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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268화 (267/1,559)

# 26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1권 17화

황제가 쓰는 물품은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고급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의 행실. 그의 모습, 그가 쓰는 물건 하나하나가 제국의 체면과 직결된다.

검소한 왕이라고 허름한 궁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있다면, 과연 타국에서 이것을 보고 무엇이라 말을 할까.

[검소한 왕이구나!]

[본받아야겠다!]

이럴 것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

[린디스 제국의 자금은 고작 이 정도였구나.]

[황제가 품위 떨어지게 저게 무슨 꼴인지 쯧쯧.]

사회 풍조란 어떤 의미로 지독한 세뇌와 심리전이기에 상식이 먹히지 않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이것은 고대부터 전생의 지구에서처럼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변한 것이 없다.

"좋은 '말'이네요."

"서부대륙에서 들여온 일각 코끼리의 머리 뿔로 만든 것이지. 흔히 볼 수 없는 데다 뿔의 크기가 작아 이 말을 한 세트 만들려면 수십 마리의 일각 코끼리의 뿔이 필요하네."

"사치지요."

"그렇지."

담담한 내 말에 그가 껄껄 웃어 보였다.

실질적으로 그는 직위에 겁나지 않고 자신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화할 수 있는 이를 원했던 모양이었다.

"황자 놈들도 그렇지. 알버스 놈을 제외하곤 대부분 나를 어려워하지."

"폐하의 위엄은 린디스 제국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니까요."

"쯧쯧...... 실없는 놈들."

"선공과 후공 어떤 것을 하겠나."

"본래 고수는 선공을 양보하는 법입니다."

내 대답에 데오르트 황제와 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짐이 후공을 가져가지."

"선공을 양보 드리지요."

짧은 침묵이 오가자 멀리서 지켜보던 시종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이렇게 겁도 없이 나오는 건지 황당하다는 시선이었다.

"......"

"좋네, 자신 있다면야 선공을 가져가지. 허나, 짐이 승리하게 된다면 그대에게도 벌이 주어져야 내기가 성립될 터."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대가 패배하면 린디스 제국의 황녀와 혼인하게. 정식적으로 국혼을 하는 게지."

"그렇게까지 해서 소국의 왕자인 저를 고평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내 질문에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것이야 본인이 더 잘 알지 않겠나."

"제가 더 잘 안다라......"

"짐이 봐온 그대의 행보는 마치 거대한 무언가를 차근차근 만들어나가는 것 같은데. 틀렸는가."

"뭐, 좋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해버리자 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그의 말에 나는 앞에 놓인 올드의 수많은 말들 중 기마병을 거침없이 쥐고 꺼내놓았다.

"제가 질 일이, 있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하하하!!!"

격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호승심이 어리는 건 덤이었다.

"좋다! 짐이 직접 지켜봐 주도록 하지! 그리고, 보여주도록 하마. 감히 제국의 황제에게 수 싸움을 걸어온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이다."

"갑니다."

탁!!

망설임 없이 말을 내어놓은 내 눈에 이채가 띠었다.

* * *

"볼티즈 왕국에서 큰 사고를 쳤다지."

탁!

그가 내민 말이 순식간에 전진해온다.

탁!!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해 내가 쳐놓은 진형에 막혀 차단당한다.

"영지민은 저를 바치고, 저를 지킵니다. 반대로 저는 제 방식대로 영지민을 지키겠죠."

내 말에 그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보통 명답이겠습니다만."

"그대의 생각은 다르단 뜻인가?"

"그냥 저는 욕심이 많습니다. 누가 제 사람을 건드리는 꼴은 못 보는 것뿐입니다."

내 말에 그가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고. 평민들은 알지 못하지만 짐과 같은 이들은 이미 그런 소식을 전부 전해 들은 찰나였네."

어떤 미친놈이 자신의 영지에 수많은 영지민 중 고작 셋을 구하기 위해 한 나라를 뒤집어엎을 각오로 쳐들어간단 말인가.

"제법 평화적이었습니다."

