가.
제 목숨 아까운 줄 아는 놈은 적정선에서 상대를 고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타냐 누님을 이렇게 다시 볼 줄은 몰랐네요. 그동안 잘 지내고 계셨을는지. 참, 형님, 타냐 누님의 얼굴은 기억하십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망각이 거의 없는 존재이니까. 어릴 적 모습이라곤 해도 단발의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초한 미소를 띠던 녀석을 잊을 순 없다.
"그래."
담담한 내 말에 바리스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누님은 평소 성격답지 않게 활 쏘는 걸 굉장히 좋아하셨죠."
"활 쏘는 걸 좋아했다고?"
"네, 그래서 활의 국가라 불리는 '현' 국이라면 그래도 누님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그런 생각도 했더랍니다."
바리스는 내가 국왕 크리아네스에게 들었던 것 이외에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연락 한 번 하기 쉽지 않은 제 누이를 그리워 한다는 게 훤히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 사실은 윈리도 실상 다르지 않았다.
* * *
"하아......"
"마마, 어디 편찮으시옵니까?"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힘없이 웃어 보인 녹발의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녀는 대부분이 검은 머리카락인 이곳 사람들과 다르게 밝은 녹빛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서부대륙 인종들이 검은색이나 어두운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데에 비해 그녀는 엄연히 동부대륙의 느낌이 풍기는 외향의 머리 색을 지니고 있으니 천마리의 닭 사이에 홀로 있는 학과 같은 느낌을 피할 순 없었다.
"마마, 곧 혼례를 치르실 분이 어찌 그리 울상이셔요."
"내가 울상을 지었니?"
"네. 지금 마마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모습인걸요."
시녀의 말에 침묵하던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곧 혼례를 치르겠구나."
담담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예쁜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여미고는 걸음을 옮겼다.
"가자, 잠시, 산책이라도 해야겠구나."
"뫼시겠습니다. 마마."
두어 명밖에 되지 않는 시녀를 대동한 채 궁을 빠져나간 그녀는 조용하고 아담한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번에도 편지는 없니?"
"죄송해요......서찰부에 가봤지만 역시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고......"
시녀 하나가 괜히 울상을 지으며 대답하자 말없이 소녀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래, 거리도 거리이고 이제 나는 출가한 외인일 뿐이니까."
"아니에요. 마마께서 잘못하신 게 아니라구요. 정말......라운 왕국 사람들도 정말 이렇게 매정할 수가. 어떻게 지금까지 편지 한 통을 안 보내는 거죠? 그동안 마마께서 라운 왕국으로 가는 행단에 얹혀 보내신 서신이 몇 장인데......"
"너무 그러지 말려무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가 괜히 그곳에 미련을 가질까 연락을 안 하는 것일 테니......"
"설마 이번 정식 혼례에도 한 명도 참석하지 않는 건 아니겠죠? 그쵸? 마마."
괜히 불안한 듯 시녀 하나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본래라면 괜찮다고 답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소녀는 뭐라 답해야 할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녀 또한 사실 가족이 굉장히 그리웠으니 말이다.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좋겠구나."
"흑......우리 불쌍하신 마마......"
눈물을 훔치는 시녀의 어깨를 토닥여 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괜히 울적한 날이었다.
분명 얼마 후에 있을 정식 혼례를 생각하면 분명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져야 했지만.
그녀는 화려한 생활도, 다수의 시녀도 대동하지 않았다.
그나마 곁을 지키는 이 두 명의 시녀 역시 이곳에서 자신을 따르겠다고 하고 끝까지 남아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시는 못 볼진대......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좋겠구나."
군왕의 비가 되면 이젠 외부 출입도, 서신을 보내는 것조차도 쉽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나라는 여성의 인권이 평균 이상으로 낮은 국가이니 말이다.
그런 마당에 자신과 결혼하는 남자는 비록 이 나라의 왕이라 해도 자신 이외에 벌써 13명의 부인을 두고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지 않았다.
