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1권 23화
생리적 혐오감.
인간이 바퀴벌레와 같이 다족류를 보면 보통 혐오감을 느끼는 것 같은 그런 상식적인 행위에서 벗어난 륀느는 분명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과 달랐다.
감정을 가진 시점부터 이미 인간이라 봐도 무방하지만, 육체 자체가 반 생물, 반 기계로 채워진 이상 륀느는 골렘, 혹은 사이보그 같은 개념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아쉬운 듯 입맛을 쩍쩍 다신 그녀는 내가 하지 않는다고 했음에도 미련을 쉬이 버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인간이 아닌 골렘이니 기본적인 혐오감의 범위가 다른 축에서 노는 녀석이다.
어쩐지. 커다란 지네를 맨발로 짓밟아버리고 해맑게 칭찬을 바라는 눈망울을 보내던 녀석이니 오죽하겠냐만은.
"데이비님, 이 몬스터의 이름이 트롤?"
"그래, 트롤. 피부색을 보니 그냥 트롤이 아니라, 아머 트롤 같은데."
피부가 돌처럼 단단한 까다로운 종이다.
기본적으로 일반 트롤보다 더 느리지만 단단하기에 까다로운 녀석들이기도 하다.
다행이라면 이놈들의 개체 수는 일반 트롤에 비해 극도로 적은 편이라 크게 인류사에 위협이 된 적은 없다는 점뿐이지만.
"빠른 분석과 링크. 다수의 트롤로 분석되는 생명체가 주변에서 감지."
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꺾여진 나무를 들고 나타나는 수많은 트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잉......
이에 륀느가 라이트 세이버를 뽑아 들며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데이비님, 륀느가 정리해."
"아니, 하나하나 처리해선 쓸데없이 시간 버릴 거다. 마침 목적지가 호수라고 했지."
그렇다면 물과 친숙한 녀석을 부려먹을 때가 왔다.
"부름에 답하라."
[물라임.]
촤르르르르르륵!!!
동시에 내 앞의 허공으로 습한 숲지의 물기들이 모여들어 물로 만들어진 여성의 형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또! 또!! 이상한 이름!! 자꾸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세요!]
잔뜩 화가 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항변에 나는 말없이 트롤들을 가리켰다.
"정리하자."
내 말에 그녀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 소리쳤다.
[하! 제가 당신의 말을 순순히 들을 줄 알았다면 큰 오산......]
"하기 싫다면 굳이 시키진 않을게, 어디 보자 번개 정령 소환식이......"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악을 쓰는 그녀가 혀를 찼다.
그녀는 내 스승 정령 여제 유리아나가 계약했던 물의 정령왕이다.
그리고 그녀는 유별날 정도로 번개 정령과 자존심 싸움을 많이 했었다.
악을 쓰며 기세를 끌어올리던 그녀의 행동에 트롤들이 분개한 듯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엘라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내게 신나게 놀림 받은 것도 화가 나는데 트롤까지 괴성을 질러대니 트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 것이다.
[감히, 누구의 앞이라고 시끄러운 괴성을 질러대는 거죠?]
다만, 엘라임이 온화하다 하여도 정령왕에게 이를 드러내는 이들까지 봐주는 성격이 아닌 건 분명하다.
촤아악!!!
무언가 물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륀느와 나를 포위하던 수십 마리의 트롤들이.
마치 일순간 수분을 잃은 것처럼 미라가 되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스르륵......
혈액도 결국은 물이니까.
재생력이 아무리 좋아도 영양분을 이동시킬 혈관의 피를 모조리 빼앗긴 트롤은.
재생이고 나발이고 죽을 수밖에 없다.
* * *
티오니스 대륙은 여러 면에서 지구와 다르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삼림처럼, 국경지대엔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곳도 많은 편이다.
물론 국경지대 이외에도 그런 케이스가 많지만 말이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영역.
인간의 수십, 수백 배는 되어 보이는 길이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지닌 나무들이 즐비한 숲을 지나치면서도 나와 륀느는 한결같이 느긋한 걸음을 유지했다.
"데이비님, 덮어놓고 만들어놓으면 돼지인지 트롤인지 구분이 불가능한 게 인간이라고 륀느는 분석해."
낭랑한 무표정으로 나를 돌아다 보며 녀석이 말한다.
"나중에 따로 만들어줄게."
"데이비님의 눈치 빠른 결단. 륀느가 대만족."
그제야 만족감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녀석이 샐쭉하니 물러났다.
그러니까, 녀석에겐 요식업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렇게 좋아하는 미각데이터. 즉 맛있을 것 같은 음식을 먹는 것에 관심사가 쏠려있다.
-트롤......을 먹는다고?
"그래도 트롤 정도면 꽤 인도적인 쌍판이지."
살아남기 위해선 못 먹을 게 무에 있는가.
