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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269화 (268/1,559)

# 269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1권 18화

93. 큰 그림 싸움.

"그 왕자. 고자가 분명합니다."

단호한 카트린느 대공의 발언에 알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 그런 발언은 좀 자제하시지요. 그래 봬도 일단 에이리아를 구해준 사람이니."

"그러면 뭐합니까. 눈이 삔 것도 아니고 우리 귀여운 황녀 마마를 그렇게 소박 맞히다니요."

"글쎄요.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가령?"

"이미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다던가."

그 말에 주변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럴 확률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직 그가 만나는 여인은 없었습니다."

"뒷조사도......했습니까?"

떨떠름하게 묻는 알버스를 향해 카트린느가 씨익 웃음을 터뜨렸다.

"간단히 확인만 한 겁니다. 확인만."

"일단 제국의 대공입니다. 위치에 따른 책임을......"

"중요한 건 어떻게 하냐는 거겠지요."

"아바마마께서 나서신다면 금방 끝낼 수 있을 텐데......"

젊을 시절. 수많은 여인을 울렸던 희대의 절륜남이 바로 데오르트 황제다.

문제는 가장 큰 힘이 되어줄 린디스의 황제가 아직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에이리아가 하인스 영지의 젊은 왕자인 데이비 올 라운에게 홀딱 반해 있는 것은 알고 있다.

애초에 황족이 차고 넘치는 린디스 제국인 만큼 굳이 그녀를 정략혼의 대상으로 걸 정도로 급하진 않았다.

그러니 도와주고는 싶은데.

동생을 아끼고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길 바라는 알버스나 카트린느와 다르게.

데오르트 황제는 언제까지고 귀여운 딸을 품에 거둬두고 싶어 했다.

그 차이는 작은 듯 보이나 절대 작지 않다.

그가 그런 미적지근한 반응을 계속해서 보인다면, 에이리아가 떼라도 쓰지 않는 이상 절대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정작 상대도 크게 흥미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무엇을 그리 고민하느냐."

그때였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조용한 연무장에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폐......폐하!"

깜짝 놀란 알버스의 외침과 동시에 카트린느는 말없이 고개만 숙여 보였다.

"무엇을 그리 고민하는지 말해보라."

"저......그것이."

알버스가 어찌 말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하자 데오르트 황제의 눈이 슬쩍 가늘게 좁혀졌다.

"대공. 대공이 말해보라."

"폐하. 에이리아 황녀 저하를 언제까지 감싸고 도실 겁니까."

느닷없이 돌직구를 던지는 카트린느의 질문에 데오르트 황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감싸고 돈다?"

"예, 날개를 가진 새는 언제고 새장 밖으로 나가 창공을 날아야지요."

"그 말인즉,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에이리아를 지금 라운왕국의 그 괴물 같은 놈에게 넘겨주라. 이 말인가?"

"어머, 괴물이라뇨. 그 정도면 꽤 상식적이고 좋은 남자 같은데요."

빙그레 웃는 그 말에 데오르트는 말없이 알버스의 앞에 있는 단상에 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화살을 메겨 과녁을 향해 한 발 쏘았다.

"쯧쯧......그만두거라."

"폐하!"

알버스의 반박이 들려왔다.

"에이리아의 상황을 아십니까? 하루 종일 그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의의 말로는 때때로 망상병까지 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십니까?!"

상사병 초기증세.

너무 순수하게 살았기에 순수한 호의에 연심을 품어버린 수인 황녀는.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의외로 고지식한 그 영지의 왕자에게 상사병을 품기 시작했다.

"알버스."

"지금이야 괜찮겠지요. 그렇습니다. 당장은 문제가 안 될 겁니다. 황족이 되어서 손수 고급 털실로 손목 보호대를 짜 선물해주는 걸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헌데 이게 계속되면요?"

뜻하지 않게 반박하는 그의 행실에 데오르트 황제는 침묵했다.

"상사병에 빠진 이들이 어떤 고통을 안게 될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데오르트는 담담하게 화살 하나를 더 매겼다.

그리고는 그대로 당기며 대답했다.

"시간이 약인 게지."

