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2권 5화
97. 가게 두어라.
닉스가 내뿜던 힘은 하늘을 변하게 만들고 새빨간 별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정말로 별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를 상징하는 별자리는 그의 힘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 붉은 별이.
"사라......진다."
처음보다 많이 상태가 좋아진 레이나가 쓰러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놀라울 게 없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가볍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저 아직 20대도 되지 않은 소년이.
다른 평행의 선에서 수많은 대륙의 인간과 이종족을 학살한 마왕의 최측근 노 라이프 킹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와서 판별한 닉스의 힘은 그녀가 살았던 그 세계의 닉스보다 더 어마어마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가 준동하는 순간 대륙에 피바람이 부는 건 당연한 결과가 되듯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더욱 강해진 닉스조차 마치 어린아이처럼 짓밟혔다.
"커헉! 마......만물에 존재하는 태초의 근원에 고하......"
[디스펠]
콰창!!!
"크아아악!! 구가하라! 통곡하라! 그대의 발자......"
[디스펠]
콰창!!!
강제로 디스펠을 걸어 상대의 마법이 깨지면 마법사는 힘의 역류를 겪게 된다.
7서클, 8서클, 심지어 9서클까지.
마법이란 마법을 다 쏟아부었지만, 닉스의 마법은 단 한 개도 완성되지 못했다.
"야, 뭐하냐. 안 일어나?"
콰드득!!!
소드마스터의 강기로도 쉽게 잘리지 않을 만큼 단단한 그의 골격이 단순 압력에 짓눌려 서서히 부서져 가고 있다.
힘의 차이가 너무 명백한 것이다.
너무 강해서. 처음 느낀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의 울렁증이 마치 환각이었던 것처럼.
소년이 내뿜는 힘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영향을 못 줄 정도로 미약한 게 아니었다.
너무 방대하니까.
영향을 주다 못해 주변을 아예 바꿔버린 꼴이다.
이런 게 과연 일개 생명체에게 가능한 짓일까.
[계약자......]
그때, 레이나는 자신을 안고 있던 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데이비의 얼굴에 어린 미소를 본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윽?!"
섬뜩함에 온몸이 비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소년의 얼굴에 어린 것은 도저히 주신의 성자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순수, 광기와 흥분이었다.
"야, 일어나봐 새끼야. 인생은 실전이야."
콰지직!!
닉스의 한쪽 어깨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짓밟히며 부서졌다.
반사적으로 닉스가 손을 들어 거대한 푸른 사슬을 만들어냈지만, 마법이 완성되기도 전에 소년의 눈이 한번 번뜩이는 것을 끝으로 사슬이 흩어져 버렸다.
"크윽?! 도저히 이건 말도 안 된......"
"혀 깨문다. 이 악물어라, 아, 혀가 없구나. 그런데 말은 어떻게 하냐? 크흐흐."
"미......미친놈!"
초고속의 무영창 디스펠.
십 여년 가까이 전쟁을 해온 그녀조차 저렇게 말도 안 되는 마법을 펼치는 괴물은 본적이 없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레이나의 시선에 소년은 너무 무서워 보였다.
마치, 맨몸으로 거대한 맹수 앞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야! 야! 좀 더 까불어봐!"
퍼억!!! 콰작!!
다만,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미친개처럼 공격하는 소년의 행동에 이상하리만치 불안감이 어리는 레이나였다.
"아하하하하하하! 죽어라. 이 새끼야!"
"커헉!! 컥! 자......잠시!"
"나는 모르겠고!!"
그때,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닉스가 전신이 부서져 가면서도 무언가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다.
애초에 상대는 초대 리치, 노 라이프 킹이라 불리던 닉스였다.
라이프 베슬도 없는 리치로서 단순 육신이 부서진다고 죽을 리가 없다.
'아, 안 돼......'
그를 향하던 형용할 수 없는 탈력감과 무력감, 그리고 자괴감이 일시에 씻은 듯 사라졌다. 동시에 그녀가 천천히 움직였다.
[움직이지 마세요. 인간,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는 건가요?]
