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3권 23화
본인이 가장 당황할 수밖에.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레이나를 올려다보던 일리나가 천천히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일리나는 레이나와 나를 계속해서 번갈아 보았다.
이에 나는 확인 차원에서 한가지 키워드를 던졌다.
"인사해. 너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야."
내 말에 일리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가까운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마 네가 가장 잘 알겠지."
장난스런 말투에 일리나는 괜히 답답해졌는지 입을 삐쭉였다.
"뭐야....... 대체 뭔데......"
"네 본인이라고 하면 믿을래?"
내 말에 일리나의 눈이 살짝 크게 뜨여졌다.
그리고,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베리얼도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자,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
"무슨......"
"용사 레이나. 평행선에 있던 일리나 데 팔란. 뱀파이어의 계략 끝에 부활하여 조종당한 마왕 페르세르크로인해 인간이 패배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최후의 저항군 4사단 사령관."
레이나가 처음 죽기 전, 나와 술을 마시던 그때.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많이도 털어놓았다.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 고통스러웠는지, 또 슬펐는지까지 말이다.
계속되는 설명에 일리나의 동공이 쉴 새 없이 떨렸다.
내가 하는 말이 단순장난이 아니라는 건 그동안 그녀가 나를 겪어왔기에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거짓말...... 아니구나."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레이나를 보는 일리나였다.
반면 레이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요?"
"괜찮아. 나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 하는 거니까."
생각지도 못한 내 답변에 레이나는 의문을 표하면서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다.
"팔란제국에서 일어난 언데드 사태에 큰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어 마족의 군단에 구금되었고, 그로부터 몇 년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고문과 치욕을 당했다."
바들바들 떠는 일리나의 손은 마치 부서질 것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이후의 일도 이야기해줄까?"
이어지는 내 말에 결국 일리나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정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공기 속 마나가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나를 제외한 단 한 명도 그 사실을 눈치채는 이는 없어 보였다.
"이 모든 말이...... 사실인......"
투웅!!
그리고, 일리나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눈을 크게 뜨더니 그대로 멈칫했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레이나와 나를 제외한 세상 전체가 멈춘 것처럼 굳어버린 느낌을 주었다.
"이건......"
"만약 네가 이전의 일을 떠벌이게 되면 벌어질 일이다. 잘 봐둬. 네 존재는 소거 당했다. 그건 변하지 않을 거고."
"......"
"만약 억지로라도 네 존재를 상기시키려 들면 말이다."
담담하게 말한 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뒤 입안에 고인 것들을 그대로 뱉어냈다.
새빨간 육편이었다.
9서클에 들어서면 어지간해선 내상 면역에 가까워지는 게 현실이지만 그런 위치에 있음에도 충격은 보통수준이 아니었다.
"규제를 받게 되겠지?"
"괘...... 괜찮으세요?!"
깜짝 놀란 레이나가 후다닥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미련하게 뭐하는 짓이에요?!"
다급하게 외치는 그 모습은 나이를 먹어도 일리나는 일리나구나 싶은 느낌을 줄 만큼 똑같았다.
"절대 실험하려 들지 마. 만약에라도 네가 혼란을 줄 목적으로 이 사실들을 들먹이는 순간에는......"
넌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거다.
거짓 없는 한 마디에 레이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비싼 돈 들여서 살려놨으니까 자살 행위를 하지 말라고,"
"세상에...... 그런 걸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보여주는 인간이 어딨어요!"
"있잖아. 여기."
나를 가리키며 장난스레 말한 나는 곧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주도 본래엔 좋은 용도로 만들어진 것들이 반이다. 미안하지만 네 얼굴에 인식 저해 저주를 걸 거다. 내가 살아있는 이상 반영구적으로 유지될 거고."
"저를 일리나로서 보지 않게 된다는 건가요?"
"비슷해. 다만 닮은 사람으로 볼 뿐 동일인물이라곤 판단하지 않을 거다."
이쪽만 대비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이 얼굴로 만들지 않았으면......"
"말이 쉽지. 그리고 네가 뭘 잘못했다고 그 예쁜 얼굴 뜯어고치나."
내 말에 그녀가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이곳의 제가 들었다면 분명 반했을 거예요."
"넌 안 그렇고?"
"글쎄요. 원하신다면 몸이든 마음이든 무엇이든 내어드릴 의향은 있지만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깨끗한 혼은 아니니까요. 솔직히...... 남자는 좀 무섭네요."
"편한 대로 해. 나도 여기저기 일 쳐놓는 건 딱 질색이니까. 일단 눈 감아."
우웅!!
그 말과 동시에 새카만 기류가 일순간 레이나를 감쌌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주변에 굳은 마나를 천천히 해동시켰다.
한번 해동되기 시작한 마나는 곧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일대를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고 곧 굳어있던 일리나와 벨리얼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이비. 이 사람 대체 누구...... 어라?"
그리고 멍하니 있던 일리나는 마치 중간 과정이 삭제된 것처럼 똑같은 말을 내게 반복해왔다.
정확히는 하다가 멈춘 것이지만 말이다.
의아한 얼굴로 레이나를 바라보던 일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분명......"
레이나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일리나 데 팔란과 동일인물로 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조금 닮은 사람으로 볼 뿐이었다.
인식 저해 저주.
레이나에게 사용한 9서클급의 저주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리라.
