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3권 24화
"하아...... 하아......"
잔뜩 풀린 눈과 헐떡이는 숨, 발그레 달아오른 볼에, 입에선 침이 흐를까 말까 하는 걸 보면 상당히 음란한 모습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옷가지는 누가 손댄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진짜 신기한 몸이네."
당장에라도 안마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 신비로운 육신이 아닐 수 없다.
소드마스터나 익스퍼터나 결국 일리나 데 팔란은 변하지 않으니 그대로이리라.
-저리 봬도 육신 스스로의 강화 강도를 따지면 그대의 전생에 있던 기관총으로도 뚫리지 않을걸?
환골탈태란 그런 것이다.
가장 애매한 힘을 지니고 있기에 유일하게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종족인 인간은 환골탈태를 한번 겪으면 육신이 스스로 진화를 겪는다.
부드러운 피부라곤 하지만 마나를 흡수한 육체는 필요할 때에 극도로 단단한 방어구 자체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말없이 단검 하나를 뽑은 뒤 육신을 강화하고 내 손끝을 그어보자......
카가가각......
반사적으로 반응한 몸은 칼에 베이기는커녕 오히려 칼날을 상하게 만들어버렸다.
"거참...... 매번 느끼지만......"
-그대의 경우 육신이 더 이상한 거겠지. 보통 그 정도까진 아니야.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만검불침에 가까운 이런 식의 무식한 육체는 아니다.
-그대, 솔직히 환골탈태는 단 한 번 하지 않았는가, 보통 그 정도로 무식한 육신이 되려면 못해도 서너 번의 환골탈태를 더 겪어야 할 텐데?
"뭐라고 해야 하나......"
이전에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사막에서 살아남았을 때.
유사에 잘못 빠져서 지하로 빨려 들어갔던 적 말이다.
그때 나를 반기고 있던 놈은 다름 아닌 거대 샌드웜으로 입안에 돋아난 이빨은 수천 개에 달하고 강철도 뚫어버리는 악력과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야 아주 죽을뻔했다만.
"그게 또 몇 번 씹히고 나니까 익숙해지더라."
-그게......익숙해지고 싶다고 익숙해질 수 있는 부류는 아닌 거 같은데.
"육체가 계속해서 강화되는 거야. 그때 당시엔 영혼이었으니까. 그 힘이 모조리 내 혼에 새겨지면서 지금 육신에 서서히 적용되고 있는 거고."
전에 말하지 않았냐.
나를 가장 먼저 가르친 건, 다름 아닌 육체파의 무식한 괴물.
생존전문가 헤라클래스라고.
"그 인간은 단순히 인간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나를 시험한 인간이거든."
-그는 실제로 얼마나 단단했기에?
그녀의 질문에 나는 가장 좋은 예시로 회랑에 불었던 종말의 1인자 선발 난투를 예시로 잡았다.
그때만큼 영웅 모두가 미쳐 날뛰었던 적은 없으니 말이다.
"네 아버지가 쓴 바다 가르기를 맨몸으로 막았지. 애초에 그 미치광이 생존전문가는 몸에 방어구나 무기를 들지 않거든."
-세상에......
바다를 가를 정도면 얼마나 큰 검격이 사용된 것인지 모를 수가 없다.
특히 검신의 중검은 속도나 기교가 아닌 파괴력에 중점 된 거합술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런 검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영웅은 사실상 헤라클래스를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아......아아......"
파르르 떨며 경련하는 일리나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나는 미소를 지우고 조용히 말했다.
"들을 사람은 없으니 너 나 좀 보자."
내 말에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벨리얼이었다.
이후 나는 의지를 통해 페르세르크에게 말을 전했다.
'페르세르크. 잠시 일리나 좀 봐줄래?'
-본녀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 보지?
'들어도 상관없는데. 별로 추천은 안 해.'
내 말에 페르세르크는 한참 동안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오두막의 단출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래. 사사건건 본녀가 그대의 곁을 지킬 필요는 없겠지.
"그래."
그리 말한 뒤 나는 오랜만에 그 누구도 듣는 이 없이 벨리얼만 대동하고 걸음을 옮겼다.
벨리얼은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천천히 나를 따라왔고, 나는 일리나가 뻗어있는 오두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할 때 즈음에야 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우웅......
