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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286화 (285/1,559)

# 286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2권 9화

중부대륙의 울창한 숲.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에 길이라곤 산짐승이나 몬스터들이 이동하는 구불구불한 길들이 대부분인 이 숲은 팔란제국에서도 출입이 가능한 이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철그럭......

거대한 나무로 몸을 지탱한 검은 기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상태는 겉으로 보기에도 절대 좋지 않았다.

손에 쥐어진 검은 이미 반으로 부서진 후였고.

단단해 보이던 갑옷은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구멍이 나 그 안의 참혹한 상처를 그대로 드러냈다.

철컥......철컥......

키리릭!!!

말없이 걸어가던 기사는 곧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작은 괴물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깊은 숲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블린이었다.

단일 개체의 위험성은 크지 않지만, 머릿수가 많고 악독한 놈들이다.

검을 든 기사가 치명상을 입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은 놈은 당장에라도 덤벼들 것처럼 거리를 재기 시작했고 걸음을 멈춘 기사는 그저 묵묵하게 고블린을 노려보았다.

-키이이이익!!!

이윽고, 틈을 본 고블린이 재빠르게 기사에게 덤벼들자 기사는 그대로 놈을 향해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분명, 제시간에 맞추기 힘들어 보일 만큼 느린 움직임이었지만.

콰득!!!

기사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간 가속하며 고블린의 머리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가차 없이 곁에 있던 거목에 놈을 처박아 터뜨려버렸다.

"후우......후우......"

거친 숨소리가 투구 너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기사는 그대로 제 배를 감싸 쥐더니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겉보기에도 심각한 만큼 사내의 상처는 가볍지 않았다.

"......"

말없이 숨을 헐떡이던 기사는 곧이어 몸을 서서히 뉘이고는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동시에 새카만 흑발이 흘러내렸다.

"쿨럭!"

짧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 사내는 인간과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눈동자는 인간과 달랐다.

새빨간 혈안.

마족의 상징이다.

그리고, 사내의 머리 위엔 마족을 상징하는 작은 뿔이 돋아나 있었다.

마족이라는 종족 자체가 그러했다. 마족에게 뿔이란 힘의 상징이다. 하지만 사내는 고위 마족이면서도 뿔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마왕을 제외한 모든 마족들은 뿔의 크기가 커봐야 손가락 몇 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을 만큼 작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 사내의 뿔은 마족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큰 편에 속했다.

스르륵.

"밀피유."

이윽고 말없이 누워있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새하얀 옷을 입은 뱀파이어 여성이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흥미로워. 분명 마족이 허용할 수 있는 치명상 이상의 상처를 입었는데."

"해부해보고 싶나?"

"일단은 동맹 중에서도 당신에겐 호의적이야. 헤치지 않아."

"하. 마족을 상대로 그렇게 경계를 품는 연금술사 파라셀루스께서 많이도 유해지셨군."

"당신은 예외야."

싸늘한 사내의 말에 밀피유는 조용히 물었다.

"왜 분노하지 않아? 분노는 당연한 감정일 텐데."

"네년에게 도움 따윈 바란 적 없다. 나 혼자서도 충분했어."

"하지만, 생명활동에 적색 신호가 들어왔어."

그녀의 비꼼에 사내는 묵묵히 침묵을 고수했다.

"수인종 린디스 제국의 대공, 카트린느 카라벨라. 그녀는 강해."

"그래. 정말 강하더군. 다만, 그 뒤에 합류한 그 정체불명의 작은 생명체 또한 그렇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머리 위에 뜬 고리와 등허리의 날개가 걸렸다.

"그녀는 건드리지 마."

의도하지 않게 단호한 답변이 들려오자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째서지? 앞으로 네 주군이 완전히 부활하고, 마왕님께서 재림하기 위해선 그런 위험분자는 더 크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일 줄 알았는데."

"그녀를 건드리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아. 점점 강해지고 있지만 그런 자잘한 문제가 아니야."

하프 뱀파이어이자 연금술사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밀피유의 답변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를 건드렸을 경우 인간 측에서 움직일 자가 하나 있어."

"......그자는?"

"닉스를 죽인 자. 이름은 데이비 올 라운."

그 말에 사내는 침묵했다.

