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1권 14화
조용한 대치가 이어진다.
앞서 나를 막아섰던 두 명과 다르게 마지막에 나타나 나를 막아선 여성은 분명 강자였다.
단순 경지만 따져도 그녀의 검에서 피워 올려진 검은빛과 흰빛이 섞인 화염 오러블레이드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오러블레이드는 마스터의 상징.
들은 말에 의하면 분명 용사 일당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용사라니 이 시대에 웃기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다만.
저 신성력을 풀풀 풍기는 검은 확실히 심상치 않았다.
-데이비.
'음?'
-심연의 권능이 먹히지 않아.
나보다 앞서 심연의 권능을 사용했던 페르세르크가 경악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이에 나도 반사적으로 권능을 끌어 사용하자.
지지직......지직.
[......]
내 앞에 드러난 반투명한 창에는 오로지 점만 가득할 뿐 아무것도 출력되지 않는 기묘한 광경만이 펼쳐졌다.
'페르세르크. 심연의 권능이 먹히지 않는 존재도 있나?'
-본녀가 아는 한에선 없어. 이 세상을 이루는 근간 법칙을 벗어난 존재가 아닌 이상 통하지 않아. 주신 프리아 또한 이 세상에 속하는 위대한 의지니까.
그러니까.
신도 피할 수 없는 권능을 고작, 일개 인간이 피해내고 있다......뭐, 이런 뜻이었다.
하, 웃기지도 않지.
용사 일당이라고 한 것과 그녀의 위치를 대충 추려보면 그녀가 용사 일당의 리더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가 곧 용사라는 말인데.
용사라는 존재가 원래 이런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는가.
미친 건가?
세상이 그렇게 만만할 리가 있나.
이건 그녀가 용사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권능이 오류를 일으킨 것 또한 아니었다.
그녀에겐 권능이 통하지 않는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우리가 온 이상 네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거다!"
저들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어떤 건지 한번 말해보겠나?"
"뭐......뭐?! 나랑 말장난하자는 거야?! 네 녀석, 분명히 경매장에서 노예들을 깡그리 사들인 녀석이잖아!"
경매를 봤던 모양이다.
"흑마법사들이 사람을 다수 필요로 하는 상황은 대부분 제물로써 필요한 게 아니야?!"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틀렸다.
"이래서 선입견이 무섭다니까."
그녀의 외침은 두서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런 로이나를 제지한 레이나라 불린 여성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말이 조금 과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당신이 흑마법사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지금 흑마법사들은 이 대륙에서 극히 위험한 존재이니."
"그걸 누가 정하나."
"애초에 이런 불법적인 경매장에서 태연하게 경매나 즐기고 있던 인간이 착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이것으로 입장은 확실해졌다.
가면을 쓰고 경매에 참가한 나를 본 저들이다.
그들은 내가 불법적으로 노예를 사들여 안 좋은 일에 그들을 이용하려 한다고 판단 한 듯 보였다.
오해는 풀라고 있는 건데.
당장 정신 제압에 걸린 이들을 치료할 생각으로 가득하던 내 입장에선 사실 그들이 귀찮았다.
그렇다고 해명한다고 입 아프게 입을 놀리자니 쉽게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담담하게 말한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4서클 흑마법]
[옥죄이는 사슬]
촤르르르륵!!!
동시에 바닥에서 생겨난 검은 균열들 속에서 검은 사슬이 튀어나와 이곳에 퍼져 있던 이들을 모조리 포박하듯 끌어당겼다.
그 목적지는 다름 아닌 게이트 너머였다.
하인스 영지의 영주성으로 이어진 게이트에서는 이미 내가 말해둔 대로 베르닐 시종장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예정되었던 숫자보다 더 많이 가긴 했지만, 눈치 빠른 그라면 아마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리라.
"안돼!!"