동시에 무영창의 사일런스 장막이 펼쳐졌고 벨리얼은 조금 황당하다는 시선을 숨기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인간."
"굳이 우리 사이에 예의 격식 차릴 거 없잖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마. 네가 여기 온 목적을 명확히 해."
"......"
"그러지 않으면 일리나가 뭐라고 했건 여기서 넌 죽는다."
미소 하나 없는.
주변을 짓누르는 듯한 거대한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벨리얼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는 중상을 입고 힘을 회복 중인 환자였다.
멀쩡한 상태로 싸워도 힘의 격차가 상당한 마당에 지금 상황이면 그가 어찌할 상대가 아니라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
"침묵이라......"
촤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큭?!"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이지?"
빙그레 웃으며 질문을 던지자 그가 한발 물러난다.
지금 내 미소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그를 향해 다시 내가 입을 열었다.
"그 팔, 30분 이내로 다시 안 붙이면 영원히 못 붙인다. 생각 잘해."
"역시 네놈은 미쳤군. 광기가 몸이 아니라 혼을 잠식했다."
생각외의 지적에 나는 제법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하레스가 구현해낸 마족 중 유일하게 내 상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맞추는 놈이 단 하나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러니까.
"섭정 멜프로그였나?"
"......그걸...... 네놈이 어떻게?"
"어쩐지. 멜프로그의 눈이면 내 상태를 알아볼 만하네. 시간이 꽤 흘렀을 테니 후손인가?"
"......"
내 말에 그가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입 다물겠다 이거지."
"미친놈."
"솔직히 아무에게도 한 적 없는 말이긴 한데."
모든 것을 기억하고 천 년 가까이 살아가다 보면 인간의 자아가 멀쩡할 순 없다.
"내가 좀 미치긴 했어."
촤악!!
이윽고 나머지 한쪽 팔도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단순한 기검만으로 그를 몰아붙이는 상황에 다른 이들이 본다면 어처구니가 없어 할만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조용히 물었다.
"네 목적은 뭐냐. 내가 뱀파이어를 아작낼 거라고 말했는데도 권능에 적신호가 안 들어오는 걸 보면 단순히 뱀파이어와 협조해서 여길 난장판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는 아닌 거 같은데."
"이미 측근 참모, 닉스가 죽은 시점에서 내 소용은 다 했다."
"닉스가 네 몸에 새겨놨던 금제? 이미 그놈은 송장이 돼서 소용도 없을 텐데."
내 말에 그가 시선을 피했다.
"눈동자 돌아간다. 정곡 찔렀나?"
"......"
"그럼 뭘까. 딱히 욕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마왕의 부활에는 오히려 조금 부정적이고. 마계의 현 지배자들이 굳이 너를 금제까지 걸어서 보낸 이유를 보면 그놈들과 네가 딱히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힘들고."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어가던 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마안을 가진 멜프로그의 후손이면 영혼도 볼 수 있겠네."
담담하게 말한 나는 곧 흩뿌려진 그의 팔을 마나를 이용해 들어 올렸다.
우웅!!
동시에 내 몸에서 사령 마나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그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신성력을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우웅......
팔이 마치 스스로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고 곧 그 스스로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대체 넌...... 뭘 더 얼마나 알고 있는 거냐."
"대충 감은 잡혔네. 멜프로그는 지독할 정도로 마왕 페르세르크의 신봉자였거든. 그 가풍이 그대로 살아있으면 네가 바라는 건 단순히 마왕의 부활이 아니라. 페르세르크의 안위겠지."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아주 순간적으로 비틀렸다.
"더 말해줄까? 문제는 그렇게 되었을 때, 뱀파이어들이 마왕을 부활시키려 한다고 했을 때 네가 전혀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거야. 오히려 환영하면 환영했겠지."
"망할......"
"그런데도 거부했다. 이유가 뭘까?"
그가 핼쑥해진 표정으로 나를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
"자기 말도 안 듣는 놈이라 해도 유일하게 마왕의 혼을 찾아낼 수 있는 게 너이기에 널 보낸 건데. 넌 잘못된 걸 알아챈 거지. 그렇지?"
내 말에 그가 이를 악물었다.