"폐하! 에이리아는 인간이 아닙니다!! 나인테일 일족이 상사병을 겪으면 어찌 될지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도 그렇게 해서......"

"아둔한 놈. 눈이 있으면 보거라. 그놈이 어디 에이리아가 눈에 차서 거절하는 것 같더냐."

"꼭 정실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는 앞으로 동부대륙......아니 중부 서부까지 엄청난 입지를 지닐 겁니다. 그런 그라면 굳이 정실이 아니라 해서 누가 에이리아 그 아이를 우습게 보겠습니까!"

그 말에 데오르트 황제는 혀를 끌끌 차며 그대로 활시위를 놓았다.

피잉!! 타앙!

"한 치 앞도 못 보는 게로구나. 그리해서 어찌 이 제국을 이끌겠다는 겐지."

"그럼......그냥 두시겠단 말입니까?"

"네놈은 데이비 그놈을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그건......"

"속에 다른 여인이 들어찬 놈에게 에이리아를 바친다고 쳐라."

"폐하!"

"그렇게 되면. 그 녀석이 진정 행복할 것 같더냐?"

"능력이 있는 왕족이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건 왕족, 황족으로서의 의무입니다! 에이리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스스로도 원하고요."

"못난 놈!"

엄하게 외치자 알버스가 침묵했다.

"이 아비의 가르침을 잊은 게냐!!"

"......좋습니다. 그럼 적어도 스스로 단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단념할 수 있게 해달라?"

"나서 주십시오. 결혼까지 요청드리지 않겠습니다. 그 아이가 불안하지 않도록. 폐하께서 나서서 하다못해 약혼 관계라도 되게 해주십시오. 완전히 남남이 아닌 존재가 되게 해달라 이 말입니다!"

잔인한 말이었다.

하지만 알버스는 그렇게 해서라도 에이리아가 조금이라도 스스로 무언가 해볼 수 있게 해달라 요청했다.

"폐하.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곪아 터지고 난 후 아문다는 말입니다. 이건 제 입장에서도 알버스 황태자와 같은 생각입니다."

카트린느 대공의 말에 데오르트 황제는 말없이 침묵했다.

그리고는 활시위를 당겼다. 그대로 놓았다.

* * *

"뭐하는가, 받게."

느긋하게 권하는 데오르트 황제의 말에 나는 말없이 브로치를 손에 쥐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걸 주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그가 알지 못하는 내게 남은 마지막 변수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와중에도 딸이 혹여라도 비웃음 사는 꼴을 당하게 두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잠시."

짧게 중얼거린 내가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튕겼다.

따악!!

동시에 나와 데오르트 황제의 주변으로 옅은 투명한 막이 펼쳐졌다.

"에이리아 황녀님을 데려온 건 제 퇴로를 막기 위해서입니까?"

사일런스 마법.

그 의미를 깨달은 그가 조용히 말했다.

"자네라면 어찌하겠는가."

"제가 어찌할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확실히 하게."

짧게 말한 그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짐은 에이리아가 그대에게 빠져있는 걸 타박할 생각은 없네. 그대가 에이리아를 반려로서 받아들이겠다면......그래, 그대를 믿고 에이리아를 맡기겠지."

갑자기 이제 와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좀 전, [올드]를 둘 때, 짐이 왜 그런 자잘한 질문을 던졌는지, 알겠는가."

"시험을 하신 겁니까?"

"자네는 훌륭하게 그것을 통과했고, 짐은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에이리아를 그대에게 맡길 수 있다고 판단했네. 하지만."

짧게 중얼거린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에이리아를 향해 연심을 줄 여력이 없다면."

그가 말을 잠시 끊고 조용히 선언하듯 말했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거절하게. 에이리아가 마음을 놓을 수 있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데이비 왕자. 그대는 지금 에이리아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듯하군."

그의 말에 내가 뭐라 반박하려던 찰나.

페르세르크가 날아와 내 앞을 막아섰다.

-받아들여. 이건 이기심이야.

'억지 부리지 마. 난 여러 사람을 부인으로 두는 게 얼마나 못할 짓인지 잘 알고 있어 페르세르크.'

-여긴 지구가 아니야 데이비!

'나도 억지 하나 정도는 좀 부리자!'

