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1권 3화
89. 영지 내정
-데이비.
"말해."
내 표정이 험악해지자 륀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데이비. 괜찮아. 그대가 신경 쓸 게 아니야.
"뭘 그만해. 너 돌았냐?"
짜증스레 묻자 그녀가 움찔거렸다.
-본녀가 괜찮다고 했어.
"미안한데, 안 괜찮다. 좋은 말 할 때 대답해."
-......
대답하지 않은 채 내게서 물러난 그녀는 곧 입술을 꽉 깨물더니 이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작디작은 손으로 내 뺨을 쓸어내리고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보......본녀도 무슨 말인지 몰라.
"거짓말하고 있네."
내가 허공에 대고 험악하게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은 다른 이들이 보기엔 혼자서 쇼를 하는 것처럼 보일 거다.
하지만 륀느는 내 곁에 페르세르크가 있다는 언급을 이미 받은 바 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그 목소리. 너를 부른 게 분명해. 맞아?"
-......그래......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나는 확신을 얻었다.
페르세르크의 권능을 밥 먹듯이 사용하며 확인하다 보니 이제는 권능을 쓰지 않아도 눈치로 파악하는 속도가 빨라져 버렸다.
"이미 들어본 목소리구나......"
-......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겠지......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곧 서서히 흩어지며 내게 다가와 내 뺨에 손을 올렸다.
-데이비......본녀는 심연의 마왕이야.
"알고 있어. 그게 왜."
-하지만 마왕이 가지고 있는 권한은 총 6가지. 분노, 거짓, 증오, 시기, 파멸, 음욕. 그곳에 심연 따윈 없어. 심연은 이 세상의 뒷면에만 존재하는 거니까.
말끝을 흐린 그녀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마왕은 주신 프리아가 짜놓은 판의 중역이지. 뒷면의 존재가 간섭할 수 없어. 반대로......
"지금의 너는 전(前) 마왕이지 현재의 마왕이 아니구나."
-......
내 질문에 그녀는 대답 대신 몸을 숨겨버렸다.
대신 사라지기 전 작은 한마디를 남겼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 이번 일이 아니라 해도. 그러니까 혹시라도 그대의 탓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장 집어치우길 바라. 본녀의 태생에 관한 문제는. 그대가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니까.
그게 지금은 아니겠지.
콰앙!!!!
이후 나는 그대로 제단의 일부를 걷어차 박살 내버렸다.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여자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덜컥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건데.
그런 폭력적인 행동에 륀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움찔거렸다.
"데이비님. 혈당 수치가 떨어진다고 분석. 과도한 분노는 악영향을 미쳐."
호주머니에서 작은 과자를 꺼내 내미는 륀느의 행동에 나는 쓰게 한숨이 나왔다.
"가자......"
륀느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흑색의 광석을 노려보던 나는 곧 그것을 아공간에 던져넣었다.
일단 어디에 써먹을지는 나중에 확인하더라도 이것을 놔두고 가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 * *
밀피유는 하반신이 날아간 채로 벽에 처박혀 쓰러져 있었다.
일어날 힘도 없는지 그녀가 침묵한 채 나를 올려다보자 나는 조용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스르르륵......
동시에 사령마나가 흘러나오며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꺼져. 륀느를 구해줬으니 한번은 보내준다."
"......조금 놀라워."
아직 죽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몸에 스며든 사령마나를 신기한 듯 보던 밀피유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연구가치의 소실은 절대 해선 안 될 일이야. 저 생체 골렘 매우 흥미로워. 연구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게 둘 순 없어."
"미친년."
싸늘하게 일갈하며 돌아서자 그녀는 스스로 육신을 서서히 복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러라고 준 힘이니까.
완전히 몸을 복구시킨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기다려."
내 앞을 막아선 그녀는 곧이어 품 안에서 작은 석판을 꺼내 들었다.
"벽화와 관련된 언급이 담긴 고문서. 오랜 시간 봐왔지만 해석한 건 극히 일부분."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석판을 다시 숨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 빌어먹을 의식장에 대해 알아낸 게 있나?"
"많지 않아."
고개를 저어 보인 그녀가 안경을 고쳐 썼다.
"빛조차 삼키는 어둠이 세어나가지 못하게 막는 곳. 심연은......이 시대의 인간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어."
"그거 외엔."
"몰라."
"그럼 됐어, 마음 바뀌기 전에 사라져."
그리 말하고 돌아서는 내 모습에 밀피유는 한참을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종족의 은신처엔......"
동시에 내 발이 멈췄다.
