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1권 24화
[정답.]
이윽고 짧은 침묵 끝에 옅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그그그그극!!!
동시에 동굴의 내부 형태가 변하기 시작하더니 멀쩡히 열린 길이 막히고, 닫혀있던 벽면이 열렸다.
-방금 건.......
"지혜를 요구하는 시험. 이외에 담력, 협동. 여러 가지가 있긴 한데."
사실 의미가 있는가.
-질문도 듣지 않고 정답을 맞히다니. 만약 그게 틀린 답이었으면?
그녀의 질문에 나는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
"시원시원하게 내려앉는 거지 뭐."
본래엔 문제를 내고 문제를 푸는 이가 긴장하게 하려고 퇴로를 막고 이 상황을 설명해주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 듣기엔 내가 겪어본 시도 횟수가 너무 많다.
묘한 표정으로 따라오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 륀느를 뒤로한 채 어두운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가던 중이었다.
[계약자.]
"왜."
[당신은......유리아나와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했나요?]
"그래."
짧은 대답에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가능해요. 이곳은 유리아나가 살던 대륙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녀가 죽은 시기는 벌써 천 년도 더 되었고.]
"맞아. 산사람을 만난 건 아니거든."
내 말을 다른 뜻으로 알아들은 것일까.
그녀가 움찔거렸다.
[혹시......다른 말은 없었나요?]
"그 여자가 남긴 말이 듣고 싶어?"
내 질문에 그녀가 격하게 부정했다.
[누......누가 그렇다고 했나요?!]
"사이 좋게 지내라."
[예?]
내 말에 빠르게 따라오던 녀석이 멈췄다.
그 표정은 흡사.
배신당한 연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게......전부였나요? 정말로?]
"그래."
엘라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기던 내 귓가에 그녀의 작은 투정이 들려온 것은 가볍게 무시했다.
[나쁜 년......끝까지......]
이후 고요해진 지하를 한참 더 걸었을까.
나는 곧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길을 볼 수 있었다.
-음......갈림길이로고. 어디가 정답인 게야?
당연 둘 중의 하나가 진실인 길이라 판단한 페르세르크의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발광용 아티펙트 하나를 꺼내 륀느에게 건네주었다.
"륀느, 왼쪽으로 가. 나는 오른쪽으로 간다."
-데이비?
"이건 중요한 명령? 륀느, 명령이라면 이행 불만 없이 이행해."
"절대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가 나 믿지?."
내 말에 녀석이 푸른 눈동자를 반짝였다.
"명령 수락."
짧게 답한 녀석은 곧 발광 아티펙트를 손에 쥔 채 왼쪽 길을 향해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갔다.
안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 어떤 방해요소가 있을지 전혀 말해주지 않았지만 륀느의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렇게 사라진 륀느를 뒤로한 채.
나는 망설임 없이 오른쪽 길로 걸었다.
그때였다.
"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륀느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져왔다.
-이......이건?!
깜짝 놀란 페르세르크가 나를 바라보았다.
-데이비!! 륀느! 륀느의 목소리야!
"데......데이비님!!! 사......살려줘!!"
처절한 그 비명에 페르세르크가 내 팔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긴다.
-구하러 가야 해!!
"내버려 둬."
-뭐?
내 말에 어이가 사라졌는지 그녀가 눈을 찌푸렸다. 이에 내가 뒤편을 가리키자 소리 없이 틀어막힌 벽이 빠르게 내려와 내가 되돌아가는 것을 막아버렸다.
-이게 무슨......
그런 외침에 나는 말없이 단단히 틀어막힌 벽면을 톡톡 두드렸다.
슬슬 이 비명소리가 짜증이 나기 시작할 지경이다.
"빠르게 스킵하자."
후웁.
짧게 숨을 들이킨 뒤 그대로 벽면을 후려쳤다.
콰르르릉!!!!
동시에 굳게 막혀있던 벽면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더니 반대편에서 의외의 인물이 자박자박 걸어 나왔다.
"데이비님. 무사했어."
짧게 말하며 총총 뛰어온 륀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사한 것을 확인. 데이비님 륀느와의 링크를 확인완료."
"그래."
-이......이게 무슨......
분명 나와 다른 길로 떠난 륀느다.
중간에 녀석의 처절한 비명소리도 들려왔는데.
어째서 정면의 벽을 부쉈는데 녀석이 나오는 것일까.
답 자체는 간단했다.
"수르트는 영악한 양반이야. 바깥 결계는 소용이 없지만, 이곳은 함부로 장치를 부수면 다 무너지게 되어있거든."