정확히는 볼티즈 왕국 자체엔 손을 대지 않았으니까.

내가 부숴버린 건 블랙마켓이 전부였다.

그때의 사건 이후 나는 알만한 사람에게만 소문이 퍼지도록 유도한 뒤 메아리를 다시 고용해 그들을 완전히 말살해버렸다.

직접 나설 것도 없이 그들이라면 블랙마켓 관련 범죄조직을 말살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

"폐하께서 제게 직접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으신 듯 보입니다."

전체적인 판의 흐름은 그의 맹공으로 이어진다.

반면 처음 자신만만하게 답했던 내 진형은 그의 공격을 하나하나 벅차게 막아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성채를 빼앗았군. 벽의 보호를 잃으면 다음 남은 것은 보호받을 힘을 잃은 신관과 기병들."

짧게 말한 그가 이번엔 내 신관 말 하나를 쳐낸 뒤 물었다.

"왕자의 나이가 올해 몇이었지?"

"열일곱입니다."

지구로 치면 아직 새파란 젊은 소년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사회에 뛰어드는 성년의 나이이기도 했다.

"흠 그런 것치고는 세상 경험이 상당히 많아 보이는군. 보통 그 나잇대 놈들은 아무리 영특해도 인지 사고의 한계가 있는 법이거늘."

그의 말대로였다.

라운왕국의 국왕 크리아네스 국왕이 바리스에게 바로 왕태자의 자리를 넘겨주고 국정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 일리나가 비록 화이트 버드라는 거대한 병단의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살리반이 극성으로 그녀를 숨기고 보호하려던 이유.

그 외에 여러 가지.

아직 나이가 많다곤 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유가 있다.

"후후, 그래. 그것과는 별개로 [올드]의 실력은 생각 이하로군."

"제 차례는 끝났습니다."

어느덧 내 진형은 축소될 대로 축소되었다.

반대로 데오르트 황제의 진형은 엄청난 위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일국의 황제답게, 머리가 돌아가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질문 하나 하겠네."

짧은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그대는 용사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가."

그의 질문에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글쎄요."

"성국에서 인정한 성검을 들고 최근 동대륙과 중부대륙을 오가며 악행을 저지하고 있는 이가 있네."

"그것만으로 용사라 부르기엔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성국에서 공인한 용사야. 게다가 그 용사의 수준은 흔히 보이는 용병들과 다르네."

실력이 상당한 소드마스터. 그것도 경험만 따지면 그 이상이다.

단순 출신도 모르는 이가 소드마스터 이상의 존재이고 그가 몸을 아껴가지 않으며 악행을 저지하고 있다는 소문은 당연 용사라는 소문에 힘을 보태준다.

"짐은 그 소문이 힘을 싣고 나아가도록 뒤에서 몰래 힘을 보태주었네. 왜일 것 같나."

그의 의도가 무엇이 되었건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나를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아무리 치안이 좋은 곳이라도 반드시 범죄는 일어납니다. 사람이 사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다만, 파장이 생겨나면 다르겠죠."

악행을 처단하는 존재가 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복잡한 정체, 돈 문제를 초월하고 단순히 악행을 처벌하는 존재.

반대로.

이 같은 것은 왕정체제에 엄청난 리스크를 가진다.

시민의 의식이 황제가 아닌 용사를 따르게 될 테니 말이다.

"왕정체제가 뿌리 깊은 이곳에서 굳이 폐하가 그런 결정을 내리셨다는 것은."

용사의 제국 소속이나 그에 준하는 돈독한 관계. 그리고.......

"상징......정도겠지요."

압도적인 명분을 거머쥐고. 엄청난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한 가지 방법.

다만 내가 아는 그녀가 용사가 맞다면.

그는 지금 한 가지를 잘못 짚고 있다.

상징은.

'살아있을 때나 통하는 거지.'

-......

"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내 대답에 그는 뭐가 그리 마음에 드는지 껄껄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진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불온한 움직임이 있네. 실은 짐이 용사를 받아들인 건 그 불온한 움직임을 이 제국의 수도에서 벌이던 자들을 용사가 해결했기 때문이지."