당황한 전위 담당의 여성 검사였던 로이나의 외침과 함께 벽에 처박혀 주저앉아있던 수인남성의 얼굴에도 낭패가 어리는 게 보였다.
반대로 이런 사태가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일당의 리더로 보이는 레이나라 불린 정체 모를 여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 그럼 이곳의 잡혀 왔던 이들은 모두 구했고.
나머지는 이제 내 의구심을 자극하는 저 여자에 대해서 알아볼 시간이다.
"굉장히 낯이 익은데......"
내 중얼거림에 레이나는 침묵한 채 검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검 끝으로 흑백이 뒤섞인 화염이 일렁거렸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
"상당히 비슷한데, 나잇대가 달라. 생김새도 검도."
내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틀어쥔 검을 살짝 비틀며 그대로 내게 덤벼들어 왔다.
"내가 누구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멋대로 판단하지 그러십니까."
그녀의 말과 동시에 거대한 흑백의 화염이 일대를 뒤집으며 나를 집어삼킬 듯 덮쳐왔다.
지켜야 할 노예들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져서 안심한 건지.
아니면 방심한 틈을 타 내게 이곳에 잡혀 온 이들을 모두 빼앗겼다는 것에 분노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는 나를 적으로 인식했다는 것.
단순히 밖에서 흔히 보는 용병단의 모습인데 리더의 수준이 마스터라니.
소드마스터가 어디 뉘 집 개 이름이던가.
일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국가를 경계하게 만드는 것이 소드마스터라는 존재다.
당연 대륙에 퍼진 소드마스터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해도 어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저렇게 용병질이나 하며 돌아다니는 이는 없다.
그러니 더 궁금해졌다.
"하! 네까짓 게 얼마나 잘났는지는 몰라도 레이나가 온 이상 너도 끝이야 이 자식아!"
"조용히 해라! 로이나!"
"뭐 뭐!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레이나는 용사라고! 성검의 선택을 받은!"
그녀의 말에 나는 거침없이 파고드는 백은의 거검을 홍단이로 쳐냈다.
카아앙!!!!
어라?
-호......홍단이로 베지 못하는 게 있다고?!
비 물리 법칙에 속하면 홍단이도 큰 수가 없다.
다만,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이 검은 청단이로 베어도 결과는 똑같으리라.
내가 아는 한에서 홍단이가 베지 못하는 검은 이 세상에 딱 하나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더 의문에 빠졌다.
그게 세상에 두 개 존재할 리가 없는데......
저쪽이 더 이상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날뛰어도 된다고 판단했듯.
나 또한 구해야 할 이들을 모두 구했으니 주변 사정을 봐줄 이유가 사라졌다.
"읏?!"
홍단이와 충돌한 백은의 거검이 거세게 진동한 탓에 당황한 듯 자세가 일순간 무너진 레이나가 급히 내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멱살을 그대로 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한 뒤 왼발을 들어 강하게 지면을 굴렀다.
쿠웅!!!!
동시에 무형 무취, 무색의 충격파가 일대를 뒤집었다.
콰아아앙!!!!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후 어마어마한 강풍과 함께 내가 내리찍은 지면을 기준으로 거대한 크레이터가 흉악하게 퍼져나갔다.
"꺄아아악!!"
거대한 충격파가 지저분한 먼지 바람을 일으켰고 곧 서서히 그 연기가 걷혔을 때.
나를 견제하던 두 사람은 내게서 한참 떨어진 곳에 처박혀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이후,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스러운 기침을 흘리고 있는 레이나의 쇄골 중앙 부분을 손으로 눌러 제압하고는 물었다.
"홍단이로 베이지 않는 검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데."
내 중얼거림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내 쪽으로 향했다.
애초에 그녀가 사용하던 흑백의 화염은 눈속임이 아니다.
그녀가 나를 공격하는 데에 사용한 화염은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성화.
신의 화염 그 자체였다.
-신의 화염에 어째서 검은 기류가......
'뒤틀린 거지.'