경고 문구는 반드시 존재한다.
본래라면 문제를 맞힌 시점에서 그 경고를 들어야 하지만.
그 과정을 생략해버리고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아버린 이상 따로 들려올 리가 없었다.
시험 자체는 담력과 협동의 시험이다.
서로 멘탈이 흔들리는 이 상황 속에서 얼마나 손발이 잘 맞느냐가 관건이니까.
"편협하기 그지없는 시험답네."
매번 느끼지만 보통 같아선 이걸 눈치채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그르르르릉......쾅!!!
이윽고 륀느와 만난 지점의 한쪽 벽면이 열리며 마지막 통로가 드러났다.
이에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어둠에 앞이 안 보일 리는 없다.
어둠과 친숙한 마족이나, 사령안을 가진 나는 물론이요, 자체적으로 열 감지까지 해낼 수 있는 륀느나 정령왕에게 어둠이 통하지 않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데이비님. 새로운 생명체 발견. 제압을......
"놔둬."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륀느, 이해 불가. 설명을 요구해."
"그거 구라야."
괴물을 지나친 내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너흰 몇 세대냐."
-그르르르르......
내 말과 동시에.
하늘에서 새카맣던 천장에 황색의 빛이 두 곳 번뜩였다.
다름 아닌 호박색의 눈동자였다.
-웜 엘리게이터로구나......
수명 500년가량의 소수의 온화한 몬스터.
하지만 자신의 둥지가 털리면 극도로 분개하는 위험 종이다.
지금 대륙에선 거의 멸종 직전의 몬스터종이긴 하지만.
놈이 분개했을 때 드러나는 위험성은 상상 이상으로 큰 편이다.
-그르르르르르......
적의 가득한 낮은 울음소리로 다가오는 놈을 보며 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사령마나를 대량 방출해냈다.
[7서클]
[유체이탈]
투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웜 엘리게이터의 몸이 크게 한 차례 뒤틀렸다.
"버텨? 한 번 더."
투웅!!!
아무리 웜 엘리게이터라도 7서클 마법을 몇 차례나 맞고 견딜 수 있을까.
결국 유체이탈 마법에 잠식당했는지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놈의 거체를 보던 내가 놈의 육체를 가볍게 지나쳤다.
그리고는 놈의 둥지 뒤편에 놓인 작은 제단을 톡 두드린 뒤 그대로 마나를 활성화 시켰다.
"끝까지 숨겨놓기는 쯧."
우웅!!!!!
동시에 거대한 빛이 터져 나오며 아무것도 없던 바닥이 뒤틀리고 거대한 제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제단 위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보잘것없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단 한 놈을 작살내기 위해 수르트가 만들었고, 오랜 시간 묻혀있었던 물건이니 말이다.
* * *
호수 아래의 숨겨진 던전에서 물건을 되찾은 이상 이곳은 더 이상 유지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나는 흔적을 남기는 것 보다 수르트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기로 마음먹었다.
[후회 없나요?]
"다 부숴버려."
내 말에 엘라임은 고요히 침묵하다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옅은 파장이 일어나더니 지면이 짧게 뒤흔들렸다.
[던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파괴했어요. 이제 그 누구도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겠죠.]
"그래."
[나는 돌아가겠어요. 계속해서 이곳에 소환되어있을 순 없는 몸이니.]
결과적으로 내 정령마나를 걱정한 꼴이다.
[쓰......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그 배려에 내가 피식 웃어버리자 엘라임이 발끈한 얼굴로 소리친 뒤 물방울이 되어 흩어졌다.
엘라임이 사라진 뒤 나는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자루에 아머 트롤의 육편을 가득 담아 어깨에 짊어진 륀느를 볼 수 있었다.
"진짜 먹고 싶냐?"
"륀느, 새로운 미각 데이터, 매우 흡족. 마른 육포, 나쁘지 않다고 판단. 샘플 채취. 이것을 높게 평가."
맛없을 텐데.
그렇게 말해본들 믿지 않는 녀석이다.
아무래도 직접 맛을 보여줘야 믿을 듯싶었다.
던전의 정리를 마친 나는 곧장 검지와 엄지를 말았다.
워프 마법은 편리하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면 자칫 크게 위험할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있는 이곳과 다르게 지금부터 가려는 곳은 단순 워프 마법을 사용하기에 그리 적합한 장소는 아니니 말이다.
삐익!!
검지와 엄지를 말아 입에 물고 빠르게 휘파람을 불자 삐익 소리와 함께 허공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내가 '현' 국에서 괴석거인의 안정을 시키기 위해 남겨두었던 두 신수중 하나인 주작 불닭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익!!!
