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3권 5화
103. 시계의 왕녀.
"형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래 돌아오시면 연통을 드리려 했습니다만......."
피곤한 표정으로 반겨오는 바리스의 환대에 나는 망설임 없이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꽂아넣었다.
"끄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녀석은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한 듯 나를 올려보았다.
하지만 곧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은 듯 벌떡 일어났다.
"아......"
"간단한 피로 회복이다. 며칠 동안 못 잔 거야?"
"하하 글쎄요. 한 이틀이었나......"
사람이 사흘만 잠을 못 자도 미치기 마련인데 잘도 버티고 있다.
장난기가 가득하던 녀석은 실전을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힘드냐?"
"예, 힘듭니다."
단호하게 답한 녀석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만큼 열정도 생기네요. 국정을 배우다 보니 아바마마께서 얼마나 노력하셨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그래?"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실수를 하신 부분도 있지만요."
쿡쿡 웃어 보인 녀석이 정복의 주머니 안에 숨겨진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보고서입니다. 형님께서 제게 잠시 빌려주신 책의 도움을 받아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만. 하오지 탄광 전소 보고는 아무래도 사실인 듯합니다."
"범인은?"
"그게......아무래도 인간은 아닌 듯해서요. 여길 보세요."
하오지 탄광.
지구와 다르게 열악한 과학 기술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 탓에 대부분 광부는 죄인들을 대동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기도 한 탓에 인권적으로는 상당히 악질적인 곳이기도 하다.
물론, 극악의 죄인에게 인권 따윈 없다는 법도를 가진 라운왕국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바리스를 따라 들어간 지하 석실에는 커다란 석재 침대와 그 위에 누운 한 구의 시신이 있었다.
"다른 시신들은 모조리 불타 사라졌지만 딱 하나 사인을 건질만 한 게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불을 지른 모양인데. 그중에 하나가 빠져나갔던 모양이에요."
눈이 많이 피로했는지 안경을 한번 고쳐 쓴 바리스가 천을 걷어냈다.
-운영 당하고 있군.
'개x식들이.'
애초에 더 볼 것도 없는 사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확인을 위해 나는 말없이 시신의 목 부분에 손가락을 올려 신성력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형님, 뱀파이어가 맞습니까?"
"맞아. 그것도 꽤 힘이 센 놈이네."
급진파 뱀파이어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힘을 몸에 둘러 불사의 권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그렇기에 온건파와 급진파를 구분하는 것도 사실상 어렵지 않았다.
"뱀파이어들이 왜 갑자기 하오지 탄광을 노렸을까요."
"다른 점은?"
"그게......아무리 찾아봐도 놈들이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은 흔적이 없네요. 막연하게 찾아와서 몰살하고 떠난 꼴이에요."
"발견된 시신 수는?"
"확인된 시신의 수는 약 282구 정도로 훼손되어서 찾을 수 없는 시신이 반절 이상입니다."
"그래?"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그 오지의 산골을 찾아가 난리를 부렸다는 건 놈들이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 제가 독자적으로 조사해본 대로라면요."
녀석은 자신의 머리를 굴려 한가지 가설을 내놓았다.
"일부러 이렇게 인원파악이 힘들게 만든 건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 그곳에서 데려가야 할 인간이 있었다는 건 아닐까요?"
"이를테면 칼루스나 베네디트, 혹은 바리에타 공작."
리네스 바리에타 왕비는 국왕 크리아네스의 손에 명을 달리했으니 남은 것은 그 셋이었다.
-꼭 그들이라는 보장은 없지.
'그렇지.'
"바리스, 지금부터 몇 가지만 조사해줬으면 한다."
"예 형님, 말씀만 하세요."
"다른 국가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지 알아봐."
"다른 국가요?"
"그래."
"일단......알겠습니다."
"그리고, 칼루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칼같이 답해오는 녀석의 답변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시신을 천으로 덮었다.
-실험체로구나.
'마왕의 육신을 만드는 게 쉽진 않을 테니까.'
-때가 되면 본녀가 부활하게 해줄 게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넌 안돼.'
단호한 내 말에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지? 데이비, 분명 본녀가 말했을 텐데. 심연이 손가락 빨게 만들고자 한다면 본녀가 마왕으로 부활하는 게 맞다고.
그녀의 설득에 나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내디뎠다.
"넌 심연이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무슨?
"급진파 뱀파이어가 지금 심연의 힘을 빌려서 마왕을 부활시키려고 해. 그런데 한번 그렇게 당한 놈들이 또 그런 수작에 당한다고?"
-그건......
"그리고 내가 말했지. 네가 마왕이 되면 대적자는 누가 될지 안 봐도 뻔하다고."
주신 프리아 여신은 말이다.
의외의 부분에서 비극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넌 절......"
