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1권 25화
95. 거봐, 내가 뭐랬어.
"경고하는데."
개죽음이 될 거다.
담담한 얼굴을 하던 소년의 경고성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소년의 통찰은 생각 이상이었다.
"레이나, 입맛이 없나?"
말없이 육포를 손에 쥔 채 침묵하고 있던 레이나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수인남성, 벤디크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네....... 미안해요. 벤디크."
"힘들다면 언제든 말해라. 내가 도와주마."
"네......"
"내 목숨은 네 것이다."
"벤디크, 그건......"
"죽을 위기에 처해있던 나를 구원한 너의 존재는 내게 그런 것이다. 내 목숨은 네게 빚졌고, 나는 언제고 그 빚을 갚는 것뿐이다."
수인남성 벤디크의 말에 레이나는 가면 너머로 조소했다.
"아마......괜찮았을 겁니다."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을 아낀 그녀는 가면의 겉면을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이용했다.
솔직한 말로 레이나는 그러했다.
그녀는 평행의 선을 넘어, 미래에서 과거로 온 존재.
그렇기에 그녀는 일반적으로 다른 이들과 살아가는 방식이 같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시간이 얼마나 되었던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솔직히 처음 평행의 선이자 과거인 이곳으로 왔을 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이런 지옥이 다시 되풀이되는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미래를 안다면.
막을 수 있다고 말이다.
놀랍게도 현실은 그녀가 알던 것과 조금 달랐지만, 전체적인 흐름 자체는 완전히 동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깨어났을 당시, 그녀는 자신의 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같이 온 이는 없었고, 손에는 오로지 자신과 함께 끝까지 버텼던 자아가 붕괴된 검, 그리고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동료야 다시 모으면 되고 힘이야 다시 기르면 그만인 것을.
그녀는 냉정하게, 그리고 독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야 했다.
아무도 믿지 않으며, 가능한 한 함부로 뒤통수를 칠 이유가 없는 존재를 두고 거래를 벌였다.
그녀에겐 두 가지 금제가 존재했다.
첫째, 운명의 흐름에서 일면 벗어난 자가 아니라면 절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지 말 것.
둘째. 이곳의 자신과 절대 마주하지 말 것.
마주하는 순간 내려질 결론은 단 하나. 둘 중 하나의 죽음뿐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 방법도 동원할 수 없게 된 그녀는 우선 동대륙에서 벤디크와 만났다.
적어도 그가 이 시점에 정보 길드에서 토사구팽당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는 그녀였다.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그는 살아남겠지만. 그녀는 그런 벤디크를 구하는 척. 손을 내밀고 그를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벤디크가 알았다면 참 기가 막힐 일이긴 해도,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리고, 그를 돕는 척 환심을 산 뒤 곧바로 성국으로 향했고 자신의 검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꿈이라는 거짓을 이용해 용사로서 인정받게 만들었다.
단순히 용사라는 입장을 만드는 데엔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 말이다.
"간절한 자에게 구원이 기다릴지니......"
조용히 중얼거리던 레이나가 가면 너머로 실소를 흘렸다.
이곳은 그녀가 알던 세상이 아니다.
팔란 제국에서 창궐했던 네크로맨서는 연합의 손에 조기 격퇴당했고.
린디스 제국의 아래 작은 소왕국들인 라운왕국과 볼티즈 왕국 등등 여러 국가의 냉전과 격전의 불씨에 당겨지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자신은 생각 이상으로 신검의 각성을 빠르게 당겼으며.
엘프라는 인류의 적중 한 세력이 이곳에선 우방세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사망했어야 할 성국의 성녀 후보 둘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있으며.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곳에서 들은 한 소문의 주인공, 그 존재 여부였다.
유일 성자.
적어도 레이나가 알던 기억에서 그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력이 뛰어난 자는 자연스레 두각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곳에 보인 성자와 자신의 세상에서의 삶을 기억해보면 확실히 달랐다. 그 소년은 그녀가 살던 세상에선 존재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가장 믿을 수가 없었다.
"구원 따위 있을 리가......"
남들이 듣지 못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곧 식사에 흥미를 잃은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원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했다면.
그녀의 존재가 이토록 일그러지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뭐가 되었건 복수, 그리고 자신의 구원은 스스로 이루어내겠다.
힘이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초대 리치 닉스의 봉인이 풀리기 전에 이곳으로 오지 않았는가.
준비가 부족하다고?
괜히 대공 카트린느의 도움을 받았고, 성자 데이비 왕자에게 조력을 받은 게 아니다.
라운왕국의 성자는 솔직히 너무 깨끗해서 믿기가 힘들었다.
그는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자신을 그리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지독한 안쓰러움이 가득한 눈매는 그녀로서도 솔직히 견디긴 힘든 빛깔의 눈이었다.
"벤디크, 카트린느 대공께서 오시면 곧바로 출발할 수 있게 선박을 알아봐 주세요. 장비 점검은 제가 하고 있겠습니다."
레이나의 말에 벤디크가 조용히 일어나 사라지자 그녀는 천으로 감 쌓인 거검의 면을 쓰다듬었다.
이제는 간단한 폴리모프 마법도 잃어버린 채 단순히 뒤틀린 신성력만을 방출하는 검이 되어버린 녀석이다.
처절하게 구원을 외치던 그곳에서도 그녀의 품에 있던 유일한 동반자는 다름 아닌 이 검이기도 했다.
"이제 다 끝내야 해. 칼디라스. 조금만 더 버텨줘."