허공에서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의 문 너머에서 나타난 녀석은 자신의 존재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강렬한 울음소리를 냈다.
"내려와."
물론, 녀석의 감성을 맞춰주기엔 이쪽도 바쁜 입장이다.
-끼잉......
신나게 소리 지르던 불닭이는 내 말을 듣고는 쏜살같이 내려왔고 이내 제 부리를 들이밀어 내 손에 마구 비벼댔다.
"......"
잘 안 먹힌다고 생각한 것일까.
결국 배를 까뒤집고 발라당 드러누워 버리는 녀석의 행실에 픽 웃음이 나와버린 나는 녀석의 배를 쓰다듬어 주고는 말했다.
"마음껏 날고 싶지?"
"-끼잉?
"이제 신나게 날 때가 왔다. 불닭아."
내 말에 녀석의 눈에 활기가 돋기 시작했다.
날개가 달린 새는 하늘을 날아야 하는 법이다.
그동안 한곳에 묶여있었느니 상당히 답답했으리라.
벌떡 일어나 자신의 날개를 펄럭이는 녀석을 보며 나는 륀느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밀어 넣어 안아 들고는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데이비님, 륀느를 아이 취급하는 것 기분이 좋지 않다고 분석."
그리고는 버둥거리며 내게서 떨어지더니 그대로 후다닥 달려들어 불닭이의 등위에 올라탔다.
-끼에엑?!
그때였다.
위풍당당하게 소리치던 불닭이가 륀느가 올라탐과 동시에 크게 주춤거리며 비틀거린 것이다.
-아......륀느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지 참......
골렘은 골렘이라고.
저 작은 은발의 소녀가 무게만 200kg이 넘어간다는 사실을 불닭이는 알지 못했다.
다만, 자존심 때문에 꼴사납게 엎어지진 못하겠는지 힘을 빡 주고 버티는 녀석의 행동거지가 마치 자존심 강한 아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말없이 륀느를 뒤에서 끌어안듯 안고 불닭이의 등에 올라탔다.
용사 일행은 바보같이 닉스의 봉인 해제를 막고 그를 사멸시킬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 있다.
그래, 레이나라면 가능할 거다.
다른 일행은 나이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들인 것은 사실이다.
대륙 최강 무인 중 하나라 불리던 카트린느 대공이 있다면 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초대 리치 닉스는 단순 토벌대상으로 분류될 만큼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어렵다기보다는......
귀찮은 쪽이지만.
반대로 레이나는 현재 능력으로 치면 카트린느보다 훨씬 약한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있기에 가능한 이유.
그녀는......
자신의 남은 수명을 대가로 힘을 발현하고 있다.
죽어가면서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주제에 이번 일에 제 목숨을 거리낌 없이 불태우는 그녀라면.
문제가 생겼을 때 동귀어진의 마음으로 모든 생명을 불태우리라.
그렇게 되면 그녀는 진짜 용사가 되는 것이고. 위험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임시방편으로 말이다.
문제는 그걸 내가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애틋한 무언가가 있어서?
정의감이 넘쳐서.
다 틀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고 싶은 건 내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그래서는 내 쪽에서 수지가 맞지 않았다.
닉스는 이번 기회에 완전히 사멸한다.
그리고.
멋대로 죽어서 남이 보상하나 못 받게 하려는 그 맹랑한 용사의 정수리에 딱밤을 갈겨줘서라도 구해내야 했다.
그래야......
두 가지 보상을 쟁취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재질도, 능력도 알 수 없는 보옥과 다르게 아공간의 초월등급 물건의 해제는 내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게다가. 심연이 만약 얽혀있다면 이번 기회에 그것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고, 빌어먹게 남이 사는 땅에 이상한 시도를 하는 그 심연을 쫓아버릴 필요가 있다.
"가자. 이번만큼 보상 짱짱하고 이해관계도 잘 맞는 거래도 잘 없으니."
"륀느, 데이비님은 막타 전문가라고 분석."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고생은 저쪽에서 하고.
막타는 내가 먹고.
서로 살고.
윈윈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이용하는 것뿐이고. 이윽고 불닭이의 날개가 천천히 펄럭였다.
투쾅!!!!
동시에 마치 신호탄이 터진 듯 타오르던 화염이 일순간 화력을 거세게 피워내며 주변의 배경이 숲에서 까마득한 창공으로 일순간 변했다.
소닉붐?
작정한 신수에게 그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