"병이라고요?"

"상사병일세."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단순한 연정 정도겠지. 아마 이대로 두면 점점 심해질 것이고 자칫 앓아누울 것이네."

그의 말에 나는 그가 왜 이런 무리수를 뒀는지 알게 되었다.

거절할 거면 확실히 거절해라.

다만 그게 아니라면 받아들여라.

이쯤 되니 미적지근하게 대응해온 내 쪽에서도 잘못이 있었다.

말없이 황제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청록빛 머리칼의 수인 황녀를 바라보았다.

혹여나 내가 거절하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는 작은 동물 같은 눈망울이었다.

이래서 이건 자꾸 피한 건데. 도대체 어딜 보고 그렇게 연심을 품을 여지가 생긴 건지.

-그대에겐 하찮은 일이 상대에겐 일생의 구원이 될 수도 있어. 거절할 거면 확실히 해. 미적지근한 건 절대 못 봐. 받아들이던지. 거절하던지.

'이건 뭔......'

-잊지 마. 이곳은 지구가 아니야. 티오니스 대륙이지.

사상, 문화, 모든 것이 네가 살던 지구와 다른 곳이다.

지구에서 당연하던 일이, 이곳에선 비상식적인 일이고, 이곳에서 비상식적인 일이 그곳에선 정상이 될 수 있다.

"에이리아 황녀님."

이윽고 사일런스 마법을 해제한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왕자님!"

긴장한 듯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에 널린 게 좋은 남자이니 더 좋은 분을 만나길 기원하지요."

그리 말하며 그녀를 지나쳤다.

"폐하. 가시지요.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용사 나부랭이.

하고 싶은 대로 두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삶을 살아온 여인이.

동시에 에이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지더니 곧 눈망울 끝에 투명한 눈물이 어렸다.

"아......"

눈물이 흐르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는지 그녀가 눈을 크게 뜬 채 굳어버렸다.

그런 그녀가 할 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굳어있던 찰나. 나는 말없이 그녀를 지나쳤다.

그래, 차라리 이게 잘 된 거다. 여지가 남아있다면 멀쩡하고 더 좋은 사람 만나게 해줘야지.

"데......데이비 왕자님!"

"......"

이에 걸음을 멈춘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내게 뛰어와 품 안에서 꺼낸 작은 상자를 내게 건네주었다.

"이건......"

"죄송해요....... 제가......폐를 끼쳤죠? 흐끅......"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한 그녀가 힘없이 억지웃음을 지어냈다.

"털실로 만든 손목 보호대에요. 날씨가 많이......많이 추워요. 왕자님. 그러니까 꼭 감기 조심하셔야 해요."

엉엉 울면서도 그녀는 말을 끊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죄송해요......죄송해요. 그러니까......마지막 선물......선물이에요,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하지만 열심히 손수 짠 거니까......이것만이라도. 흑......흐끅."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며 말하는 그녀의 행실에 나는 역시나 싶은 심정에 침묵을 고수하며 그녀가 준 보호대를 받아들였다.

그때였다.

털썩!!

현기증이 왔는지 비틀거린 에이리아가 그대로 쓰러져 버린 것이다.

"에이리아!!"

경악한 데오르트 황제의 외침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나는 곧바로 쓰러지던 그녀를 받쳐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마나를 활성화했다.

"......"

몸이 불덩이다.

의식을 놓아버린 그녀는 눈을 뜨지 못했다.

"연회장에서 용사라는 작자가 기다린다고 했습니까? 따로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그냥 두게, 어의를 불러 궁으로 옮길 테니. 용사의 직급이 비록 출신 불명의 평민이라곤 하나 짐은 약속을 어길 수 없네."

뜻밖의 냉정한 발언이었다.

"폐하."

"에이리아가 저 지경이 된 건 그대 때문 아니었나? 알량한 선행으로 한 사람을 들었다 놨으면 됐지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생각인가."

그의 노기 어린 발언에 나는 쓰러진 에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에이리아의 표정은 좀 전과 다르게 굉장히 수척해 보였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의원에게 환자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내 말에 그가 침묵했다.

그때 봤어야 했다.

빌어먹을 그 황제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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