뒤틀린 성령.
왜곡된 신앙.
그녀가 휘두르는 검과, 그녀가 사용하는 흑백의 화염은.
용사로 판단되는 그녀가 상당히 뒤틀려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누군지는 직접 보면 되겠지."
"아......안돼!"
그녀가 마스터급으로 강한 것은 사실이다만. 반대로 그 정도 수준에 그친다는 소리다.
그녀가 누가 되었건 어디 한번 보면 답이 나오겠지.
그렇게 그녀의 가면을 강제로 벗겨내려던 찰나였다.
슈슈슈슈슉!!!! 콰앙!
저 멀리서 날아든 칼날 바람이 정교하게 나를 향해 파고들어 왔다.
물론, 그 위력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았기에 한 손으로 쳐내듯 막아버렸지만 말이다.
"마, 말도 안 돼! 윈드커터를 맨손으로 쳐냈다고?!"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로브를 입은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자신의 마법이 튕겨 나갔다는 것에 경악한 듯 보였고 백의를 입은 소녀는 자신의 옷처럼 자신의 위치를 보여주듯 새하얀 빛을 터뜨렸다.
"자비로우신 주신 프리아시여! 눈앞의 마의 존재에게 징벌을!! 스마이트!"
다급한 외침과 함께 내 몸을 감싸듯 새하얀 빛의 기둥이 수십 가닥 쏘아져 올라갔다.
저들은 나를 흑마법사로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흑마법사에겐 사제의 신성 공격마법도 제법 강하고 말이다.
하지만, 물고기가 물에 빠진다고 죽는 것을 봤는가.
나 성자야 이 멍청한 놈들아.
저주가 완전 면역이라면 그보다는 아래지만 신성마법 또한 내게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레이나!"
순식간에 파고든 수인남성이 내게 잡혀있던 레이나를 빼내기 위해 파고들었다.
내가 빛의 기둥에 휩쓸리는 순간이 제 동료를 구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것일 터다.
순식간에 나를 공격해 틈을 만들고 제 동료를 구출하는 행동 자체는 거침없고 좋았다.
물론, 빛의 기둥 속에서 그 모습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그냥 지켜볼 내가 아니었다.
[마왕 유르그 식(式) 군중제어기.]
[마빡 부수기.]
상당한 힘을 내뿜으며 쏘아져 올라가는 빛의 기둥을 뚫고 뻗어 나간 내 팔이 수인남성의 머리 앞에서 멈춰 섰다.
동시에 둥글게 말아둔 중지가 빠르게 튕기며 그의 이마를 후려쳤다.
간단한 딱밤처럼 보인다고?
맞아본 놈은 그 소리 못 할 거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를 정도의 체력이 남은 걸 보니 몸은 어지간히 튼튼한 모양이다.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돈 수인남성 벤디크가 벽에 처박히자 저들 일행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어지간한 소드마스터도 치명상을 입을 몇 차례의 맹공 속에서도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는 것에 경악했다는 눈치였다.
다시금 저들을 떼어낸 나는 방금 전 나를 향해 빛의 기둥을 만든 소녀를 바라보았다.
"신성마법은 이렇게 쓰는 거다. 꼬맹아."
[7위계]
[신성강타.]
투쾅!!!!
"꺄악!!!"
비명과 함께 거대한 빛의 기둥이 백색의 법의를 입은 소녀를 후려친다.
"에실트!! 젠장! 흑마법사가 어떻게 신성 마법을?!"
그게 최상위급 신성마법인 7위계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했다.
"속지 마! 단순 눈속임일 거다! 흑마법사가 어떻게 신성마법을 사용해!"
이를 악물고 코피를 흘리던 수인남성 벤디크의 날카로운 외침에 소년 마법사가 이를 악물고 급히 바람 마법을 시전했다.
다시 윈드커터를 사용하려는 게 훤히 보였다.