"뱀파이어...... 뱀파이어들은 마왕 페르세르크님의 혼을 육신에 안착시켜 부활시킨 뒤 자신들의 입맛대로 부리려 들고 있다."
멍청이도 아니고 페르세르크가 평화를 외치던 마왕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잊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녀를 부활시켜야 하는 이유는 그녀만이 마족을 끌어모을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지닌 마왕이라는 뜻이리라.
"그러니까 금제가 풀린 시점에서 넌 딴생각을 품었을 테고. 일리나의 정체를 알자마자 저 녀석의 곁을 지켰다. 왜일까."
지금이라도 그가 도망칠 수 있었다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섬뜩한 내 미소에 그의 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네가 페르세르크의 봉인 위치를 특정하고 있다면 딱 하나밖에 없거든. 신검의 주인인 일리나의 주변 어딘가에 페르세르크의 혼이 봉인되어있을 거라 판단했겠지."
"은혜와 원한은 단순 핑계잖아. 자, 말해봐라.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마왕님의 혼을 찾는다. 내 눈은 혼령이 된 마왕님이 설령 봉인되어있다 해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리하여, 그분을......"
현재 유일하게 남은 순수 혈통 절대자의 혼을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보호한다.
"마왕님의 부활은 바라는 일이지만 그 악랄한 놈들에게 이용당하시게 둘 순 없었다. 그렇기에 인간 여자를 이용했다. 그녀는 내게 동정을 베풀고 있으니까."
인간관계라는 게 참 서로 호형호제하면서도 추악한 면이 많다.
다만 모든 게 잘 풀린 이 시점에서 굳이 이상한 점을 꼽으라면 한 가지를 들 수 있었다.
페르세르크는 혼령의 상태로 계속해서 내 곁에 있었다.
한데, 그는 어째서 페르세르크를 보지 못하였는가이다.
그 이유는.
"너. 시력이 지금 몇이냐."
"......"
"그쪽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면서 제어가 안 되는구만."
내가 마안 자체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과부하는 겪지 않았을까. 그리 판단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내 곁에 페르세르크가 있음에도 성흔으로 한 꺼풀 덮여있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터다.
"이 일은 나 이외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인가."
"말했잖아. 맨정신으로는 못 사는 환경에 있었다고. 미친놈이 되면 보통은 안 보이는 게 보이기도 하는데."
타짜라고 알고 있나?
노름꾼이라는 놈들인데. 그놈들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아주 작은 차이를 보고 사기를 치는 놈들이거든.
"......"
"사람이 생각하는 게 말이다. 가끔 훤히 보여서 일부러 당해줄 때가 많거든. 내가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지켜줄 이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인간은 만들지 못한다.
또한.
'나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기도 하고.'
침묵 끝에 내가 조용히 다시 말을 꺼냈다.
"그냥 찍었는데 제대로 맞았나 보다?"
"제대로 미쳤군. 찍는 게 그 정도 수준이면 마안이 마안이라 불릴 이유가 없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몸에 걸려있던 과부하에 사령 마나를 불어 넣었다.
"너. 마왕 페르세르크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도 되어있나?"
"그걸 내가 왜 인간 네놈에게 말해야 하나."
"네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 내가 무슨 계획을 세울지 말하든 안 하든 각을 잡거든."
주저앉아있는 그의 손을 낚아채며 말했다.
"난 쓸데없는 투자는 어지간하면 안 해. 본래라면 널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게 정상적인 방법이긴 한데, 투자가치가 있으면 살려둬야지."
담담하게 말한 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다른 이 모두가 들어도 단 하나. 내 곁을 계속해서 지켜주던 은발의 전(前) 마왕님만큼은 들어선 안 될 이야기이기도 하다.
뱀파이어의 계획은 이제 와서 막기엔 너무 늦었다.
"너 말이다. 나와 작당 한 번 하자."
"무슨 소리지?"
"너와 내가 가지고 있는 목적 중에 딱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있거든. 어때, 해볼 생각 있나?"
내 물음에 그가 침묵했다.
"대신 대가가 필요하겠지."
눈치 빠른 그는 내 광기가 스며든 미소 속에서 무언가를 찾은 듯 보였다.
"그래. 대가가 좀 필요해."
"무엇인가."
그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가장 중요한 대가를 말해주었다.
그것은 단 한 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