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1권 1화
88. 남의 스승을 흉내 내지 마라.
콰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나타난 괴인의 존재에 그곳에 있던 그 누구도 쉽게 반응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이곳에 와서 한 것은 별것 없었다.
단순히 피 냄새가 난다는 밀피유의 증언에 따라 벽화를 건드렸고, 유일하게 고대의 유적에서 나온 륀느의 힘을 이용해 조사한 것뿐이다.
아니, 어쩌면 륀느의 그런 행동이 트리거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말없이 혈광을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낸 보랏빛 머리칼의 거한은 이내 륀느와 밀피유를 흘끗 보고는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동시에 밀피유가 눈을 부릅뜨더니 급히 몸을 던져 륀느를 밀쳐버렸다.
"연구자료!"
투쾅!!!!
그리고, 순식간에 날아든 거한의 주먹이 륀느를 다시 노리고 파고들었다.
물론, 륀느에게 향한 주먹은 정확히 밀피유에게 적중했지만 말이다.
"끄억!!"
그대로 몸이 꺾여 튕겨 날아간 밀피유는 힘없이 그대로 벽에 처박혀버렸다.
단순히 자신의 중요한 연구 소재가 다칠 위기라는 것에서 나온 초인적인 반응이었을까.
둘 다 반응 못 할 위험한 공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륀느는 두 번째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말았다.
물론, 몸을 던져 륀느를 구해낸 밀피유의 상태는 처참했다.
마치 복구 자체가 안되는 건지 상반신만 남기고 하반신이 증발해버린 그녀는 벽에 처박힌 채 짧게 경련했다.
"압도적인 물리력......회......회복불가......흐......흥미로워."
죽어가면서도 저런 말이라니 웃길 따름이다. 정확히 저 정도 부상이라도 죽지 않는 게 뱀파이어이긴 하지만.
"륀느......매우 낮게 평가."
다만 두 번이나 구해졌다는 사실이 륀느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서서히 가열되듯 붉게 변하기 시작한 륀느가 처음으로 표정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륀느, 감정회로가 한계치까지 가열 중. 이것을 극대노라 명시."
낮게 중얼거린 륀느는 거침없이 이를 악물었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무표정을 고수하던 륀느에게서 처음으로 표정이 나온 것이다.
이윽고 밀피유를 바라보던 거한의 혈광이 륀느에게 향하자 그녀는 말없이 한 손을 옆으로 펼쳤다.
우웅......
동시에 빛의 입자들이 그녀의 팔로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작은 상자 모양의 큐브가 생겨났다.
동시에 그녀의 가슴께에서 붉은빛이 서서히 피부 너머로 보이기 시작하며 핏줄 같은 빛이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평소 륀느와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륀느......리미트 오버, 대 마룡 토벌형태를 전개."
"집어치워."
그때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새카만 어둠 속에서 팔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륀느를 향해 몸을 웅크리던 거한의 머리채를 낚아챈 것이다.
"데이비님!"
놀란 륀느가 그 팔의 주인인 데이비를 불렀지만, 데이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거한을 낚아채 그대로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기계 심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던 륀느는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멍하니 심연을 바라보았다.
* * *
새카만 어둠은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이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반사적으로 상처가 났던 복부에 손을 올렸다.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고통에 정신을 놓고 비명을 지르고 있을 틈은 없었다.
[하이네스 힐]
순식간에 신성력을 각성시켜 그대로 신성마법을 발현하자 고통이 서서히 아물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이네스 힐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이 새카만 지옥에서도 마법이 원천 차단되지는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망할.'
신성력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스르륵......스륵......
이윽고 어딘지 모를 어둠 속으로 떨어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이런 식의 부자연스러운 어둠은 실상 처음이었다.
빛을 삭제하는 극한 흑마법인 울티마라도 터진 것인가.
라이트 마법을 쓰면 어둠이 빛을 먹어버리고 사령안을 발동해도 주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탓에 전신의 감각이 더욱 예민해진 기분까지 들 지경이었다.