연녹빛의 비를 쏟아내려면서도 반쯤은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정령왕. 엘라임의 경고에 레이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금 움직이며 근육을 혹사했다.
"막......아야."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강하게 깨물었다.
동시에, 그녀의 몸 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혼이 서서히 불타오르듯 증발하기 시작했다.
[인간!!]
"놔주세요, 정령왕님. 제발. 내가......내가 가야 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짧게 말한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닉스를 저렇게 죽이면......그는 반드시 부활해......그러니까......부활하지 못하게 여기서 반드시."
데이비 왕자의 힘이 강한 건 알겠는데. 아무리 강한 힘으로 찍어눌러도 결국 그의 근본을 처리하지 않으면 결과는 똑같다.
[당신의 상태를 알고는 있는 건가요?]
"잘......알아요. 나는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해, 길어야 며칠......그러니까."
자신이 해야 한다. 애초에 그녀가 데이비라는 소년을 향해 원망이나 자괴감, 탈력감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단순 어린아이 같은 치기가 아닌가.
애초에. 그 어두운 마음의 근원은. 저 증오스러운 닉스의 작품인 것을,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속삭여오는 어두운 감정에 휘둘리는 건 이제 그녀에게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준비가 미흡했던 부족한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갔던 다른 저항군들을 생각해서라도.
이곳에서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검의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을 자신.
고작 17살의 소녀, 일리나 데 팔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자신이 죽는 것을 대가로, 닉스를 완전히 사멸시킨다.
애초에 자신의 혼을 완전히 불태워 없앨 작정으로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레이나의 등 뒤로 빛으로 만들어진 새카만 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부서지기 직전인 칼디라스를 들어 올린 그녀가 검신을 쓰다듬었다.
"고마워, 칼디라스. 이제 마지막......이야, 적어도 끝에는 같이 있자."
마족 군단의 포로가 되어 수년간 고통받고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었던 그녀의 정신을 살려낸 뒤 자아가 붕괴된 칼디라스에게는 숨길 수 없는 죄책감도 있었다.
짧게 작별을 고한 그녀가 숨을 고른 뒤 남은 생명의 불을 모조리 태워 불살랐다.
그리고.
소년에게 짓밟히면서도 정체 모를 마법을 준비하는 닉스의 손이 일순간 소년에게 닿을 즈음.
그녀는 남은 모든 힘을 쥐어 짜내 그대로 파고들어, 칼디라스를 닉스의 두개골에 찔러넣었다.
동시에. 닉스의 손이 그녀의 가슴께에 뻗어져 왔다.
닿는 순간 죽음이다.
저것에 닿고 살아남은 저항군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압도적으로 기우는 힘의 균형을 보다 못한 중재자조차도 말이다.
소년은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치명상을 입어서도 안 되었다.
차라리 피할 수 없다면. 자신이 대신 죽어 그를 지키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레이나는 자기 생각 이상으로 소년의 행동이 빠르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녀의 검이 닉스의 두개골을 관통한 것과는 별개로. 닉스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기 직전.
순식간에 튀어나온 소년의 손이 레이나의 허리를 휘감듯 파고들어 와 닉스의 팔을 깍지 끼듯 낚아채 꺾어버린 것이다.
"까불지 마라."
동시에, 좀 전까지 미친듯한 광기를 보이던 것과 다르게 처음 같은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이 도망치건 사멸하건 내가 알아서 하니까 환자는 구경이나 해."
싸늘한 말투와 함께. 그녀의 신형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크윽?!"
부서져 버린 칼디라스 조차 놓쳐버린 채 바닥을 구른 그녀는 곧이어 멀쩡히 서 있는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막아야 하는데, 소년이 그걸 차단해버렸다. 결국, 그 힘은 레이나가 아닌 데이비가 맞았다.
소년은 여기서 죽거나, 혹은 상당한 타격을 받으리라.
마지막까지 자신은 해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그녀의 얼굴에 허망함이 어렸다.
화르륵......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이 통한 것처럼 닉스의 손과 마주쳤던 소년의 팔에 보랏빛의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타들어 갈 것이다. 절대 꺼지지 않는 화염이니까.