말없이 가면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바깥의 공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왁자지껄한 해안 도시는 시끄러운 편에 속하는 도시지만.
지금 들려오는 소음은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의 대화 소리가 아니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소리. 공포에 물든 이들의 고함소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이나는 곧장 칼디라스를 감싸던 천을 풀어헤친 뒤 숙소의 바깥으로 빠르게 뛰어나갔다.
피잉!!!
"이게......무슨......"
동시에 그녀의 시야에 보인 하늘로 수백 수천 발의 불화살이 도시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 * *
갑작스런 정체 모를 무언가의 습격.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억수의 비와 같은 화살을 바라보던 레이나는 더는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검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리고는 힘을 끌어내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향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중검]
[천지 일참]
쩌억!!
압도적인 중량이 담긴 검기가 방출되며 거대한 풍압이 일어난다.
동시에 하늘에서 쏟아지던 조잡한 불화살들은 그녀가 방출한 검기 한 번에 상당량이 힘을 잃고 허공에서 부서져 내렸다.
쿠웅!!! 쿵!!
거기에 멈추지 않고 레이나는 몇 차례 흑백의 화염이 뒤섞인 검을 계속해서 휘둘렀다.
마치 팽이가 회전하듯. 어색함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회전 한번 한 번에 흑백의 화염으로 이루어진 검기들은 쉬지 않고 허공을 향해 날아들어 화살들을 모조리 박살 내버렸다.
"하아......흡!"
거칠게 숨을 고른 그녀는 곧이어 해안가 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작은 괴물들을 볼 수 있었다.
작은 고블린 부대로 이루어져 있는 습격자들은 분명 오합지졸처럼 보여야 정상이건만.
놀랍게도 이 고블린들은 몸의 급소 부분을 금속 갑옷으로 보호하고 움직임도 일반적인 고블린보다 영악하고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화르르륵!!!!
한 차례 화살 폭격을 막아낸 레이나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해안 도시 발카스의 주민들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빠르게 움직이더니 도시를 습격한 고블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야생 고블린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는가.
그건 아니었다.
놈들의 침투경로는 엄연히 해안이었다.
헤엄을 못 치는 고블린이 해안가로 밀고 들어오는 데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배.
보통 고블린들이 영악하다곤 해도 이렇게 갑주를 갖춰 입고 고급스런 무기에 배까지 타고 약탈을 하기엔 지능이 너무 딸렸다.
하지만 그 현실이 눈앞에 보이고 있다.
수백 수천의 고블린들이 갑작스레 들이닥친다.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지만 고블린들의 일부는 벌써 해안 도시 발카스의 어린 소년과 소녀들을 잡아 자신들의 배로 끌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엄마!! 엄마!!"
"살려줘!"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발카스의 풍경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본래에 평화롭기 그지없던 작은 도시다.
근처엔 몬스터 한 마리 없기에 병사들은 경험이 부족했고 도시국가 발카스의 국왕 또한 중립을 표명하는 자신들을 습격하는 이들은 없다고 판단하여 국력을 크게 증진해두지 않았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절대라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고블린들은 이곳을 습격해 온 것이다.
-끄어어어어엉!!!
설상가상으로 뒤이어 항구에 처박히듯 밀고 들어온 거대한 배들 너머로 거대한 체격의 몬스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회복력의 대명사라 불리는 트롤과 홉고블린들이었다.
거대한 무기를 휘두르며 나타나는 놈들의 뒤로 5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거대한 괴물인 오우거 또한 보였다.
"레이나!!"
그때 선박을 알아보러 떠났던 벤디크가 급히 그녀에게 뛰어왔다.
"벤디크......이게 대체......"
"나도 모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배들이 계속해서 항구로 들이박고 있다. 거기서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어."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다.
누군가가 노린 습격.
대습격인 것이다.
우웅......
그리고.
마치 이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며 붉은 별이 뜨기 시작했다.
동시에 몬스터의 습격에도 적잖이 침착함을 지키던 그녀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아......안돼......벌써 봉인 해제 의식이......"
무언가 한발 빠르게 움직인다. 애초에 그녀가 살던 세계와 같은 세계가 아니니 무조건 같은 시간대에 의식이 치러지리란 보장은 없다지만. 이건 너무 빨랐다.
"으아아아앙!!!"
"엄마!! 엄마!!"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죽어버린 어미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아이도 보인다.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긴 탓에 당장 숫자는 어느 정도 줄였지만, 다시 놈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안돼......지금 당장 가서 막지 않으면......"
혼란스레 중얼거리던 그녀가 고민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장 떠나라 한다면 초대 리치 닉스의 봉인 해제를 막을 시간적 여유는 된다.
하지만, 자신들이 떠나는 순간 이곳은 어찌 되는가.
한둘도 아니고 본진에 수백 수천의 몬스터가 습격해온 이 상황에서 레이나는 어려운 선택을 내려야 했다.
모두 버리던가. 아니면 닉스의 봉인 해제를 그저 지켜보던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그녀가 무언가 소리치려던 찰나였다.
-끼이이이이이익!!!
하늘에서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검게 변했던 하늘 위로 하늘을 환하게 비출 것처럼 타오르는 수백 개의 화염구가 일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레이나는 곧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트롤 한 마리가 거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대형 골렘의 손에 머리가 잡혀 그대로 땅에 처박히는 꼴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트롤 한 마리의 머리통을 으깨버린 거대한 금속 골렘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레이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어디서 누군가와 교신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명령 이행. 전 디셉티콘 편대. 몬스터를 박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