"그 용사라는 인간이 아니었나? 내 뒤로 들어간 이는 처음 놓친 인간이 전부였다. 닉스가 소멸한 것은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그녀가 아니야. 그리고, 그 남자, 아마 당신의 기감을 속이고 들어갔을 거야."

아무래도 인간 측에 절대 쉽게 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본대에 보고를 해야 하는 데 현재로썬 연락이 쉽지 않다.

"적어도 당신만큼은 그에게 죽지 않았으면 해. 이곳은 인간의 발길이 드물어, 적어도 회복할 때까지 누군가에게 발견될 일은 없을 거야."

밀피유의 말에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죽지 마. 마족 중에 당신은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마족이니까."

마족과 동맹이지만, 마족을 경계하는 뱀파이어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엔 참 참신한 답변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하프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뱀파이어 사이에서는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존재다.

그런 만큼 그녀는 일반적인 뱀파이어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이윽고 밀피유가 그대로 혈액처럼 변해 사라져버리자 그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간을 넘어 이곳으로 오면서 많은 힘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해도 닉스의 봉인을 지키던 자신을 막아선 둘은 강했다. 그냥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이렇게 무너져 있으면 곤란한데. 빨리 이곳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마왕님의 혼을 찾아야 하는데.

권좌에 욕심이 많은 이들이 그녀의 혼을 찾아 멋대로 주무르기 전에.

사박......

그때였다.

분명 아무도 안 올 거라 했던 것과 다르게 사내는 천천히 다가오는 인간의 그림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누군가와 싸운다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약하니 말이다.

어떻게든 힘을 끌어내 보려 했지만, 치명상이 너무 큰 탓에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는 그였다.

"이, 이봐요, 괜찮아요? 칼디라스! 신성력 좀 빌려줘!"

초점 하나 제대로 잡히지 않는 그의 시야에는 상당히 닳아버린 옷을 입고 있는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뛰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 * *

어두운 밤길을 조용히 걸어 영주성으로 돌아온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두 남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카트린느 대공과 암살자인 수인남성, 벤디크였다.

"잠도 없나."

"레이나를......"

말없이 다가오는 그에게 나는 등에 업혀있던 레이나를 건네주었다.

"떡이 되도록 마셨으니 고이 재워놔."

"......"

말없이 레이나를 바라보던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나를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짧은 감사 표시에 나는 그의 옆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카트린느 대공. 놓친 그놈은 어땠습니까?"

"오랜만에 진짜 죽는 줄 알았지요. 뭐. 뱀파이어와는 다른 족속들이었는데."

"마족이라는 놈입니다. 그것도 제법 상위 마족."

아마 제힘을 발휘했으면 닉스보다 더 위험한 놈이었을 것이다.

물론, 심연이 힘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점에서만 비교하면.

"호오......어쩐지, 어마어마하게 강하더라니."

카트린느가 키득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는 지금 이 길로 곧바로 황실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왕자님."

"벌써 말입니까?"

"네, 일단 정식 보고는 올려야 하니까요. 아, 그리고, 이번 발카스 해양국가에서 데이비 왕자님께 꼭 감사인사를 전해달라는 전갈을 보내왔어요. 단순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고. 반드시 보답하겠다더군요."

발카스는 도시국가다. 그런 도시국가가 한 번에 몬스터의 습격으로 멸절할 뻔했으니 아마 그들 입장에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카트린느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가는 동안 휴가나 즐기려던 참이니까 천천히 가고 싶네요."

그녀의 장난스런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혹여라도, 다음에 그놈에 관한 일이 생기면 꼭 제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마치 흩어지듯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닉스의 일이 처리된 이상 그녀에게 할 일은 더 남아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윽고 나는 말없이 남아 나를 보고 있는 벤디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할 말이 있나?"

"레이나의 수명은......"

"일주일. 하루 썼으니 6일이다."

레이나가 느끼던 수명의 한계는 정확하지 않다.

그래도 얼마 살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살릴 순......없는 겁니까."

그의 참담한 표정에 나는 고개만 저어 보였다.

"다 자기 자리가 있는 거다."

"당신은......그녀를 살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의 말에 내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예?"

"주신께 기도라도 해봐. 혹시 아나? 간절한 기도에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지."