그런 팔을 내려다보던 소년은 이내 담담하게 헛웃음을 흘리더니 가볍게 팔을 허공에 털어버렸다.
화륵!!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어떤 존재도 절대 떼어내지 못했던 저 죽음의 불꽃이. 마치 벌레가 털려 나가듯 흩어져 버린 것이다.
동시에 소년의 팔에서 보이지 않던 무형의 장막이 그대로 깨지듯 부서져 나갔다.
"네가 나와 싸우면서 그 방법을 몇 번 썼는지 알고 있나?"
소년의 말투는 다급함이나 씁쓸함이 아닌 귀찮음이 묻어있었다.
* * *
허망할 정도로 마법이 쉽게 털려 버렸다.
죽은 눈빛 넘어 허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레이나도, 힘을 쥐어짜 마지막 반격을 가했던 닉스조차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했다.
"어......어떻게 그걸......"
"뭐, 이거?"
바닥에 남아 타오르는 작은 불씨를 가볍게 밟아 꺼뜨려 버린 내가 씨익 웃자 그의 흐려져 가는 안광이 더욱 흔들렸다.
파스스스......
동시에 닉스의 남은 뼈들이 서서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과도하게 무리한 상황에서 맞지 않는 힘을 갑자기 쓰니까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다.
-데......데이비 괜찮아?
'음? 무슨 일 있었나?'
내 질문에 내 곁에서 파리해진 안색으로 버티던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특유의 나긋나긋한 표정도 지운 채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그대......기억을 못 해?
그녀의 말을 무시한 나는 닉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너는 나를 처음 보지."
"대......대체......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난 네가 너무 익숙한데."
총 트라이 횟수 1만회 이상.
원망하려면 혼령이 되어서도 질기게 살아있는 그 게을러터진 검신을 원망해도 좋다.
콰작!!
짜증스레 말하며 그의 두개골을 밟아 부숴버린 후 힘을 갈무리했다.
미친 듯이 날뛰던 힘은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육체와 혼의 동기화의 시간이 남아있지만, 대상이 없는데 굳이 힘자랑할 이유는 없었다.
닉스의 상징이던 검은 하늘은 사라졌고, 붉은 별자리도 사라지자 남은 것은 노을이 져 가는 하늘의 모습뿐이었다.
"아포칼립스 플레어라고 했나. 닉스의 고유마법인데. 제법 강하거든."
처음 그 힘에 몇 번을 당했는지 모른다. 지독하게 파고들고 또 파고들어 놈의 마법원리를 파악했고, 결국 파훼법 정도는 이미 만들어 둔 후였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혼과 동기화되면서 보인 내 심경의 변화였다.
[데이비. 네 신성력의 70퍼센트 이상을 여기 담아. 네 혼에 봉인시켜둘 테니.]
[뭐요? 미쳤습니까? 이걸 어떻게 모았는데. 솔직히 신성력이 어디 쉽게 모이는 것도 아니......]
[이 개 거x 발x개 같은 새x가? 누님 말이 우습냐? 좋은 말 할 때 담자? 응?]
[누님은 얼어 죽을, 나이 드실 대로 드신 분이......
그때 이후로 약 15년 가까이 미각과 후각 없이 생활했었다.
처음엔 다프네가 왜 그러나 했었다. 하지만 수백 년이 흐르면서 그때의 일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무리한 힘의 축적이 부작용을 불러온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심각한 것이냐. 사실 그건 아니었다. 단순히......
그것들이 깡그리, 흑역사가 된다는 것이 문제일 뿐.
실제로, 레이나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 정신 나간 흑역사가 더 지속되었으리라.
"그렇게 하면 닉스가 죽을 것 같던?"
"......"
내 질문에 레이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네가 알던 닉스라면 죽기야 하겠네. 그거 하나 보고 여기까지 온 거 같은데."
"......"
"그런데, 살아서 도망가는데?"
내 말에 그녀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를 손으로 눌러 다시 눕힌 내가 조용히 말했다.
"가게 둬."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아공간에 손을 밀어 넣었다.
애초에 내가 노린 건 닉스의 껍데기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심연의 힘과 융합된 닉스의 영혼 그 자체였다.