"......"

"그대라면 어찌하겠는가."

그의 질문에 나는 평소의 대답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제 선에 닿지 않으면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지켜야 할 게 많은 이는 그만큼 적을 만들면 안 되니까요."

"짐이 아는 그대는 그런 것을 무시하고도 남을 정도의 힘이 있을 텐데."

"전쟁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게 누구인지 아십니까."

내 말에 그가 침묵했다.

동시에.

전방에 배치되어있던 그의 군주용 말이 일순간 포위되었다.

좀 전까지 손도 못 쓰고 밀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판을 엎어버릴 만큼 강렬한 한방이었다.

"앞에서 나대는 놈들입니다. 용감하면 명줄이 짧지요, 제 승리네요. 폐하. 폐하께서는 용감한 군주셨지만, 숨겨둔 수가 너무 없었지요."

앞에서 나서고 싶으면 최악의 수를 가정해 그것까지 모두 해결했을 때 나서야 한다.

지나치게 겁이 많은 방법이지만.

가장 안전하다.

그리고, 그 수를 얼마나 빠르게 만들어 내냐가 바로.

뛰어난 지략가의 차이가 될 것이다.

신랄한 독설에 그가 침묵한 채 눈을 크게 떴다.

"당했군......"

* * *

데오르트 알 린디스 황제는 자신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황당한 방법으로 몰아넣은 함정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이 수십 수 앞의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판을 짜는 건 보통 상식선에선 힘든 일이다.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완전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결국 패배를 시인했다.

당연 내기를 걸었으면 오고 가는 게 있어야 한다.

패배했을 때 황녀와 결혼한다는 전제를 깔았던 데오르트 황제의 발언대로라면 적어도 이제 내가 린디스 제국에서 가장 껄끄러워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에이리아의 존재는 내가 현재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존재이니까.

너무 순수하고 착하기에 내가 가진 세상에 찌듯 잣대를 함부로 들이댔다가 검게 변색해버릴 것 같을 정도로 희고 착한 소녀다.

그런데.

"데......데이비 왕자님."

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 다가와 인사하는 소녀의 모습에 내가 해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데오르트에게 보낸다.

평소의 그녀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녀의 머리에 씌워진 예관이 문제다.

다름 아닌 약혼을 공식적으로 공표할 때 머리에 쓰는 관이었다.

그리고.

"받으십시오. 왕자님."

뒤이어 황실 시종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내게 금빛 브로치를 건넨다.

그러니까.

린디스 제국에선 황실 공인 공표 약혼은 남자에게 예장용 브로치를.

그리고, 여자에겐 티아라를 씌워 준다.

"폐하?"

"그래, 짐의 패배는 인정하지. 에이리아와의 약혼을 허하겠네."

이 양반이?

내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데오르트 황제를 바라보자 상대측에서 맹공이 가해져 왔다.

"잊지 말게. 그대와 에이리아의 약혼을 먼저 제의해온 건......"

다름 아닌 라운왕국이고, 비록 네가 마음대로 살곤 있지만 넌 아직 라운왕국의 왕자다.

그것도 스스로 계승권을 포기한 왕자.

그게 무슨 뜻인지.

스스로도 알 텐데.

과거 내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명분으로 제국의 황녀와 결혼시키려 했던 크리아네스 국왕의 제안을 이렇게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데에 사용해버린 그였다.

"짐은 거절하려 하였네. 솔직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에이리아를 벌써 약혼대상으로 잡다니 안될 말이지."

그런데 네가 내기에서 이겨버렸으니, 별수가 없구나.

"궤변입니다. 제가 졌을 경우에 제국의 황녀와 결혼한다고......"

말을 하던 내가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작은 청록빛 머리칼의 소녀를 보고 움찔거렸다.

"그래, 결혼하라 하지 않았네."

약혼하라고 했지.

내가 이기면 약혼, 지면 결혼.

퇴로 같은 건 애초에 줄 생각도 없었다는 말투였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벌일 행동의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장난 같지도 않은 말에 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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