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2권 6화
닉스에게 힘을 제공한 균열은 세상 뒤편에서 전해져 온 것이다.
아무리 상식, 법칙을 거부하는 힘이라도 양측이 존재하는 이상 상대가 이쪽으로 무언가를 보내기 위해선 통로가 필요한 것이 현시점이다.
프리아 주신이 내게 보옥을 보낸 이유는 아마, 이것 때문일 것이다.
한정된 시간이 거의 바닥을 쳐 가지만 충분한 시간이었다.
뜨드득!!!!
페르세르크를 빨아들이지 못하게 잡아채고 놈들의 힘을 역으로 뜯어내는 내 행동거지에 오히려 당황한 건 저쪽이었던 것일까.
수십 가닥의 촉수 다발이 쏟아져 나와 내 목과 팔을 휘감고 저항해대지만.
나는 놈들의 그런 저항을 무시하고 그대로 균열 자체를 잡아 뜯어버렸다.
물리력으로 뜯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당연 상대의 저항도 거셌다.
낚아챈 내 피부표면을 통해 음습하고 섬뜩한 무언가가 계속해서 내 몸을 침투하며 정체 모를 목소리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좋은 것 좀 나눠 쓰자니까.
나눠쓰고 바꿔쓰면 서로 좋을 텐데.
"아 이 새끼들, 인심 야박하네!"
퍼억!!
한 손으로 균열을 후려쳐 뒤틀어버린 내 다섯 손가락 전체에 새 파란 화염을 일렁거렸다.
[9서클]
[헬파이어]
[다중영창]
헬파이어라는 마법은 화염 마법사에게 있어서 고대의 전설이나 동화에 나올만한 마법이다.
말 그대로 지옥 불로, 단 한 번의 마법으로 도시 전체를 멸절시킬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니 말이다.
그런 헬파이어가 다섯 개.
한 개만 해도 복잡한 9서클 마법을 동시에 다섯 개나 냅다 먹여놨으니 어디 효과가 쉽게 들어오진 않으리라.
힘을 사용할수록 부작용이 밀려오는 탓에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어이없게 칼 맞아 죽는 것보다 내게는 그 흑역사를 쌓는 과정이 더 싫을 테니 말이다.
'망할, 부작용 참 더럽네.'
차랑!
헬파이어만으로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놈들 때문일까.
결국 나는 대량의 마나를 한 번 더 사용했다.
촤르르르르륵!!!
동시에 지상, 허공 등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새카만 사슬로 놈들을 그대로 포박했다.
그리고는 눈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순순히 내놓으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거다.]
마나만 받쳐준다면. 9서클 실현단계의 경지를 구현해낼 수 있다.
목소리가 세상과 공조하여 힘을 발현하는 경지이니 말이다.
드래곤이라 불리는 생명체가 내뿜는 용언과 닮았지만.
그딴 도마뱀 놈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다.
쩌적......쩍!!
효과는 순식간에 드러났다.
균열 전체에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찢어지고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9서클 실현단계에서 구현 가능한 [언어]는 등가교환을 요구한다.
그런데 말이다.
그 대가라는 건 어디까지나 갑의 입장에서 폭리를 취할 수 있다는 거다.
그게 바로 초월의 단계.
찌익!!! 찌익!!
필요한 만큼 촉수 다발을 찢어내 버린 나는 그 뒤 빈손에 새파란 마나 광구를 만들어냈다.
단순 따스한 느낌이 드는 마법구이지만 식겁 좀 할 거다.
[9서클]
[원자붕괴]
광구가 완성되기가 무섭게 나는 서서히 닫혀 가는 균열에 그것을 던져 넣고는 외쳤다.
"폭탄 받아라!"
찌이익!!!!
다시금 뱉어내지도 못하게 양손으로 잡아 균열을 강제로 닫아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쿠웅!!!
동시에 공간이 일면 뒤틀리는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지만.
무슨 상관이랴. 내 알 바 아닌 것을.
-하아......하아......
숨을 헐떡거리는 페르세르크는 눈물이 잔뜩 고인 얼굴로 마구잡이로 촉수 다발을 몸에서 풀어냈다.
얼마나 공포에 질렸었는지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내가 알고 있던 그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데이비......
"좋은 거 챙겼다. 볼일 끝났으니 가자."