사람의 원천적인 감정을 극대화하는 공간.
이건 분명히.
페르세르크가 말했던......
신의 빛조차 먹어 삼키는 심연.
단순히 빛의 입자를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블랙홀과는 다르게 빛 자체를 없던 것으로 만든다.
이런 곳에 떨어져서 어디가 오른쪽인지 어디가 위인지조차 알 수 없는 사태라면.
말 그대로 감옥이 아닌가.
그때였다.
우웅......
엉망이 되었던 감각 속에서 부드럽고 작은 무언가가 닿는 감촉이 느껴진 것이다.
-데이비, 잘 들어. 심연에서 그대의 감각을 믿지 마. 본녀의 말 또한 함부로 믿지 마.
심연은 대상을 끝없는 혼란 속으로 끌어내린다.
본래 심연 속에선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대는 본녀가 지켜주겠어. 그동안 그대가 본녀를 위해 해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쯤은.
마치 무언가를 희생하듯 중얼거린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선명해지며 서서히 감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페르세르크는 본인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심연의 마왕으로 태어났다.
즉, 심연이라는 것은 그녀에게 가장 친숙한 공간이라는 소리였다.
이윽고 새카만 어둠 속인 데도 어째서인지 서서히 형체가 흐릿하게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멀지 않은 경사 위에 나 있는 커다란 구멍 너머로 륀느를 노리고 있는 거구를 볼 수 있었다.
동시에 륀느를 밀친 밀피유가 놈의 주먹에 치명상을 입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이후 무엇 때문이었을까.
륀느는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난 얼굴을 보이더니 이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변하게 두면 안 된다는 본능이 위험하게 울려 퍼졌다.
투쾅!!
그 이후의 행동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대로 바닥을 박차 튀어 오른 나는 가차 없이 보랏빛을 띠는 산발을 낚아챈 뒤 그대로 거한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집어치워."
나는 네게 스스로를 망가뜨리라 허락한 적이 없다.
그대로 내 손에 끌려들어 오는 거한을 보며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남의 몸에 구멍을 냈으면 그쪽도 아작 날 각오를 하셔야지.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다르게 생겼어도 특유의 느낌. 그리고 기운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왜 여기 있는 겁니까."
헤라클래스.
회랑 최고 강자인 두 사람 중 한 명으로.
다른 모든 영웅이 꼭지가 돌아버린 로 아이아스의 최대 규모 흑마법을 맞고 넉다운 당했을 때.
유일하게 맨몸으로 버텨낸 괴물 같은 초인.
내게 전투기술보다는 생존기술과 단순 육체 강화를 가르쳤던 영웅이다.
그의 출신은 사실 불분명하기 그지없었다.
미운 정 고운 정 시간이 들면 든다고 하던가.
대부분의 영웅들은 오랜 시간 나와 지내며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그들의 출신은 어디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하지만.
헤라클래스만은 다른 수많은 영웅들과 비교해도 조금 다른 구석이 있었다.
내가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이라곤 회랑 최고령자라는 점.
그리고. 그의 무력은 이해할 수 없는 범위에 있다는 점.
사실상 그 두 가지가 전부였다.
어째서 그가 회랑으로 왔는지.
또 그가 어째서 생존능력에 한해서 그토록 특화되어있는지도 알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티오니스 대륙의 출신이었냐 아니냐도 모호하다는 점이다.
-정신 차려! 그는 그대가 아는 그자가 아니야!
혼란 속에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나는 페르세르크의 외침에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몸을 뒤틀었다.
투쾅!!!!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은 감각과 좀 전의 충격으로 인한 여파로 내 몸은 생각만큼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우악스런 손이 내 머리통을 낚아채 사정없이 바닥에 찍어버린 것이다.
뒤통수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오니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회랑의 영웅들은 모두가 강하다.