치지직......
이윽고, 지금껏 잠겨있던 초월등급의 물건이 내 손에 쥐어져 형체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옅은 스파크와 함께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프리아 여신이 이번 일로 내게 내건 조건 중 남은 한가지. 바로 초월등급 물건의 해금으로 꺼내 든 활이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장궁은 겉보기에도 대단한 무언가가 서려 있는 것처럼 은은한 빛 가루를 흘러내렸다.
뒤이어 나는 아공간에서 또 한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수르트의 두 번째 유적에서 가져온. 닉스를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
단 한발의 화살이었다.
빛을 머금고 있는 화살을 말없이 활시위에 매긴 나는 미친 듯이 활동하는 마나의 상당수를 끌어모아 활에 담았고 그대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가게 두어라.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향해 장궁을 겨눈 나는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발을 미끄러지듯 내디뎌 몸을 지지시킨 후 그대로 장궁의 활시위를 놓았다.
단순 무식하게 힘을 담아 쏘는 활쏘기지만 화살이 보통 놈이 아니다.
[신궁 브류나크]
[망자멸시]
[불귀의 객]
투쾅!!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곧 거대한 일렁임을 만들어냈고.
허공을 찢으며 그대로 사라졌다.
닉스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유일한 화살이 허공으로 사라진 탓에 페르세르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신궁 브류나크를 아공간에 던져넣었다.
동시에 마치 닉스를 보호하듯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사령 마나와는 다른 마기의 균열이 내 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검은 균열이 서서히 커지며 거대한 원 형태의 일그러짐을 만들어냈다.
침묵한 채 담담하게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곧 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아아......나의......왕이시여. 반......구......어두운 영혼을 구......]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지만 곧이어 균열의 이변이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새카만 촉수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내 귓불을 잡아 몸을 지탱하던 페르세르크를 일순간 휘감았다.
-꺄악?! 이......이게 무슨?!
미끈거리는 문어 다리같은 촉수들이 그녀를 잡아 균열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무슨 힘이 가해진 것인지 혼령이라 나와 청단이 홍단이 이외엔 아무도 보지 못하는 페르세르크의 육신이 처음으로 세상 밖에 구현되었다.
동시에 파랗게 질린 그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시......싫어! 싫어!!!"
체면도 잊은 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그녀의 힘은 현재 미약하기 그지없기에 촉수 다발에 저항할 순 없었다.
[여......우리......어머니......]
어두운 목소리가 또 울려 퍼졌다.
미약한 그녀의 마기로도, 완력으로도 저항할 수 없는 탓에 흑빛의 촉수들이 더욱 꾸역꾸역 빠져나와 그녀의 전신을 샐 틈 없이 옭아매고 잡아당겼다.
망자와 생자의 규칙까지 멋대로 거부하는 동전 뒷면의 힘에 끌려가는 그녀를 보던 내 눈이 부릅 뜨여졌다.
저거, 쓸만하다!
여유로운 행동거지를 고수하던 페르세르크가 기겁할만한 걸 잘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
-이 개자식아!!
아이구야.
그새 내 겉면에 드러난 의식을 읽은 듯 그녀의 표정이 와락 찌푸려졌다.
동시에, 일그러진 균열의 일부를 그대로 손으로 낚아챈 내가 섬뜩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내 미소에 파랗게 질려 눈물까지 고인 얼굴을 한 그녀가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누굴 괴롭히기 딱 좋아 보이는 문어 다리와. 망자를 구현시키는 힘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야, 너희 그거, 좋아 보인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무시한 채 나는 균열을 맨손으로 잡아챘다.
주신 프리아 여신이 세상의 균형을 위해 무슨 생각을 하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나는 내 원대한 인생 목표에 도움이 되면 여기저기서 다 뜯어낼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 마왕님 몸보신 좀 해드리게. 혼자만 쓰지 말고 같이 좀 쓰자."
그거 좀 내놔 봐.
팔다리 하나 없다고 사람이 죽진 않잖아.
순간, 촉수 다발이 크게 움찔거린 느낌이 든다만.
무슨 상관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