"이런 유적지가 많아. 나는 더 알고 싶어. 당신은 도와줄 수 있을까?"
"집어치워라. 당분간 유적은 다 부숴버리고 싶으니까."
생에 처음으로 엄청난 민폐를 끼친 탓에 기분이 상당히 저조해져 있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고 한다.
페르세르크의 말대로라면 지금 내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큰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다.
적절하게 막았을 테니까
하지만.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결국 내가 유적을 까뒤집어보려다가 유적의 지하에 갇혀있던 심연을 꺼내버렸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다만. 마음 한편에는 이 거지 같은 사태를 주신 프리아가 주도했을 거라는 의심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 * *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시간을 주고, 상대가 생각하게 하고.
그런 행동에 따라서 무언가를 노린다.
다 집어치우자.
당장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때문에 조금 강압적이게 되어버렸지만, 결과적으로 처음 노렸던 것들은 해결이 되어버렸다.
'명' 국이 저지른 사건은 '현' 국과 풀 일이니까.
내가 나서서 중재할 의리는 없었다.
의도하지 않게 큰 사달을 냈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나와 륀느를 포함한 몇몇에만 해당하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명' 국의 천자는 '현' 국과의 거래 끝에 떠나는 그 날까지도 멍한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 국을 떠날 준비를 하던 내게 천자가 찾아왔었다.
그리고는.
한 가지를 물었었다.
"데이비 왕자......그대는 내 어머니를 죽인 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여아로 태어나 12년 가까이 남아를 강요받아온 아이는 몸의 밸런스가 엉망진창이었다.
다행히 수호신의 힘으로 그 여파가 어느 정도 중화되긴 했지만, 그때 당시엔 그 힘을 견디지 못한 천자의 의식이 내면으로 숨어드는 사태에 치달아 있었다.
이후 내가 그 힘을 모조리 태워버리면서 목숨은 건졌지만.
천자가 지니고 있던 가능성도 같이 불타버린 꼴이었다.
아마 검을 익힌다 해도 남들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게 현재 천자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주변인들로부터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천자는 마치 넋을 놓은 사람처럼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명' 국은 비록 강국이지만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이 사태에서까지 대놓고 갑질을 부리진 못했고.
결국 대량의 손해를 감수해가며 이번 사태를 무마시켰다.
물론, '현' 국과 '명' 국의 국제 외교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기에 나는 '명' 국으로부터 신목의 성지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강탈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신하."
"말해주시게......그놈들......그 녀석들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짐은......짐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 질문에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고 싶은 대로 사십시오."
"뭐?"
"역대 왕들이 단명하는 이유는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없어야 오래 살지요."
빙그레 웃으며 천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주변에서 놀란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아무리 그래도 한나라 국왕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천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짐이......이번 일로 그대를 미워할 수도 있지 않나."
천자는 아직 아이였다.
"짐이......끄읍......흡......짐이......이 일로 그대를 미워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렇게 해서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도 됩니다. 뒤에서 제 욕을 하고 헛소문을 퍼뜨려도 좋습니다."
"데이비 왕자......"
"그 정도 어리광은 제가 받아주겠습니다."
괜한 변덕이었다. 내 말에 결국 천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태어나서 사내아이는 함부로 울면 안 된다는 풍조에 따라 억지로 눈물을 삼켜온 아이였다.
하지만 엄청난 사태에 휘말렸고, 천자가 가진 순수한 선함에 반하는 엄청난 테러를 주도한 꼴이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목숨을 잃었고.
국정을 대신 돌봐주던 태평재상은 지독한 배신자였다.
다른 이들이 듣거나 보지 못하게 소리를 차단한 나는 말없이 천자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왜 이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가.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단순히 말해서 나를 우상이라 말하며 해맑게 웃어 보이던 작은 국왕이 그저 안쓰러워 보였을 수도 있었다.
"마음껏 우세요. 나중에. 신하께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때에 도와드리겠습니다."
"흐끅......잊지......않을 게야......짐은 절대 그 말을 잊지 않을 게야! 흐아앙!"
엉엉 울며 엄마를 찾는 아이는 그렇게 지칠 때까지 멈추지 않고 통곡했다.
* * *
하인스 영지로 다시 돌아오는 행렬이 처음보다는 늘어있었다.
처음 왔던 인원에 합쳐 열댓 명이 더 추가되었기 때문이었다.
파혼으로 인해 더 이상 '현' 국에 있을 이유가 사라진 내 첫 여동생인 타냐 올 라운.
그리고 이번 사태에 대해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볼모로서 나를 따라나선 마리아 공주.