자신이 슬퍼하고 괴로워 해본들 결과는 바뀌지 않고, 혹여라도 결혼에 문제가 생긴다면 곧바로 고국에 큰 항의가 전해질 테니 말이다.
안 그래도 힘들어하고 있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린 그녀는 절대 제 일로 고국에 힘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탁!
말없이 찻잔을 음미하던 소녀는 문득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한 시녀가 실수를 해 찻잔을 깨뜨리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손목을 덮어 가렸다.
"꺄악! 죄......죄송합니다!"
"이 멍청한 녀석! 혼례를 올리시는 분께 생채기라도 나면 어쩌려고!"
격분하는 시녀들의 외침에 소녀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거라."
"죄......죄송합니다! 죽여주시어요!"
"괜찮아......괜찮아."
"마마! 이럴 땐 따끔하게 혼을 내셔야 합니다! 매번 마마께서 웃어넘기시니 다른 비들이 마마의 중요성을 모르고 자꾸 찔러보는 거라구요!"
"맞아요! 네 이년! 군왕비가 되실 분의 몸에 생채기가 생기면 그 즉시 혼례가 무효가 된다는 사실을 잊은 게냐! 정녕 네년의 손목을 잘리고 싶은 게야?!"
"히익! 죄......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마마!"
기겁하며 몸을 납작 엎드리는 신입 시녀의 모습에 녹발의 소녀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잖니."
"후우......마마, 제가 다 섬뜩섬뜩할 정도예요. 그래도......다치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걱정스레 찻잔이 스칠뻔한 소매를 확인한 시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기운 좀 내보셔요. 여기 동부대륙에서 수입해온 쿠키라도 좀 드셔 보시면서......"
"괜찮아......그냥......좀 피곤해서 그래."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괜스레 눈물이 나는 하루였다.
이럴 땐, 꼭 자신을 따라주던 두 쌍둥이 동생과 매번 시원한 웃음을 보여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오라비가 보고 싶은 그녀였다.
자신이 떠나기 전 오라비는 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졌었고 사랑스러운 두 쌍둥이 동생은 언제 리네스 왕비의 마수에 놀아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잘 지내고 있을까. 혼수상태에 빠진 오라버니는 혹여 깨어나셨을까.
말없이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던 타냐는 문득 저 멀리서 보이는 녹색의 머리카락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발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세상에! 빈궁의 정원에 어떤 몰상식한 작자가!"
"시험을 치르고 있는 도중엔 외부인과 함부로 접촉하면 안 된다는 법률도 모르나!"
이에 시녀들이 황급히 눈을 뜨며 소녀를 가렸지만, 소녀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실랑이하는 듯한 목소리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대로 두 시녀를 비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마......마마?!"
"......"
깜짝 놀란 시녀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얼굴도 가물가물할 줄 알았는데.
역시 가족은 가족인 모양이다.
파바바바박!!
그녀는 마치 홀린 것처럼 두 시녀의 틈 사이를 빠져나와 발목까지 덮는 치맛자락을 잡아 살짝 들어 올리고 빠르게 내달렸다.
그리고.
"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녹색 머리칼의 두 쌍둥이 남매를 향해 내달렸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에 놀란 두 사람도 곧 시선을 돌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닿았을 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녀였다.
"바리스......윈리......"
"누님!"
"언니!"
동시에 쌍둥이 소년 소녀도 녹발의 소녀의 정체를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뜨며 한걸음 내디뎠다.
"바리스!! 윈리!"
어찌나 보고 싶었던 것일까.
소녀는 체통도 잊은 채 힘차게 달렸고, 곧 두 남매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은 채 오열했다.
울적한 기분, 눈물이 핑 돌 것처럼 우중충한 날이었지만. 그런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소녀의 나이 16세.
성년이 된 나이로 곧 이 나라 '현' 국의 국왕의 14번째 비가 되기로 내정된 타냐 올라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