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1권 2화
현재 세계수 알이 머무르고 있는 공간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평소라면 평안하고 고요한 공간이지만 지금만큼은 공간 안에 살고 있는 새들이 쉴 새 없이 울어대고 작은 동물들도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신목의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깔끔하고 기품있는 정복을 입은 작은 소녀는 유달리 소란스러운 공간의 분위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서 오려무나, 에밀리아."
이에 아름다운 정원의 중앙에 앉아있던 여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손을 뻗어왔다.
"이리 와서 어미의 품에 안기렴."
좀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고요해지기 시작했지만, 에밀리아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곳의 동물들은 모두가 세계수 알의 상황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즉 동물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말인즉.
세계수 알이.
그녀가 모시고 있는 모든 요정족의 어머니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신의 존재인 세계수가 불안해한다? 절대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말씀해주셔요...... 도대체 무슨 일인 거죠?"
"걱정할 것 없단다."
"저는 어머니의 신녀에요. 제게도 말씀하실 수 없는 건가요?"
불안해하며 물어오는 에밀리아는 최근 있었던 세계수 세대교체 이후 다시 신목의 성녀가 되었다.
본래 전대 신목의 성녀였지만 새로이 태어난 세계수가 하필 그녀가 모시던 세계수의 의지체이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게다가 주축을 잃은 신목의 성지는 최근의 전쟁으로 인해 지주가 필요한 상황.
그녀의 집권에 반대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후우......이상이......열리기 시작한 것 같구나."
"이상......이요?"
"그래, 이 세상의 심연이란 섭리를 뒤트는 검은 시초."
"검은 시초라니......그게 무슨......"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고 있니?"
"태초......말씀이신가요?"
마치 옛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세상이라는 것은 돌고 도는 것이란다. 나 또한 그것을 직접 본 바는 없지만. 이 티오니스 대륙에 인간, 엘프, 드워프 등등 여러 종족이 있기 전에도 세상이 있었겠지?"
"그렇군요....... 그런 것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그래......"
말을 끊은 알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수억 년간 잠들어있던 이전 세계의 기척이 다시 머리를 들고 있다.
해가 뜨면 달이 지고, 달이 뜨면 해가 지듯.
심연이 솟아오르면 지금 이 대륙은 자연스레 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렇다면 저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언제 생명이 멸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요, 어머니?"
"아니, 그렇지 않단다. 흔히 말하자면...... 인간들의 화폐인 동전의 양면이라 보면 되겠구나. 뒤집을 순 있지만, 앞면과 뒷면이 섞일 순 없단다. 빛과 심연은 서로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조율을 하지."
그런데, 지금 그 법칙이 뒤틀리고 있다.
심연은. 현재 이 세상에는 절대 나와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럼......그게 섞이면 어떻게 되는데요?"
"거기까진 이 어미도 알지 못하겠구나...... 다만, 본디 섞여선 안 될 두 가지가 섞이기 시작하면......"
절대 지금과 같은 세상의 모습이 될 수는 없으리라.
말없이 고개를 돌린 그녀는 천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태양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세계수의 눈으로 보는 태양의 겉면에는 태양의 둘레에 아주 작은 정도이지만 미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새카만 어둠은 감각을 상실하게 한다.
실제로 내게 감각을 전해주던 것 중 유일하게 느껴지던 것은 촉각. 그리고 아픔이 전부였다.
눈앞에 뭐가 있는지, 냄새도 나지 않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 당황할 수밖에.
하지만 그런 혼란은 곧이어 사라졌다.
페르세르크가 모종의 힘을 보태준 것이다.
이런 자잘한 심연이 아닌 그녀는 심연의 마왕 그 자체이니까. 그녀는 모종의 힘을 이용해 내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주변을 분간할 수 있는 힘을 나누어 주었다.
그 덕분에......
콰앙!!
지금 눈앞에 있는 가짜를 쥐어 팰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헤라클래스의 육신이 크게 떨린다.
무식한 일격이 한번 한번 내리꽂힐 때마다 내 숨은 점차 거칠어져 갔지만 반대로 내려치는 주먹의 파괴력은 처음에 비하면 수배는 강해져 있었다.
