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1권 20화
"아......"
멍한 목소리로 정신을 차린 에이리아는 이전의 자줏빛 눈동자도 빛을 머금던 머리카락도 사라졌다.
다시 본래의 작고 아담한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신이 드십니까?"
담담한 내 질문에 그녀가 움찔 몸을 떨며 내게 고개를 돌려왔다.
"데......이비 왕자님?"
"전날의 일, 기억하십니까?"
그녀의 맥을 짚으며 무심하게 묻자 그녀가 착잡한 표정으로 옅게 탄성을 흘렸다.
"죄송......해요.......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는데......제가 쓰러지는 바람에......"
그녀의 대답에서 나는 그녀가 본능 각성 시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흑......"
그때였다.
갑자기 누워있던 에이리아가 흐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잘게 떨던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울면 안 되는데......그냥......그냥 막 들떴나 봐요."
울먹거리며 말하는 그녀를 나는 계속해서 침묵한 채 바라보았다.
"처음 약혼 대상이 왕자님인 걸 들었을 때. 세상에,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어요. 정작 왕자님은 생각하지도 않고......"
울먹거리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조금만 더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인데.......너무 성급했나 봐요."
이에 굳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였다.
"죄송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방해둔 약은 꼭 챙겨 드십시오."
"네......"
"그리고, 약혼식은 진행합니다."
내 말에 그녀가 움찔거렸다.
"다만, 서로 간에 아는 게 많지는 않죠."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모든 결정은 황녀님이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짓도록 하죠."
황녀께서도 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고, 나 또한 그러하니.
"그래도 일단 약혼이 오간 관계이니 제게 다가오는 걸 너무 무서워하진 않아도 됩니다. 시작은 친구부터 하도록 하죠."
다시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황녀."
내 미소에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의도하지 않았기에. 숨기는 것이 없기에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저 미소와 울음에는 자꾸 약해지는 기분이 든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 * *
끼이이이이익!! 쿵!!
거대한 문이 열렸다가 닫히며 내부의 공간이 드러났다.
연회장에서의 만남이 취소되었다고 해도 굳이 연회장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제국의 쌍두룡께 영광이 있기를."
겉치레를 담아 인사를 올린 나는 개인 집무실의 내부에 있는 이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있는 데오르트 황제와 그의 곁에 있는 알버스 황태자.
그리고 그와 같이 있는 카트린느 대공.
마지막으로 5명의 각기 다른 일행들이었다.
예의 밝은 인상을 지닌 소녀와 차가운 인상의 수인 남성.
그리고 아직은 어려 보이는 두 소년과 소녀.
마지막으로.
회색빛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백발의 여성이었다.
-머리가 더 하얗게 변했는데?
페르세르크가 용사 레이나의 머리를 보며 의아해했다.
'수명이 많이 남지 않았어.'
그녀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심연의 권능이 먹히지 않는 존재다.
하지만 볼티즈 왕국에서 그녀가 내게서 탈출하려 했을 때.
그녀를 이곳으로 보낸 존재는 내게 그녀의 삶을 한차례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모르는 진실을 나는 일면 본 적이 있었다.
내 등장에 말없이 나를 지켜보는 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조용히 데오르트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친분을 쌓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올드 한 판 두시지요."
내 말에 그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데이비 왕자."
"황궁 부술까요?"
내 말에 그가 침묵한다.
당황한 알버스 황태자와 카트린느 대공. 그 외에 다른 이들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네. 한 판 두지. 다만, 이번엔 전처럼 당하진 않을걸세."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알버스가 준비해주는 올드의 말을 흘끗 바라보았다.
"저도 봐주는 건 그만두렵니다."
타악!!!
"으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두기 시작하는 공격 방식에 그가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이어진 올드의 진행은 보는 이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세상에......폐하께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릴 줄이야......"
올드는 전략 게임이다.
기존의 지구에서 흥행했던 체스와 비슷하지만. 각종 전략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전략을 채택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도 쓰지 못하고 말려버린 정세에 그의 눈이 찌푸려졌다.
"손도 못 대겠군."
"다음 수에 패배하십니다."
"한 수 물려주지 그러나."
"그 말만 벌써 일곱 번째이지요."
정작 용사를 만나러 왔지만 나는 그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럼에도 상황은 내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저기, 에실트, 저 사람이 하인스 영지의 데이비 왕자님이지?]
[아직 어려 보이는데요? 로이나와 비슷한 나잇대 같지 않아요?]
[대단하네....... 그런데 황제 폐하의 앞에서 주눅 드는 게 없어.]
[젊은 나이에 엄청난 실력가라는 소문이 있어요. 성국에서도 유명한 걸요. 대륙 유일 성흔을 내려받은 성자......성녀 후보님들도 그분을 칭찬하시던걸요?]
아주 소곤소곤 들려오는 소리지만 애초에 이곳에서 그 말을 못들을 이가 존재하긴 할까.
"하......짐이 졌네. 졌어. 완전히 쓸려버렸군."
결국, 마지막 군주용 말까지 털어 먹혀버린 그가 학을 떼며 물러났다.
"그래, 이번엔 그대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그의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대련 한번 하시지요."