하지만 헤라클래스는 그들 중에서도 유별날 정도로 강한 존재였다.
내가 힘을 모두 되찾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래도 어림도 없지.
회랑의 영웅들은 한가지 계통에 한해선 정말 역대급 괴물들이 모여있는 곳이니까.
이후 그는 마치 자신을 다시 이곳으로 끌고 온 내게 분풀이라도 하듯 마구잡이로 내 머리통을 들었다가 내리치기를 반복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머리통이 납작해질 만한 파괴력이었다.
-꺄악! 데이비!!
내가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하는 모습 때문일까.
페르세르크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나는 멍한 감각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쓰러졌다.
우웅......
이윽고 쓰러져 있던 나를 놓은 그가 주먹을 말아쥐자 거대한 에너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피하기도 전에 공간이 일그러질 것 같은 거대한 공격이 내 미간으로 내리꽂혔다.
* * *
시야가 흐리고 귓가에선 연신 삐이이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죽기 직전이라는 것.
고대유적에 상식을 거부하는 무언가가 잠들어있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심한 케이스였다.
도대체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또 왜 헤라클래스가 이곳에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저 거한은 헤라클래스가 아니다.
안 그래도 형체가 불분명한데 흐릿한 시야로 그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인다.
산발은 비슷하지만.
수염은 달랐다.
그는.
헤라클래스라기보다는 마치 헤라클래스의 과거 모습을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클론처럼.
호문클루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데이비!! 데이비!! 정신 차려!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귀가 징징 울려왔다.
와 이거......
생각지도 못한 결과라 조금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면......
조금 많이 곤란한데......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목표에 조금 돌아가게 되더라도 별수 없는 노릇이다.
안일하게 대처를 한 내 잘못일 테니.
솔직히 저 정도 되는 괴물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심연이 왜 이곳에 펼쳐져 있는지도 의문이다만.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빙빙 돌아가는 시야를 잡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당신은 역시 그 미치광이 양반과 똑같지만 확실히 본인이 아니야."
진짜 헤라클래스라면 내가 본 힘을 지니고 있어도 1분도 채 되지 않아 피떡이 되게 할 만큼 강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본 힘의 반도 못 찾은 나를 죽이지도 못했다?
안 그래도 타 세계에서 넘어온 존재에 조금 의문을 가지고 있던 참인데.
본인이 아니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이곳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심연.
한번 빠져들면 강대한 힘이 아닌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무슨 난리를 쳐도 바깥에 미치는 영향은 극미하다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나를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네까짓 게 뭔데 감히 내 스승 중 한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그 전투방식을 고집하겠다면.
나 또한 조금 힘들더라도 거기에 맞춰주는 수밖에.
으드득......
골격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눈을 천천히 뜨고 몸을 일으킨 나는 순식간에 파고드는 거한의 주먹을 낚아챈 뒤 그대로 당겼다.
혈류가 빨라지고. 근육이 증폭된다.
전신의 혈류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자 그 여파를 받은 것처럼 전신에 문신 같은 새빨간 문양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순수한 기력에 의한 육체개조.
라고는 한다만.
사실 이건 거의 순간적인 육체 불법 개조나 다름없다.
정상범위를 벗어난 다른 모든 영웅들조차 이건 미친 짓이라며 쓰지 말 것을 당부할 정도로 위험한 짓이니 말이다.
심연에선 대부분의 힘을 오랜 시간 사용할 수 없는 듯 보이지만.
내게는 이런 자잘한 심연이 아닌 진짜 심연 그 자체인 존재가 뒤를 봐주고 있다.
순식간에 그의 균형을 무너뜨린 내 눈에 혈광이 어리자 놈이 반사적으로 나를 향해 주먹을 뻗어왔다.
공간이 뒤틀릴 만큼 강대한 물리력은 확실히 강하다.
다만.
너만 그걸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녀석의 주먹 채로 으깨버린 내 일격이 놈의 머리통을 그대로 처박아 지면에 꽂아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