페르세르크에게 못을 박으며 말을 하던 내 걸음이 멈춰졌다.
아무도 없던 왕궁복도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소녀 한 명 때문이었다.
"넌......"
"안녕하세요. 데이비 올 라운 오라버니."
낭랑한 목소리. 하지만 잔뜩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소녀는 주먹을 꼭 쥐고 나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에오니샤."
에오니샤 올 라운.
바로 리네스 왕비의 마지막 딸로. 라운왕국의 반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귀족 파의 왕족이다.
정확히는 내가 그녀를 살려두긴 했지만 말이다.
"무슨 일인데?"
딱히 그녀에게 원한이 있었던 바는 아니었다.
녀석은 워낙에 겁이 많은 데다 궁 밖 출입을 잘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왕녀 저하!"
그때 멀리서 다가오던 시녀 하나가 눈을 부릅뜨더니 후다닥 뛰어와 그녀를 제 등 뒤에 가리고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죄송합니다. 왕자 저하. 금방 물러가겠습니다."
"실리! 기다려! 난 꼭 할 말이 있단 말이야!"
"왕녀 저하!"
당황한 채 허둥지둥거리는 시녀의 모습에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그만, 무슨 일인데."
담담하게 묻는다고 물었는데 표정이 상당히 굳어있었던 모양이었다.
대번에 굳어버린 두 사람의 모습에 내가 뭔가 말하려던 찰나.
"죄......죄송합니다! 저하! 금방 왕녀 저하를 모셔 가겠습니다!"
이번엔 에오니샤도 반박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잠깐만."
이에 나는 가볍게 두 사람을 제지한 뒤 표정을 슬쩍 풀고는 물었다.
"할 말이 있나?"
괜한 친절은 저 아이에게 외려 경계심을 심어주리라.
그러니 적당히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에오니샤에겐 더 자신감을 심어 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죄송합니다! 저하! 모......목숨만은! 왕녀 저하는 아직 어리십니다!"
"내가 지금 네게 물었나?"
담담한 질문에 시녀가 움찔거렸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왕족의 앞에서 왕족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 이지."
"죄......죄송합니다."
"에오니샤."
"네......네!"
깜짝 놀란 녀석이 잔뜩 경직된 얼굴로 대답했다.
"따라와, 할 말이 있는 거겠지?"
"......네."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보니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칼루스나 베네디트놈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같은 어미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 * *
왕궁의 외곽에 위치한 1왕자 궁에 오랜만에 들리게 된 나는 생각보다 관리가 잘되어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표했다.
"그......아니샤 후궁께서 틈틈이 궁을 관리......하셨어요."
"그래? 그럼 잘됐네. 오래되긴 했다만 제법 오래 산 곳인데."
내 말에 에오니샤는 긴장한 듯 조용히 나를 따라 걸었다.
"자, 엘프 숲에서 가져온 차다. 맛은 좋을 거야."
"......"
-극 악랄한 차를......
'모르면 맛 좋은 차일 뿐이야.'
원효대사 해골 물이라고 아는지 몰라.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보는 녀석을 보며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는 내 원수였던 리네스 왕비의 막내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죄인인 것은 아니었다.
칼루스와 베네디트는 뿌린 대로 거둔 것일 뿐 리네스 왕비의 죄가 연좌제가 되는 건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한때엔 널 숙청해야 한다는 말이 많았지 아마."
"흐끅!"
깜짝 놀란 녀석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겁을 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하께서는......"
"좋은 사이는 아니다만, 그렇다고 내가 네 오라비들마냥 편 가르기를 할 생각은 없다. 편한 대로 불러."
"죄......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침묵하던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데이비 오라버니께서는......제가 밉지 않으신가요?"
"네가? 네가 뭘 했는데."
"그......그게......저는 죄인의 딸이고......"
"그 반란을 네가 일으켰나?"
"그......"
"아니면, 동조했나?"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음미하자 녀석은 마지못해 차를 천천히 마셨다.
어릴 때부터 왕족의 교양을 배워온 탓에 자세는 잘 맞지만 역시 아이는 아이인지 뜨거운 차에 혀를 데인 듯 화들짝 놀란 모습을 보였다.
-얼마나 긴장했으면......쯧쯔......
"칼루스와 베네디트는 뿌린 대로 거둔 것뿐이지 넌 죄가 없다고 판단했으니 널 그냥 내버려 둔 거다."
"그게......"
"자, 말문이 좀 트였으면 해봐,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겠지?"
나는 왕궁에 거의 들어오지 않기도 하거니와 이미 계승권까지 포기해버린 왕자일 뿐이다.
하지만 왕궁의 모든 귀족들은 어느 정도 내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선을 넘어서 개수작을 부리는 것이 눈에 띄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
최근에 한번 그들이 보았으니 말이다.