"왜 그러시죠?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아, 아니에요. 미안해요. 무례했네요. 아, 아니 이게 아니지. 그래! 당신! 당신이 뭐기에 나를 그렇게 판단하는 거죠?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괜히 심술이 난 듯 일리나가 톡 쏘아붙이자 레이나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실언이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황녀님."
미묘하게 울컥해있던 이전 어조와는 다른 덤덤한 어조에 되려 일리나가 당황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니 뭐......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더 할 말은 없어요......."
상대가 꼬리를 내리면 물어뜯는 성질머리를 지닌 나와는 다르게 일리나는 괜한 분란 자체를 좋아하진 않았다.
반대로 레이나의 일이 끝난 이상 내 모든 관심은 저 벨리얼이라는 마족놈에게 가 있었다.
"레이나."
"네."
"저놈의 직위가 어느 정도지?"
"글쎄요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으니까요. 다만 상당히 높은 직급이었던 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생각보다 많이 알겠네."
그리 말한 내가 그를 보며 물었다.
"너희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넘어왔냐."
내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역으로 질문을 던져왔다.
"넘어왔다라...... 인간, 넌 우리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역으로 정보를 내줄 만큼 호구로 보였나?"
대답 대신 침묵을 고수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나를 탐색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은 증오나 미움보다는 경계에 가까웠다.
"나는 어차피 임무에 실패한 실패자일 뿐이다. 내겐 포로로서의 가치는 없다. 비록 나를 죽이지 않고 인도적으로 대해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나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일 뿐이다."
"아깝네. 이쪽으로 왔으면 아주 기가 막히게 정보 빼낼 작정이었는데."
조용한 신경전을 통해 서로를 바라본다.
일리나를 배려하기 위해 벨리얼을 손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포로 이전에 저 인간 여자는 내 생명의 은인과 같다. 비록 적이라곤 하나 은혜와 원수를 분간하지 못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리 말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뜨며 말했다.
"빚은 반드시 갚지."
우직할 정도로 자신의 말만 하고 사라져버리는 그 모습에 나는 가볍게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일리나를 바라보며 손을 뚜두둑 소리 나게 꺾었다.
"뭐, 뭐야?"
"뭐긴 뭐야. 늘 하던 거 해야지."
내 말에 본능적으로 그 하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일리나가 벌떡 일어났다.
스릉!!
동시에 칼디라스까지 뽑아 들고 바들바들 떨며 내게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쉴 새 없이 동공이 떨리는 모습이 퍽 우스울 정도였다.
"그, 그거 꼭 할 필요 없지 않을까?"
"해준대도 난리네. 너 인마 이거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받아."
"그, 그건 아는데!"
"그럼 얌전히 받아 인마."
콱!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나에게 뒤를 잡혀 그대로 제압당한 일리나가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화사한 금발의 황녀님치고는 제법 필사적인 저항이다.
미래의 본인이 과거의 본인을 붙잡고 제압하고 있는 광경은 퍽 진풍경이었다.
물론 과거의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소드마스터에 이른 일리나는 강자였다.
하지만 레이나는 이미 그런 경지를 넘어선 지 꽤 된 용사였고.
내게 소드마스터는 그다지 크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처음만 아플 거야. 금방 기분 좋아져."
일리나 데 팔란이라는 이 소녀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안마 욕구를 샘솟게 하는 기적과도 같은 체질인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전혀 안 해주면서 말이야. 데이비 그대가 해주는 안마의 효능을 알면 아주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찾아올 텐데.
'그건 내가 거절이지. 이 정도로 손맛 좋은 녀석 아니면 해줄 생각도 없고.'
우드득......
"꺄아아악!!!"
처참한 비명소리는 덤이었다.
* * *
"빌어먹을 인간 놈!"
완전히 날아가 버린 거대한 연구실을 보며 백발의 사내 하나가 이를 뿌득 갈았다.
온몸이 타들어 간 것처럼 극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 때문일까 그는 금방이라도 누군가 걸리면 찢어 죽일 것 같은 살기등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계산대로 모든 일은 잘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판도라 영역 쪽에서 수급해온 재료를 이용해 마지막 가공작업을 할 때였다.
연구진들이 무엇을 잘못 건드렸는지 대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엄연히 기폭성 신성폭발이었다.
그 탓에 만들어지던 마왕의 육신에는 어마어마한 손상이 가해졌고, 제물로서 데려간 이들의 절반이 제물로 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증오를 원천 제물로 삼아 마왕의 육신을 완성해야 하는 중요한 작업에서 신성 마법으로 그 증오를 회개시켜버린다는 무식하고도 황당한 발상 자체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뱀파이어들을 분노케 하는 건 그의 의도였다.
손바닥 안이다.
애초에 그는 자신들의 연구나 진행과정을 그저 재료 수급만으로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런 짓은 성공했다.
덕분에 마왕의 부활 자체에 상당한 시간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귀족의 긍지를 보여줄 때가 됐어."
"준비가 되었다면 움직이게."
분노에 찬 뱀파이어들은 더 이상 전쟁을 반대하는 이 없이 모두가 찬성을 내렸고.
그 결단은 곧 오랜 시간 준비되어온 그들의 군단을 움직이게 하였다.
전운이 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다수의 대군을 동원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한 비밀 결사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