그렇다며 이쪽은 이걸로 선물해주는 수밖에.
[7서클]
[템페스트 커터.]
소년이 사용했던 것보다 더 빠르고, 더 압도적인 마나가 움직이며 거대하고 두꺼운 칼날 바람이 마법사 소년의 앞 지면을 후려쳐 뒤집어 버렸다.
죽이진 않았지만, 그 여파로 인해 마법사 소년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을 구르며 침묵했다.
몸이 약한 마법사가 견디기엔 조금 과한 충격이었던 듯싶었다.
순식간에 세 명이 당하자 이번엔 남은 한 명이 움직였다.
바로 처음 나를 막아섰던 밝은 인상의 소녀였다.
잔뜩 분노한 그녀는 등에 매달아둔 방패를 꺼내 차징하듯 나를 향해 파고들어 왔다.
"이 자식!!"
격노한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오르기가 무섭게 가속된 돌진이 마치 마상 전차의 전력질주처럼 파고들어 왔다.
이쯤 되니 괜한 오기가 생겼다.
신성마법엔 신성마법으로, 은밀한 기습엔 대놓고 암습으로. 마법엔 마법으로.
마지막으로. 무식한 돌진엔......
[중검]
[성기사 식(式)]
검신의 중검과 성기사의 기술을 섞어 만든 기술이 발현되자 내 몸에서 신성력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충격 앞에 모두가 윤회의 고리로 돌아가리라.'
[변형 개(改)]
[덤프트럭]
투쾅!!!!!
두꺼운 백색 방패가 그대로 우그러지며 그녀의 육신이 힘없이 날았다.
과한 힘자랑이다.
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데이비, 어린애 같아.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들끓네.'
손발이 오그라든 것 같은데. 좀 봐주라.
내 말에 페르세르크가 실없이 웃어 보였다.
한 손에 레이나의 멱살을 움켜쥔 채 로이나의 돌진에 마주 돌진으로 제압해버린 나는 모두가 기절한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그녀, 레이나를 향해 시선도 주지 않고 물었다.
"너 뭐냐."
내 질문에 그녀는 대답 대신 검을 휘둘러왔다.
공격방식도 익숙한 공격방식이었다.
아주 짧은 공격 거리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리나에게 가르쳐주었던 순간 파괴력 증가의 방식을 고스란히 담아 사용했다.
파괴에 중점을 둔 검술.
"검술. 그리고 그 칼."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개수작 부리지 마."
싸늘하게 말한 내가 물었다.
"넌 일리나가 아니야."
"......"
"그런데 왜 네가 칼디라스를 가지고 있나."
내 말에 그녀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보지? 자아가 무너지고, 검의 형태가 변한다고 내 스승이 만든 칼을 못 알아볼 줄 알았나?"
애초에 그거 진짜 칼디라스가 맞냐?
진짜 칼디라스는 지금쯤 일리나와 함께 폐관수련을 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내 말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
놀랐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끝까지 침묵하는 그녀의 선택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직접 확인하면 되니."
페르세르크의 권능으로 볼 수 없는 상대라면. 이 눈으로 직접 보는 수밖에.
그녀의 가면에 손을 올리기가 무섭게 그녀의 손이 그녀를 제압하고 있던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해명할 수 없는 새하얀 빛이 내 시야를 강타했다.
찰나의 섬광은 내 머릿속을 아주 한순간 헤집어 놓았다.
고작 영 점 몇 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겐 충분한 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짧은 시간이 지났을 때.
내가 깔아뭉개고 있던 용사 레이나는 온대 간데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동료였던 이들도 모두가 사라진 후였다.
"......"
-데......데이비.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페르세르크를 뒤로 한 채 내가 짧게 중얼거렸다.
"와......이거 제대로 당했네."
능구렁이들이 파놓는 함정과 다르게. 그녀는 수십 년간 전장에서 구른 이가 보일 법한 임기응변을 이용해 내게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