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4화
-그…… 그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휘적휘적 걸어가는 뱀파이어가 한둘을 넘어 수십, 수백에 이른다.
이 지독한 상황은 마치 대규모 좀비 마법에 테러를 당한 것 같은 끔찍한 상황이었다.
아니, 지능이 거의 없어지고 빛에 약하며 느린 좀비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뱀파이어에서 좀비로 변한 이 명칭이 애매한 괴물은 뱀파이어만을 노리는 뱀파이어의 변이체로 지능은 낮을지 모르나 전혀 느리지 않았다.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내구력 또한 일반 좀비와는 달랐다.
모체가 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당에 뱀파이어에게만 증상이 발현되고 뱀파이어만 노리니 그들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꼬인 것인가.
하급 뱀파이어는 말할 것도 없고, 오랜 시간 치료하지 않고 물린 상처를 방치하면 중위급 뱀파이어마저 모조리 변이해버렸다.
한번 변이한 뱀파이어는 다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머리통이 날아가 버리지 않는 한 닥치는 대로 근처의 뱀파이어를 찾아 덤벼들기를 반복했다.
뱀파이어 뿐만이 아니었다.
뱀파이어의 혈기에 잠식된 혈마수 또한 같이 좀비화가 진행되니 그야말로 뱀파이어의 본대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병력을 잃은 꼴이었다.
뱀파이어들의 입장에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혈기를 이용해 인간이나 동물, 몬스터를 잠식해 버린 적은 있지만,
이렇게 역으로 좀비화가 되어 좀 전까지 동료였던 뱀파이어가 갑자기 자신의 목을 물어뜯는 사태는 도저히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부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 판단하지 못했던 뱀파이어들은 당연히 이번 사태에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결과는 순식간에 드러났다.
“한 놈도 남기지 마세요!”
콰앙!!!
하늘을 수놓는 거대한 쇠창이 폭발하며 수백 개의 금속 화살이 되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상위 뱀파이어이지 잡병에 불과한 하위 혈마수나 중위급 뱀파이어들은 이런 공격에 지속적으로 노출될수록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고 괴기스러운 좀비 사태에 이어 연합군의 공세가 사방에서 시작되자 아무리 단단히 준비해온 뱀파이어라 해도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연전연승 소식이 들려오자 연합군 측은 그야말로 축제 그 자체의 분위기였다.
의심스러웠던 레이나의 지휘 실력은 새삼 놀라울 정도로 날카롭고 과감했다.
한번 한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뱀파이어들이 장악해둔 요새들이 무너져 내리며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데에 더욱 박차를 가해 나갔다.
반대로 나의 경우 대놓고 탈영해버린 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유히 향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위치는?”
“이곳이다.”
내 앞을 막아선 사내는 품 안에서 꺼낸 작은 서신을 내게 건네주었다.
“후회는 없고?”
“마왕께 바친 목숨이다. 그분을 위해 움직일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영광은 없다.”
망설임 없이 답하고 돌아서는 그 모습에 페르세르크는 조금 의아한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저 남자가 그대를 이토록 도와주는 게야?
페르세르크는 그와 나의 대화를 듣지 못했기에 전말을 모르는 듯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벨리얼과 나는 같은 한 가지를 위해 손을 잡은 상태였다.
적대관계인 마족과 인간이 서로 손을 잡고 있다니 퍽 웃긴 노릇이지만 무슨 상관이랴.
저들끼리 증오에 휩싸여서 전쟁을 벌인 마족놈들의 생각대로 흘러가 줄 의리 따윈 애초에 내게 없었다.
“지금 현재 이쪽 본진의 상태를 말해주겠다.”
“그래.”
담담한 내 답변에 그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인공마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상위 마족은 많아야 둘이다. 그곳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게 쉽지도 않고 성공 가능성도 상당히 낮았으니까.”
블랙 드래곤인 가르가스
그리고 죄인이자 흑의 종군으로서 이곳으로 온 벨리얼.
“하위 마족은 큰 제약 없이 넘어올 수 있었지만, 일정 힘 이상을 지닌 존재가 온전히 넘어오기엔 제약이 심하다. 그 탓에 현재 뱀파이어와 함께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대공 아스타로트는 본체가 아닌 분신체라고 봐도 무방할 거다.”
그 외에는 하위 마족이라도 넘어오면 힘의 제약을 일정 받는다는 게 현실이었다.
본래라면 리치 닉스의 힘을 이용해 한번 벌어진 틈을 더욱 크게 벌려 대부분의 마족을 넘어오게 할 생각이었던 그들이지만 나와 레이나로 인해 닉스가 그대로 사멸해버리면서 계획이 틀어진 바 있었다.
“이제 이쪽에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널 최대한 견제하면서 마왕님을 부활시킨다. 마왕님의 힘이라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족 대부분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가능하거니와 그 힘을 이용해 너를 제거할 방법도 모색해 볼 수 있을 테니.”
그들에게 페르세르크라는 마왕은 자신들의 오랜 전설이며 절대적으로 자신들을 이끌어줄 존재일 테니 말이다.
반면 대공 아스타로트와 뱀파이어들은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혹여 페르세르크가 그들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내놓을 시 그녀를 조종할 방법까지도 계산해뒀다는 게 현 실정이었다.