투쾅!!
무식한 싸움이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내 주먹이 헤라클래스의 안면을 함몰시켜버리기가 무섭게 날아든 그의 두터운 엄지손가락이 내 왼쪽 눈을 후벼 파 뭉개버리고는 그대로 안면의 뼈를 부숴 버렸다.
콰앙!!
고통을 무시한 채 그대로 머리를 내리찍어 치명타를 가한 나는 놈의 손가락을 안구가 있던 자리에서 빼낸 뒤 팔꿈치로 미친 듯이 내리찍었다.
전신이 뭉개져도 죽지 않는다.
해명 불가능한 회복능력으로 계속해서 전투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엄연히 광전사의 영역이었다.
기교나 판단 같은 것은 완전히 버린 짐승의 싸움이 이러할까.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쏟아부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일격 일격이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전해줄 정도로 강렬한 탓에 폭음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울려댔다.
물론.
그 싸움 자체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헤라클래스와 같은 외형, 같은 공격 방식을 지니고 있지만.
그가 가진 육체 개조 기술은 상당히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육체 강화 기술은 헤라클래스가 회랑에 와서 스스로 발전시킨 기술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회랑의 영웅 중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기도 하며.
가장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기술이기도 했다.
그만큼 어려웠으니 말이다.
쾅!!
일격이 그의 얼굴을 또 한 번 박살 낸다.
빠르게 회복하며 반격을 가하려 하지만 나는 그의 주먹이 쏘아져 들어오는 궤도를 무식하게 힘으로 빗겨낸 뒤 수차례 주먹을 내리쳤다.
쾅!! 쾅!!
서서히 저항이 약해져 가는 그가 죽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흐으읍!!"
이윽고 수십 차례 가격한 공격에 그의 육신에서 힘이 거의 빠져나가자 나는 망설임 없이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 마무리 일격을 꽂아넣었다.
콰아앙!!!!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충격파가 일대를 휘감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심연의 내부가 울릴 만큼 거대한 충격파에 내 손은 뭉개져 버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한번 강화한 육체는 서서히 그 몸을 회복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후유증은 남지 않겠지만.
대가가 싸게 먹히진 않으리라.
"하아......하아......"
숨을 헐떡이며 빠르게 가속하던 혈류를 천천히 진정시키자 전신의 근육이 다시 수축하며 돋아났던 흉흉한 핏줄이 서서히 본래의 형태를 되찾고 줄어들기 시작했다.
"끄윽......쿨럭!!"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놈의 뒷마무리도 잊은 채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피를 울컥 토해냈다.
-데이비! 데이비!
"소란피우지 마. 안 죽어."
-......
담담하게 대답하지만, 과연 어떤 페널티가 주어질지.
나로서도 쉽게 판단할 순 없었다.
당분간 팔이 상당히 저리는 정도에서 끝날 수도 있다.
운이 나쁘면 팔 하나에 감각이 당분간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었다.
헤라클래스식 육체 개조는 강인한 힘을 주지만 그만큼 도박성이 짙고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말이다.
완전히 침묵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헤라클래스를 내려다보던 나는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조심스레 한걸음 내디뎠다.
이 심연의 내부에 있던 존재인 그가 죽었으니.
남은 것은 이 어둠 속에서 탈출하는 것뿐이리라.
이놈의 공간은 완전히 봉인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져 왔다.
그때였다.
스르륵......
끝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무언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
"잠깐."
짧게 그녀의 말을 끊으며 숨을 천천히 고르던 나는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심연의 힘이 약해지며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던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무엇이 나를 보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
-프리아님 맙......소사.......
기겁한 페르세르크가 그대로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몸을 잘게 떨었다.
내 시야에 보인 것은 거대한 크기의 뼈였다.
심연 저편에서 묶여 있는 거대한 골룡.
생김새만 따지면 분명히 드래곤의 본과 비슷하지만 나는 이놈이 드래곤이 아니라는 것에 힘을 실었다.
-드래곤?!
"아니야. 드래곤족은 이렇게 크지 않아."