내 말에 페르세르크는 온몸을 파르르 떤 뒤 사라진 균열이 있던 방향을 보고는 조용히 날아올라 내 어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그대로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아 내 목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어......딜......"
그때였다.
걸음을 옮기던 내 귓가에 필사적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바로 레이나였다.
"어딜 가긴. 돌아가야지.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는지 알고 있나?"
"닉......스......아직 닉스가......"
확실히 초대 리치, 닉스의 육신이 붕괴되고 놈을 마저 처리하지 않았었다.
이에 내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곳에는 혼령이 되어 흩어지고 있는 닉스가 보였다.
"믿을 수 없다....... 네놈은 정녕 인간인가."
"그래."
"......"
혼령이 되어 흩어지면서도 그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적이지만 강대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허나, 나는 노 라이프 킹. 초대 리치이자 대 군주이신 군주를 보좌하는 일각."
"그래서."
"네놈 정도의 힘이라면 내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을 테지만 나를 놓친 이상 언젠가 이번 일을 후회할 것이다."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저대로 부활하면 그는 아무런 상처 없이 다시 활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 잊고 있지 않나?"
내 질문에 그의 안광이 크게 일렁였다.
"무슨......"
그의 중얼거림에 손가락 끝을 바꿔 가리킨 내가 고개를 까딱인다.
"음?"
콰지지직!!!
"커헉?!"
동시에.
허공이 찢어지면서 조금 전 내가 신궁 브류나크로 쏘아 보냈던.
정체불명의 빛을 머금은 화살이 공간을 뛰어넘고 나타났다, 그리고 놈의 혼 정중앙을 꿰뚫었다.
공간을 넘어서고 있는 놈의 혼령이 마찬가지로 공간을 넘고 날아온 화살에 관통당한 것이다.
"그 화살은 수르트가 널 조지기 위해 죽기 전에 만들어둔 건데. 당연히 목적은 너밖에 없거든."
저 화살을 쏘기 위해선 상당히 큰 조건이 필요하지만 애석하게도 아폴론의 신궁인 초월등급의 무기, 신궁 브류나크는 무슨 화살이건 사용 가능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크......크으윽?!"
서서히 사라지던 혼이 다시 끌려와 정립되고 분해되기 시작하자 그의 안광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이건 말도 안 된다! 이런 건 있을 수 없......!"
"이 세상에 안되는 게 어딨어. 안 되면 되게 하는 거지."
"커허억!!"
화아아아악!!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완전히 사라져버린 닉스의 비명을 뒤로한 채 나는 레이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엘라임이 보호하고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며 물었다.
"미련은?"
"......"
"애초에 닉스를 해결했다고 마음이 풀릴 리가 있나."
장난스런 내 말에 그녀는 자신의 손을 힘겹게 들어 얼굴을 가렸다.
"보......지......말아요."
"왜."
"흉......측한 꼴은 누구......에게도 보이고......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말하는 그녀는 죽어가면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륀느. 그쪽은?"
"상위 마족, 이외에 상위 뱀파이어. 전투 중 도주. 륀느, 매우 강한 상대에 대해 높게 평가."
평소에 입고 있던 옷이 거의 다 찢어져 넝마가 되어버린 륀느가 등허리에 돋아난 날개를 팔락거리며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놓고 있는 한 여성을 부축해서 내게 다가왔다.
다름 아닌 카트린느 대공이었다.
사실 륀느가 한 것이라곤 두 명의 적을 상대로 홀로 미친 듯이 싸우던 카트린느를 보호한 것이 전부였지만.
아직 륀느의 힘으로는 가세하는 것만으로도 옷이 넝마가 될 정도로 적이 강했던 모양이었다.
"미련하기는. 쯧."
혀를 짧게 찬 뒤 나는 고민했다.
이곳에서 치료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데리고 먼저 돌아가는 것이 우선인가.
아직 완전히 힘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투웅!!!!
일순간, 워프 마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마법진이 내 발아래에서 생겨나며 공간 전체를 뒤집기 시작했다.
이제는 놀랄 힘도 없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손가락 틈 사이로 바깥을 보던 레이나가 힘겹게 물어왔다.
"당신은......대체."
"궁금하면 500골드."
내 장난스런 말투에 그녀는 허탈한 듯 눈을 감고 침묵했다.
* * *
"으읏......"
옅은 신음과 함께 여성이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것은 마음을 침착하게 하는 밝고 단조로운 색상의 천장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자신이 살아있는가 죽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여긴......"