편식해선 생존할 수 없다.
[잠깐.]
앞장서서 우리를 습격해오는 트롤들을 하나같이 미이라로 만들어내던 엘라임이 액체로 된 팔을 들어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면서도 녀석이 트롤에게서 뽑아낸 피는 깔끔하게 이동하여 내가 열어놓은 병 안으로 몰려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정령왕 정도 되니 상처 없이 트롤을 제압하고, 그놈들의 피를 그대로 뽑아내서 이렇게 깔끔하게 보관하는 게 가능하다.
생각보다 피를 채취할 때 잃어버리는 양이 많으니 말이다.
실제로 트롤의 피를 닥치는 대로 담았더니 벌써 손바닥보다 큰 유리병 수십 개가 나올 수 있었다.
이게 다 돈인데.
마탑에 넘겨주면, 아니 당장 상회에만 넘겨도 아머트롤 같은 상위 트롤의 피는 가격이 굉장히 비싸게 통할 것이다.
짠돌이 같다고?
돈도 많은 놈이 뭘 그렇게 신경을 쓰냐고.
무분별한 부자만큼 위태위태한 존재도 없다.
[기이한 장막이네요. 결계에요.]
엘라임의 제지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 공간에 조용히 손을 뻗었다.
투웅......
그러자 청명한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벽이 내 손과의 접촉에 맞추어 옅은 파장을 만들어냈다.
"잘 찾아왔네."
물리적인 접근 제한을 막는 결계는 아니다.
다만, 들어서는 순간 결계가 작동한다.
"수류 환상을 보여줘서 밖으로 내보내는 결계네."
[잘 알고 있네요.]
천일야장 수르트는 열쇠를 보관하면서 이것을 가져가기에 적합한 자를 골라내기 위해 시험 관문을 만들었다 했다.
문제는 난이도가 생각 이상으로 높았다는 점이다.
설마 그 당시의 마법사와 현재의 마법사들의 수준 차이가 오히려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 난이도 덕분에 어지간한 이들은 이 장소를 발견도 하지 못한 꼴이 되어버린 게 전화위복이다.
"들어가자."
분명 침입자 방지 결계가 있다고 했다만.
그럼에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결계로 추정되는 공간의 앞에 선 뒤 오른손을 말아쥐고 호호 김을 불었다.
"이제, 기다릴 필요 없으니 여긴 파기하자."
[마왕 유르그 식(式) 파쇄기]
[분쇄격권]
무식한 힘을 가해 순간적으로 결계를 박살 내기엔 이것만 한 게 없다.
이전 엘프 마을이던 달의 숲의 결계를 박살 낼 때처럼 요란스레 들어갈 이유도 없기에 효율적이고 조용한 파괴방법을 택한 것이기도 하다.
순식간에 검붉은 기류가 내 오른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한순간 번뜩인 주먹이 공간을 휘어버릴 듯 내리꽂혔다.
투쾅!!!!!!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이 있다.
파괴적인 일격에 무너져 내리는 마나의 조각들을 훑어본 나는 넓게 펼쳐진 거대하고 단단한 결계가 완전히 바스러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결계가 부서진 숲의 내부는 이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마나가 만들어내는 모종의 흐름은 사라져있었다.
[물의 향기. 물가가 있네요.]
앞장서서 걸어나가며 무식하게 아머트롤들을 싸그리 정리하던 엘라임은 결계 너머서부터 몬스터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자 묘하게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얼마 걸어가지 않아. 내 눈앞엔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커다란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겉으로는 수심이 그리 깊지 않은 호수로 어찌나 맑은지 그 안에 수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게 보일 정도였다.
"데이비님.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고 분석."
륀느의 의문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고작 결계 하나로 막아섰다면 난이도를 높게 책정했다며 수르트가 칭얼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들어가자."
말없이 호수 내부를 들여다보던 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륀느가 자신의 치맛자락을 손가락으로 집어 살짝 들어 올린 후 가볍게 물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수심은 아무리 깊어 봐야 사람의 가슴팍 정도다.
그래 봐야 륀느에겐 발이 닿지 않을 정도지만 말이다.
"데이비님 인성을 륀느가 낮게 평가......"
"억울하면 키가 크면 돼."
"매우 낮게 평가."
무표정인데 상당히 분개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륀느의 그런 행동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호수의 안쪽까지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엘라임을 불렀다.
"부탁해."
[......알겠어요.]
묘하게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도 엘라임은 곧 빛을 만들어내 몸에 둘렀다.
그리고.
엘라임의 힘이 나와 륀느를 감싸기가 무섭게 나는 내 허리 정도밖에 오지 않는 수심의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차르릉!!
동시에.
좀 전까지 발이 닿던 지면이 일순간 일그러지며, 일대의 공간이 완전히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호수에서 가장 깊은 곳조차 그리 깊지 않았던 공간이건만.