내 말에 그가 움찔거렸다.
"데이비 왕자......"
"폐하께서 직접 명을 내려주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책을 잡지 않겠다고."
"그대는 지금 짐을 대놓고 패겠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 질문에 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공과 사는 구분합니다."
"그럼......"
"사적으로 분풀이를 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풉......"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던 작은 소년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린 것이다.
물론, 자리가 자리인 만큼 알버스가 가만히 있진 않았다.
"감히, 제국의 황제 폐하를 비웃은 것인가?"
"죄......죄송합니다!"
깜짝 놀라 몸을 숙이는 그 행동에 데오르트 황제가 손을 뻗었다.
"되었다. 황제처럼 굴지 못한 짐이 어리석은 게지. 좋다. 기왕 그리된 것 어디 그대의 힘을 한번 보여보라."
"배려 감사드리지요."
"그전에."
그가 말을 끊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침묵한 채 서 있던 레이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데이비 왕자님. 레이나라고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정중한 말투였다.
결론적으로 저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목소리도, 얼굴도, 기본적인 체형이 비슷한 것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같은 게 없으니 알아볼 수 있을 턱이 없다.
무엇보다. 저들의 실력으로는 내 몸 안에 있는 사령 마나를 구분해낼 수 없으니 말이다.
"용사 레이나는 비록 평민 출신이라 말하였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짐은 분명 용사 레이나의 도움을 받아 불온한 움직임을 조기에 적발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짐의 이름을 걸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 것뿐이니."
"그럼 이것도 공적인 일입니까?"
"사적인 일이네."
"그럼 제 방식대로 가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국에서 공인한 용사분이라고."
"예....... 부족하나마 과분한 호칭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체적으로 밴 기품이 가져다주는 괴리감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 눈치를 모르는 바는 아닌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짧게 말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왕의 부활이 임박했습니다. 그 탓에 영향을 받은 마왕의 측근 중 가장 위험한 자가 다시 태동하기 시작했어요."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주먹을 꼬옥 쥐었다.
"그가 부활하고 마왕이 부활하면...... 대륙은 전란의 불씨로 가득해질 겁니다. 그땐 늦어요."
확신에 찬 그 말에 카트린느가 조금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왕에 마왕의 측근이라니. 조금 뜬금없는 동화 같은 이야기네요."
그녀의 말대로 보통 사람이라면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가 용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설득력을 포함한다.
용사라는 존재는 대적자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구원자이니 말이다.
결국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만으로도 마왕의 존재가 성립이 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가장 위험한 자는. 불사자의 왕."
그녀의 그런 호칭에 나는 한가지 존재를 기억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초대 리치, 닉스."
내 중얼거림에 주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말을 하던 레이나는 경계심을 내비치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다른 이들은 조금 의문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고......계셨던 겁니까?"
"......"
확실히 그놈이라면 가능성은 있다.
그의 군세는 수만 수십만에 이르며, 그의 숨결은 죽음의 숨결이니.
그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거대한 용은 죽음을 포효하고.
그 포효가 지상에 닿았을 때.
오로지 죽음과 공포, 증오만이 남으리라.
"곧 그의 봉인이 서서히 풀릴 겁니다. 그의 봉인이 풀리면 답이 없어요. 그러니......봉인이 풀리기 전에 그를 완전히 사멸시켜야 합니다."
그런 그녀의 말에 내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사멸시킨다라......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의 봉인이 풀리기 전에...... 그가 봉인된 곳으로 향할 겁니다. 그곳에서. 그가 봉인을 풀고 나오지 못하게 막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미 봉인된 놈이 다시 깨기 전에 죽이겠다는 뜻 같은데.
"이봐, 용사."
"......왜......그러시죠?"
"초대 리치 닉스의 능력이 뭔지는 알고 있나?"
"그거야......불사자의 왕......모든 망자의 지배......"
"그래? 망자의 지배라......이 말이지."
담담하게 말한 내가 물었다.
"그래서. 내게 바라는 건?"
"당신의 힘......신성석과 당신의 가호가 서린 물품들이 필요합니다."
곧 죽어도 도움을 요청하진 않겠다니.
퍽 우스울 따름이었다.
"개죽음당할 텐데."
"그건 저희가 판단합니다. 저희는 절대 지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봐."
그게 네게 구원이 될 수 있다면.......
그리 말한 나는 말없이 눈앞에 활성화된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아픔이 가득한 가련한 자에게 마지막 구원을]
[구원을 행할 시 보옥의 봉인 제한 1차 해제.]
[아공간 특수등급 1개 물품 봉인 해제.]
마침 이쪽도 조금 흥미가 생긴다.
두 가지의 보상.
이 정도로 크게 보상을 걸었다는 것은 주신 프리아의 입장에서도 이번 일이 가볍지만은 않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 말인즉.
수르트와 하레스가 직접 봉인한 그놈의 봉인이 정말로 풀릴 때가 되었다는 것.
게다가 생각 이상으로 빠른 놈의 태동이 단순 마족이나 뱀파이어, 흑마법사만의 힘이 섞이지 않았다는 뜻일 거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