"아......일어나셨어요?"
그리고, 그녀는 곧이어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분명 자신은 죽었어야 했다.
몸 안의 모든 장기가 힘을 견디지 못하고 활동을 정지하기 시작했다.
기묘한 약과 정령왕 엘라임의 힘으로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그렇게 회복한 것들도 모조리 불태워 닉스의 육신을 붕괴시키는 데 사용했다.
그때, 그녀의 생명은 고작 몇 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눈을 떴고 창밖으로 따사한 빛이 쏟아지고 있다는 말인가.
멍하니 고개를 돌린 그녀는 자신의 앞에 걱정스런 얼굴을 한 채 내려다보고 있는 작은 소녀를 볼 수 있었다.
흔히 귀족 가에서 볼 수 있는 단아한 디자인이지만 세련된 시녀복장을 입은 토인족 소녀였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레이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왜 기억을 못 했던 것일까.
이 소녀, 분명 볼티즈 왕국의 블랙마켓에서 노예로 팔려나갈 뻔했던 그 소녀였다.
정확히는 가면을 쓴 기괴한 남성이 데려갔던 소녀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가.
멍하니 있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시야가 너무 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면을 쓰고 있던 당시 그녀의 시야는 반쯤 흑백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
그쯤 생각이 미친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왜......왜 그러세요?!"
"보......보지 마세요."
당황한 그녀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음울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흉측한 얼굴을......"
"휴......흉측하다뇨! 정말 아름다우신걸요!"
그녀의 외침에 레이나가 멈칫했다.
"네?"
"그러지 말고 손 치우셔요. 약 드실 시간이에요. 이쯤 되면 깨어나신다고 저하께서 그러셨어요."
그녀가 저하라 부르는 인물은 누구인가.
분명 노예로 잡혀갔던 그녀는 왜 이리 행복한 얼굴을 하는가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레이나는 토인족 소녀의 손길에 상체가 들려졌다.
사르륵......
동시에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흘러내렸다.
평소의 빛을 잃어가던 백발이 아닌, 윤기가 가득한 새하얀 백발이었다.
"아......"
"정말......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은 처음 봤어요! 용사님이시죠? 용사 레이나님."
"......"
"......대체, 어떻게 된 거죠?"
"글쎄요. 제가 전해 들은 것이라곤 깨어나시면 약을 드시게 한 다음 데리고 나오라는 말씀 밖에......"
상황판단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토인족 소녀의 손길에 따라 간편한 복장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움직이시는 데엔 전혀 지장이 없으실 거래요."
"고......고마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헤실거리는 토인족 소녀를 멍하니 따라가던 그녀는 곧이어 복도의 창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정원에 홀로 선 채 거대한 마법진을 운용하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찌 잊을까.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힘을 내뿜던.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혹시 인간의 탈을 쓴 프리아 주신이 내려온 게 아닐까 생각이 들던 그 소년이었다.
마치 홀린 것처럼 밖으로 나간 레이나는 곧 소년이 있던 정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거, 조금만 개량하면 써먹을 수 있겠다."
누구와 대화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소년은 퍽 즐거워 보였다.
"뭐?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내가 이걸 어떻게 구했는데 자꾸 버리래."
"......"
"계속 도망가면, 이거 세포 활성화해서 키우는 수가 있다."
투덜거린 소년의 움직임이 순간 멈춘다.
"어때, 시야가 다르지?"
그리고, 소년의 목소리가 이번엔 허공이 아닌 레이나에게 닿았다.
"......"
말없이 침묵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호감형 인상의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약속은 약속이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해줄 테니 말만 해. 여기서 내팽개치면 전부 몰수할 수 있는 양반이 주신이라."
그의 말에는 따스한 배려가 숨어있었다.
다만 뒤 이어지는 그의 말에 주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의사 소견으로 말해주자면, 넌 내가 준 마지막 회생의 기회까지 걷어찼다, 네 수명.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얼마나......남았죠?"
"일주일. 지금 네 상태는 나도 못 고쳐. 애초에 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잖아."
외형의 복원은 단순한 서비스 차원일 뿐이고. 외부선에서 넘어온 여행자인 그녀는 일반적인 케이스가 아니다.
스스로 바란 것은 모든 일의 해결과 스스로의 죽음인데. 이상하리만치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담담한 그 말에 레이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