하인스 영지에 뒷 세계의 조직을 끌어들여 돈을 챙기려 했던 귀족들의 명단이 바리스에게 넘어갔고 바리스는 국왕의 명에 따라 스스로 나서서 그들 모두를 처형장으로 손수 보내버렸다.
잘못하면 직위고 나발이고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지만 현 귀족들에게 나는 단순 공포정치를 하는 뒤에 숨은 거대한 손으로 보일 뿐이었다.
에오니샤 또한 그런 왕궁의 소문을 들었을 테니 나를 이리 두려워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저......이런 부탁을 드리면 안 되는 건 알고 있어요."
조심스레 말한 녀석이 주먹을 꼭 쥐었다.
그리고는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절 공학 국가 베텔스트로크로 보내주세요."
"베텔스트로크?"
중부대륙에 있는 연금술이 상당히 발전된 국가다. 단순 의미로 치면 과학 기술 하나만큼은 어지간한 국가 이상급의 기술력을 지닌 곳이기도 했다.
"네. 저......연금술과 공학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그걸 왜 내게 요구하는데?"
순수한 의문에 의거하여 질문을 던지자 녀석이 내 눈치를 살폈다.
"그게......저는 죄인의 딸이니까......다른 이도 아니고 데이비 오라버니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그 말에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면 된다."
"아......"
"다만 베텔스트로크로 가는 건 안 돼."
내 말에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따져왔다.
"어......어째서죠?! 베텔스트로크엔 유명한 학자들이 배출된 아카데미가 있어요! 귀족이나 왕족이라면 그 누구든 입학할 권리가......!"
그녀의 말의 요지는 그러했다.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안 돼."
"어......어째서죠?"
그럴 수밖에 없다.
이놈의 대륙은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건 각 국가 간의 전쟁을 억눌러 놓았을 뿐 내부의 문제는 대부분 그 나라의 재량에 맡기고 있다.
문제는 베텔스트로크의 재상과 국왕 파의 꼴이 지금 라운왕국의 예전과 참 비슷하다는 점이다.
내 경험상 그곳은 조만간 내전의 불이 한번 붙으리라.
"거긴 곧 내전이 터질 거다. 네 나이가 고작 11살이야. 아직 거기에서 버티기엔 너무 어려."
조목조목 말하는 게 퍽 귀엽긴 한데. 솔직히 11살은 너무 어린 나이였다.
담담한 내 답변에 녀석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중 내 시선에 무언가가 잡혔다.
"그건?"
내 물음에 에오니샤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작은 기계 장치를 화들짝 놀라 가렸다.
미와 우아함을 추구하는 레이디가 차고 있기엔 조금 많이 투박하고 엉성한 팔찌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다. 그 효능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으니 말이다.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네가 만들었니?"
"......"
대답하지 않은 채 침묵하는 녀석의 행동에 내가 천천히 다시 물었다.
"네가 만든 거야?"
"......네.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한번 보여줄래?"
내 말에 에오니샤는 잔뜩 굳은 얼굴로 아직 작은 제 팔을 내게 내밀었다.
투박하고 단조로우며 엉성하기 짝이 없는 기계 장치였다.
하지만 그 효능 자체는 굉장히 기본에 충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신한 발상이었다.
-시계?
"에오니샤."
이윽고 내가 천천히 에오니샤를 부르자 녀석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든지 시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걸 만든 거지?"
"그......그걸 어떻게......"
"너. 오라비와 함께 사업한 번 안 해볼 테냐?"
기술력은 이쪽에서 제공해주마. 널 가르쳐주기도 하겠다. 연금술사 스승 이바에게서 배운 기술력은 이곳의 기술력보다 한참의 상위에 있으니까.
"사업......말씀이신가요?"
"그래, 베텔스트로크로 갈 것도 없이 여러 기술을 내가 가르쳐주마. 네가 자랄 때까지 네가 원하는 만큼의 기술을 가르쳐줄 수 있어. 다만 네가 가진 아이디어만큼은 제공해주는 거야."
어린아이기에 오히려 아이디어가 더 참신하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공학 기술을 배웠는지 새삼 신기할 지경이지만 에오니샤는 분명 이쪽 계열로 제법 재능이 넘쳐 보였다.
지금 네 손목에 채워진 그 투박한 시계처럼.
"계약서부터 쓰자고, 7대 3 어때. 물론 기술력 제공과 자제 제공을 생각해서 내가 7이야. 대신 모든 지원을 다 해주마. 그 외에 네가 원하는 기술들을 직접 보여주기도 하마."
"그......"
"다만 조건이 있다."
내 미소에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바라보았다.
"종신 계약이라고 아니? 에오니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약은 내가 제공하는 노예 계약이고 가장 싫어하는 계약이 남이 제공하는 노예 계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