내 말에 벤디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기적을 바라라는 말은 결국 소용이 없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는 말도 안 된다며 화를 내기보단 다른 가능성을 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빠악!!

그의 외침에 나는 그대로 그의 명치를 후려쳐 날려버렸다.

"끄윽......"

힘을 거의 싣고 친 것은 아니라지만 익스퍼트급인 그가 견디기엔 조금 강한 힘인 것은 사실이었다.

"신의 첫 번째 종자인 성자에게 인체 연성을 하라고? 너 돌았냐?"

"......"

그녀는 절대 인간으로서, 지금 그녀로서 수명을 연장할 수 없다.

"그럼......이렇게 그녀를 보내야 하는 겁니까?"

"내가 그걸 왜 신경 쓰나."

"하......하지만......"

"차라리 효율적으로 보낼 생각을 하는 게 좋을 거다."

내 제안에 그가 침묵을 고수했다.

"거의 반평생을 피비린내 나는 싸움만 해온 멍청한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생각해봐."

참담하던 그의 표정이 더욱 어둡게 변했다.

벤디크를 뒤로한 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에게 행복한 미래가 구원이라면.

누군가에겐 미련을 모두 놓고 소멸하는 게 구원이라 여길 때도 있는 법이다.

나는 그가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륀느?"

내 부름에 숲 속에서 나뭇가지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있던 작은 은발의 소녀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마치 모습을 은폐하는 군인처럼 녀석은 주변과 동화하는 듯 위장하고 있는 모양새가 퍽 우습게 보였다.

* * *

숨어서 나를 지켜보던 것은 륀느였다.

녀석의 그런 행동에 나는 일단 예의상 녀석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너 뭐하냐."

이에 륀느는 한참 동안 고민하듯 나를 올려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데이비님 륀느에게 관심이 없다고 분석."

"또 어디서 그런 못된 걸 배워온 거야."

"유리아 헬리샤나. 륀느가 유리아의 유머 감각을 매우 높게 평가."

더 말해 무엇할까.

"무슨 일인데."

"아이나로부터 보고."

륀느의 말에 내 얼굴에서 느긋한 미소가 사라졌다.

"하인스 영지에 범죄조직과 손을 잡고 움직임을 보이던 상위귀족 2명과 하위귀족 7명을 특정. 증거 확보 완료."

"그렇단 말이지."

"륀느가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암습은 륀느가 높게 평가. 명령하달 시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 가능해."

네가 못한다고 하는 게 뭐냐, 라고 묻고 싶은 것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아니, 증거는 전부 폐하께 전해드리라고 해, 그 이후의 일은 바리스에게 맡길 거다."

"륀느, 이유를 요구, 륀느의 사고회로로썬 이해 불가능."

"바리스는 왕이 될 테니까 이제 슬슬 부딪혀 봐야지."

왕이 될 녀석이라면 슬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겪어봐야 하는 법이다.

-웃기는 소리. 지금 저 꾸물럭거리는 살점에 관심이 그득그득하면서.

들켰네?

륀느 또한 페르세르크와 말을 나누진 않았지만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그보다 이쪽이 조금 더 급하거든."

쳐 죽일 놈들을 죽이는 것이야 언제든 할 수 있다지만. 어렵게 구한 적이 품고 있는 가능성을 확인해두지 않으면 대비를 할 수 없다.

꾸물럭거리는 살점 덩어리가 내가 꺼내 든 작은 병 안에서 신나게 움직인다.

본래 이것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사이즈였지만 마법으로 자극을 가하니 이 정도 사이즈로 줄어들었다.

마치 죽은 척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겉보기엔 매우 효율적인 피부조직. 하지만 미관을 상당히 심하게 해치는 요소. 그것을 륀느가 낮게 평가."

륀느의 말에 내가 병을 녀석에게 들이밀자 한발 두발 물러나더니 그대로 빠루를 뽑아 들었다.

"접근 경고......접근 경고. 륀느가 낮게 평가!"

공통적인 혐오대상인 모양이다.

* * *

레이나에겐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일행이 존재한다.