너무 거대했기에.
처음엔 그저 벽으로 보였다.
한발. 두 발.
몇 발자국 물러나서 본 괴물의 크기는 고작 고룡의 크기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지금 이 세상엔 드래곤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회랑의 영웅 중엔 드래곤을 본 이들도 싸웠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기억을 토대로 만든 고룡의 크기는 커봐야 200미터에서 300미터.
세상 어떤 미친 고룡이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육체를 지닐까.
두개골의 크기만 해도 수백 미터에 달하는 크기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완전히 침묵했는지 움직이지 않는 정체 모를 골룡을 향해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페르세르크가 본능적으로 내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가......가지 말아.
"확인해볼 게 있어."
담담하게 말한 나는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은 왼쪽 눈 두덩이를 지압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거대한 골룡의 뼈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가득했다.
"직접 후려치고 깎고 물어뜯은 흔적이야."
누가 이 거대한 골룡을 죽였는가.
범인은 예상 못 할 것도 아니었다.
"헤라클래스......"
좀 전 내 손에 죽은 헤라클래스와 비슷한 존재가 이놈을 이렇게 만든 범인이리라.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아무리 헤라클래스의 클론이 강하다고 해도 이런 존재를 죽일 정도인가 싶은 의문도 들었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육신을 가진 거룡이라면 그 힘부터가 보통이 아닐 텐데.
도대체 헤라클래스의 클론은 왜 이런 괴물과 싸우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대가 싸운 그 클론은......이 거대한 용을 포함한 것들이 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게 아닐까?
"......설마."
말은 그리하는데.
솔직히 나로서도 마냥 부정할 근거가 없었다.
실제로 페르세르크의 말대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자세하게 보기 위해 골룡의 머리뼈를 바라보던 나는 반사적으로 놈의 이빨 중 하나에 미묘한 힘이 서려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거대한 두개골에 비해 아주 작은 이빨로 그 크기는 2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이빨에 손을 대자.
화아아아아아악!!!!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변에 깔린 심연의 어둠이 안개가 되듯 흩어지며 어둠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꼬리 저편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읍?!"
동시에 엄청난 흡입력이 나를 잡아당겼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팔로 지면을 지탱한 채 그 흡입력을 버텨냈다.
그그그극......그극!!
지면이 뒤집히는 흡입력 속에서 골룡과 고깃덩어리가 된 헤라클래스 클론의 육신이 서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빨라지던 흡입 속도는 이내 둘을 완전히 집어삼켜 버렸고 새카만 어둠이 변한 안개만을 남겼다.
그리고 서서히 흩어져 가는 그 어둠이 사라지자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협소한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심연 속에 있을 땐 수십 수백 미터,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튀어 다니며 싸웠다.
하지만 실제로 심연의 어둠에 빠진 공간은 넓게 쳐봐야 수십 미터가 전부인 작은 공동이었다.
거대한 공동은 마치 무언가 의식을 치른 공간 같았다.
그리고 그 중앙엔 새카만 광석이 위치하고 있었다.
빛을 집어삼키면서도 내부에 무언가 빛을 머금고 있는 듯한 이질적인 광석.
그 광석이 이 심연의 근원이었을까.
홀린 것처럼 다가간 내가 그것에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아......아아......이 힘......심연의 근원......당신이시군요. 억겁을 찾아 헤맸사옵니다....... 나의 여왕이시여...... 오랜 시간 끝에. 불신자들의 손에 억압되어있던 당신에게 자유를......맹세하오니.]
사라져 버린 심연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가 있었다.
서서히 옅어지던 목소리는 곧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조용한 의식장의 모습과 천장 쪽에 드러난 구멍을 통해 말없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륀느의 모습이 전부였다.
갑작스레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자 륀느는 거침없이 천장에서 뛰어내려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검은 광석을 손에 쥔 채 허공에 떠 있는 한 소녀를 직시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페르세르크."
하지만 내 질문에도 불구하고 은발의 소녀는 침묵한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데이비.
"너. 내가 심연에서 감각을 찾게 하려고 도대체 뭘 희생한 거야."
내 목소리엔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