마지막으로 타냐의 호위무사였던 단궁과 두 왕녀의 시비가 몇몇 있었다.
본래라면 느긋하게 마차로 이동하려 했으나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나는 곧바로 무리하게 마나를 운용시켰고 거대한 공간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본래라면 수차례에 걸쳐 해야 했을 공간이동 마법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고 수많은 경로를 모조리 생략한 뒤 단 두 차례에 걸쳐 하인스 영지로 공간을 뛰어넘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새파란 하늘이 모두의 시선을 밝혔을 때.
익숙한 하인스 영지의 활기찬 분위기가 우리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당연 서부국가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현' 국의 인물들은 놀라워하는 모습이었다.
당장 공간을 넘는 공간이동도 신기한 마당에 공간을 넘어 와 본 것이 이런 것이니까.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이들처럼 주변을 둘러보는 이들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꺄악! 도와주세요!!"
아주 미약하게 누군가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져왔다.
시비를 제외한 나머진 인원들은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움찔거렸다.
"바리스. 네 누나와 귀빈들 모시고 성으로 돌아가."
"형님. 제가 가겠습니다."
"아니, 여기 내 땅이야."
그리고, 상당히 기분이 더러우니 내가 해결한다.
담담한 내 말에 바리스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기분을 생각해 주었는지 윈리의 등짝을 철썩 후려치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가자 이것아. 형님이 먼저 들어가라 하시잖아."
"아파! 말로 하면 될 걸 꼭 때려야겠냐 이 근육 덩어리야?!"
"이게?!"
투닥거리며 싸우던 두 쌍둥이는 이내 타냐의 팔을 잡아끌었다.
"언니! 어서 가요! 성을 구경시켜드릴게요! 드워프분들이 만들어서 엄청 아름다운 걸요? 아마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에요!"
배시시 웃으며 타냐를 잡아끄는 두 소년의 행동에 나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따라가지 않으십니까?"
"저는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담담하게 눈에 안대를 두르고 대답하는 마리아 공주의 행동에 시비들이 당황한 듯 보였다.
"걱정 말고 먼저 성으로 가 있으렴. 난 왕자님과 함께 돌아갈 테니."
이어지는 마리아의 말에 시비들은 결국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바리스의 안내를 따라 그곳을 벗어났다.
이후 모두가 사라지자 나는 그대로 손을 풀고는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어두운 골목길로 향했다.
"웁!! 우웁!!"
골목길은 아직 빛이 들어오지 않아 상당히 어두웠다.
"이래서 사람이 밝은 데서 살아야지."
혀를 짧게 찬 내가 골목의 모퉁이를 돌자.
그곳에는 몇몇 남성이 평범한 의상을 입고 있는 한 소녀의 입을 틀어막은 채 어디론 가로 끌고 가고 있는 게 보였다.
스륵......
동시에 나는 나서려는 마리아 공주를 막아서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빌어먹을! 조용히 해!"
"얌전히 따라오면 다칠 일은 없을 거야. 우리가 누군지 알아?! 이 계집년이!"
소녀는 분명 평범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소녀이기도 했다.
하인스 영지가 발전하기 전.
고블린의 영토에 끌려갔다가 극적으로 구출되었던 리나라는 이름의 소녀였던 것 같다.
가끔씩 영지 시찰을 위해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맛나게 찐 감자를 건네주던 착한 아이이기도 했다.
그런 리나가 누군가에게 저렇게 납치당할만한 일을 했던가.
-......발전하는 영지엔 어둠도 같이 끼어들기 마련이야. 기생충이 없는 생물은 없어 데이비.
침묵하던 페르세르크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고 말하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바깥일에 신경 쓰느라 내부를 너무 등한시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넌 또 뭐야!"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일까.
용병 같은 경장갑의 복장을 한 사내들은 이윽고 자신들을 막아서는 나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내 뒤에 서 있던, 안대로 눈을 가린 마리아 공주를 보더니 음흉한 웃음을 띠었다.
"뭐야. 그쪽 형씨도 동종 업계였수? 미안하지만 이년은 우리가 먼저 접수했수다. 괜히 충돌하기 싫으면 비키쇼."
"동종 업계?"
헛웃음을 흘리며 묻자 사내 하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보아하니 맞는 것 같은데. 이 형씨 취향 한 번 독특하구만, 얼굴은 반반한데 맹인이라니."
내 모습이나 마리아 공주의 복식이 딱히 고풍스러운 복식이 아닌 터라 내가 귀족이나 왕족일 거라 여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상관없었다.
"그럼 우린 지나가겠......"
"동작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