내가 발을 들여다 높기 무섭게 호수의 수심이 완전히 돌변했다.
십여 미터는 될법한 엄청난 깊이의 수심으로 변한 것이다.
엘라임의 물방울 옷으로 몸을 감싼 뒤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하던 나는 말없이 따라오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륀느를 뒤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바닥에 내려선 뒤 주변에 놓인 수많은 바위 중 하나를 톡톡 건드렸다.
"륀느. 인류의 구원자."
내 말과 동시에 륀느가 기다렸다는 듯 붕붕 뜨며 걸어오더니 한 손에 입자들을 만들어냈고 곧 빠루를 소환해냈다.
"부숴버려."
더 이상 이곳은 크게 의미가 없는 공간이니까.
이제 이 공간의 쓸모는 다 했다.
* * *
두 번째 결계는 유동성 결계다.
일반적으로 내부와 외부가 어찌 되건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는 견고한 결계와 다르게 결계의 내구성은 약하지만, 그 유동성이 좋다.
시간이 삼천 년 가까이 흐르면서 협곡에서 호수로 변한 이곳.
처음 결계가 설치될 때만 해도 물이 없던 이곳은 물이 생겨나며 호수로 변했다.
그리고, 유동형 결계는 릔느가 부숴버린 바위를 숨기기 위해 일대를 분석하고 그에 걸맞은 환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수심 얕고 속이 비치는.
아무것도 없는 호수의 모습이었다.
-세상에......이런 공간이 있을 줄이야. 본녀가 죽고 난 뒤 도대체 수르트 그 인간은 무슨 짓을 한 게야.
연녹빛의 빛이 머금어진 동굴 내부를 휘휘 둘러보며 페르세르크가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유적을 포함한 대부분은 페르세르크가 하레스의 검 칼디라스에 베여 사망한 후에 만들어졌으니까 당연한 결과이긴 했다.
"데이비님. 이 앞 기관장치."
물기 하나 묻지 않아 뽀송뽀송한 제 옷을 톡톡 털던 륀느가 내 앞을 막아서며 나를 제지했다.
아무것도 없는 동굴 내부지만.
수르트가 만들어놓은 시험이 고작 이것뿐일 리 없다.
"기관장치라......이쯤 나올 때도 됐지."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든 내가 동굴 저편으로 던졌다.
스르르릉!!! 쾅!!!!!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벽면에서 거대한 칼날이 튀어나와 돌멩이를 그대로 부숴버리고는 반대편 벽에 충돌했다.
"화력 한번 장난 없네."
이렇게 은밀하고 강한 함정이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수백 개 설치되어있다.
게다가 가장 위험한 것은.
"륀느가 부숴?"
"아니, 잘못 부수면 동굴 전체가 함몰되게끔 설계되어있으니까. 내버려 둬."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관장치를 무시하고 지나갈 순 없는데. 그렇다고 부수면 동굴이 무너진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돌파해?"
"함정을 하나하나 찾아서 피하면서 돌파해야지."
"불가능."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관장치가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마나를 머금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찾는 게 쉬울 턱이 없다.
"본래 바람의 정령술사나 마법사의 힘이 필요하긴 한데......"
상책의 해결법은 그것이다만.
내가 굳이 그 방법을 쓸 이유는 없다.
"이걸 만든 수르트는 어떻게 여길 자유자재로 드나들었겠냐."
내 말에 륀느가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위치의 존재 여부다.
괜히 건드릴 이유가 없는 건 건드릴 필요가 없다.
이곳은 내 스승이 만든 유적이며.
내가.
"여기만 수백 번을 돌파했는데. 기관장치가 워낙에 괴랄해서 시간을 좀 빼앗길 수 있거든."
그그그극!!!
근처의 벽면을 둘러본 나는 곧 매끄러운 벽면을 가볍게 손으로 짚은 뒤 그대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내부가 새카만 그 구멍 너머로 망설임 없이 팔을 집어넣고 비틀었다.
철컹!!!
동시에.
나를 제거하기 위해 발동준비 중이던 함정들이.
일제히 멈췄다.
순식간에 해결돼버린 기관장치에 륀느가 내부로 들어가려 하자 나는 녀석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심드렁하게 내부를 보았다.
그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묵직하고 두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스스로 증명해오되 증명받지 못한......]
"인간."
[......]
"맞지? 쓸데없이 길 막지 말고 비켜."
나는 던전 제작자가 아니기에 함정을 하나하나 돌파할 수밖에 없다. 그 당시의 수르트는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나는 이곳이 익숙하기 그지없다.
그는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내게 이곳의 모든 지식을 건네주었다.
시험?
바보가 아니고서야 내가 어떤 놈인지 볼 만큼 봤는데 시험할 게 무에 있는가.
익숙할 대로 익숙한 고인물식 던전 공략은 말이다.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