수인남성인 벤디크를 제외하면 모두가 성국에서 주선하여 붙여준 인물들일 뿐이지만 그동안 행동을 같이하며 정이든 탓인지 그녀의 일행들은 그녀의 죽음에 관한 선고를 쉬이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 탓일까.

날이 밝고 숙취로 끙끙 앓아대는 레이나를 지켜보던 그녀의 일행들은 사라진 벤디크를 뒤로 무더기로 찾아와 내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모두 퇴짜를 놓았다. 벤디크에게도 했던 말이지만, 그녀를 무리하게 살려내려 들다간 그녀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을 윤회의 고리마저 박탈당할 확률이 높다.

무슨 말이냐면, 모두에게 잊혀진 채로 소멸할 거라는 소리였다.

주인을 잃고 꾸물럭 거리는 촉수는 일정 촉매를 가하면 스스로 성장한다.

놈들은 태생적으로 페르세르크를 향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자신의 안전이 확보되는 순간 닥치는 대로 페르세르크를 향해 달려들었으니 말이다.

[쇼크]

짧게 가해진 마법 한 번에 움츠러들 만큼 약해져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쇼크 마법이 아니라. 1서클 쇼크 마법을 4서클 까지 증폭시켜야 효과가 드러났다.

놈이 품은 위험요소를 하나하나 구분하여 그녀에게 해가 되는 요소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네가 쓸 물건을 만들려면 너와 시너지가 잘 맞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니까?"

내가 촉수 생물체가 든 병을 탕탕 치며 소리치자 주머니 속에서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리고는 주머니 끝에 팔꿈치를 받친 뒤 턱을 괴고 느긋하게 물어왔다.

-단순히 그대는 본녀가 기겁하는 걸 보고 싶은 거겠지. 미안하지만 그대가 원하는 대로 넘어가 줄 생각 따윈 없으니 꿈 깨시지.

"아, 거 인심 야박하네."

-......

너무 당당하게 답하니 오히려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덥썩!!

그리고, 방심하던 그녀를 낚아챈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지금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저쪽을 잘 몰라. 무슨 뜻인지 몰라?"

-미리 대처를 할 수 없다는 말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해주겠네.

그녀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여 보였다.

"그래, 난 널 잃을 생각이 없어. 널 마왕으로 부활시킬 생각도 없고, 이상한 소리나 해대는 저 시커먼 놈들이 시비 거는 대로 맞춰줄 생각도 없고.

그렇기에 이 샘플은 중요했다. 말없이 병 안에 든 촉수 덩어리에 미리 술식화 시켜둔 마법진을 발동시키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꾸드득......꾸득......

동시에. 마나를 머금은 심연의 생물이 갑자기 경련하기 시작했다.

-데이비.

"좀 믿어봐라."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시선을 피하더니 곧 나긋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날아올라 내 머리 위에 앉았다.

그때였다.

챙그랑!!!!

작은 병에 들어있던 촉수 다발이 유리병을 박살 내며 튀어나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은 혼령 상태인 페르세르크를 찾아 꾸물럭거리며 빠르고 거칠게 움직여 댔다.

흐물거리던 촉수 다발들이 갑자기 활발해진 탓에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영 적응이 안 되냐?"

-이건 생리적인 혐오가 너무 심해......

단순히 마나를 제공하는데에도 거칠게 반응하며 반항하는 놈들은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마나를 머금은 정도로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이야.

조금 예상외의 결과를 지켜보던 나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표정이 굳었다.

"아, 설마 이거......"

동시에 활발하게 움직이던 촉수가 내가 펼친 마법에 짓눌려 그대로 찌그러지듯 수축하였다.

촉수 다발은 금방 수그러들었지만, 내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이건 좀 심각한데......"

-심연을 우습게 보지 마, 심연은 그대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제멋대로고 위험해.

내가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페르세르크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실제로,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변화였다. 다만, 괜한 사실을 그녀가 알아서 쓸데없이 신경 쓰게 할 생각은 없었다.

"활동량이 너무 매운맛이다. 조금 순한 맛으로 바꾸자."

작은 손이 내 정수리에 있는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잡아당긴다.

하지만 나는 놈의 육편 속에서 변하는 내 마나들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지켜보았다.

이놈들.

현실에서 존재하는 물리법칙, 혹은 비물리법칙에서 치외법권이구나.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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