-애초에 그대가 능력이 부족했다면 그대로 쓸려갈 법한 계략이긴 하지.
문제는 저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엄연히 핵 프로그램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그 외엔?”
“뱀파이어들이 오랜 시간 준비해온 병기들이 있다. 예상되는 바론 키메라 정도로 예측된다만……”
“그건 별문제 없고.”
“그 외에 단 한 명.”
짧게 말을 끊은 그가 위험하게 눈을 빛냈다.
“지금 이곳엔 없지만, 곧 참전할 이가 하나 있다. 겉보기엔 멀쩡한 마족이지만 그 내부에 이상한 힘을 품고 있는 꺼림칙한 자다. 그는 다른 마족과 생각을 다르게 품고 있는 듯 보여서 해주는 경고다.”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힘?”
“심연이라고 하였다. 그의 힘으로 인해 우리 마족이 다시 이 땅으로 넘어온 게 사실이니까.”
“……없지는 않겠지.”
그의 정보에 나는 아공간에서 작은 환단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각성제다. 당분간 버틸 수 있을 거다.”
“……”
내 말에 환단을 망설임 없이 씹어 삼킨 그가 조용히 힘을 끌어올렸다.
“의식이 시작되면 그때 다시 연락하지.”
“조만간 보게 될 거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사라졌다.
이후 나 또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 *
계속되는 승리로 연합군 본진 내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고조의 사기를 지니고 있었다.
“흠흠…… 역시 나는 운이 좋아.”
코른 왕국의 공작가 출신인 베르앙은 자신의 운에 새삼 즐거워하고 있었다.
“도련님. 곧 출정을 한다는 소식입니다.”
이윽고 그가 있는 천막 안으로 기사 하나가 들어와 정중하게 말하고 사라지자 그는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출정이란 말이지, 그래. 공로를 세울 기회를 놓칠 수야 있나.”
담담하게 말한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무기만 챙겨 든 채 막사를 벗어났다.
본래 그가 아닌 그의 형이 대신 참전하여 이곳에 있었어야 했지만, 베르앙은 욕심이 많았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해 공로를 차지하여 집안에서 인정을 받겠다는 욕심이 가득했다.
그 탓에 그는 자신의 심복을 이용해 이번에 참전할 인물을 형이 아닌 자신으로 바꿔치기하기에 이르렀다.
형은 어엿한 기사단원으로서 충분히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있지만 베르앙은 아직 치기 어린 풋내기일 뿐이었다.
수백의 병사를 이끌고 코른왕국을 대표해 참전한 그는 그래도 기가 막히게 운 하나만큼은 좋은 사내였다.
싸움에서 져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운이 좋아 적의 검이 빗겨져 나간 것을 틈 삼아 도망치거나 반격에 성공하길 몇 번이던가.
이 정도면 거의 천운이 따라붙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운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나는 신께서 사랑하는 몸일지도 모르지.’
신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두 성녀 후보처럼, 혹은 지금 대륙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성자 데이비 올 라운왕자처럼, 어쩌면 자신은 아직 드러난 것은 없지만, 앞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 그였다.
그만큼 말도 안 될 정도로 전쟁 운이 좋았으니 말이다.
신의 사랑을 받는다.
즉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솔직한 심정으로 데이비 왕자를 필두로 한 사제단의 버프와 회복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버프 한 번에 다 죽어가던 병사가 벌떡 일어나 그 기괴한 괴물들을 상대로 초인 같은 힘을 보이지 않았던가.
대륙을 위협하니 인류의 존망에 위협이 되니 뭐니 했지만 베르앙의 시선에서 뱀파이어는 그저 그런 적일 뿐이었다.
실제로 이후 데이비 왕자가 탈영해버리고 버프 마법이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연전연승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뱀파이어는 한참 못 미치지만 다른 이들에겐 이런 뱀파이어 자체도 굉장히 위험한 존재로 비치는 게 아닐까.
실제로 놈들과 싸울 때 자신의 검은 마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적들을 집요하고 날카롭게 베어 넘겼었다.
이에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대기 하는 말에 오르려던 베르앙은 문득 천막에서 빠져나와 있는 한 여성을 바라볼 수 있었다.
결혼적령기의 나이는 지났지만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아니 아름답다 못해 신성할 정도였다.
저 외모에 대륙 6대 미녀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하늘빛 머리카락을 곱게 땋은 여성은 그녀의 무기이자 용사의 상징인 신창을 품에 안은 채 조심스레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
하던 것도 멈춘 채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시선을 빼앗겼고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영민했고, 강했으며, 빠르고 신성했다.
그녀는 베르앙에게 있어서 여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용사 레이나.
성자와 대륙 3 황제가 보증한 그녀의 존재는 비록 평민이었으나 이제는 평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전쟁이 이대로 승리만 한다면 그녀에게 내려질 직위는 못해도 백작위 이상급이 될 것이다.
아마 수많은 남자가 그녀의 외모를 보고 반해 구혼을 신청할 것이다.
소드마스터는 일평생 거의 늙지 않는다.
저 용사 레이나는 오러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었으니 아마 소드마스터 이상급의 실력자이리라.
그녀와 결혼한다는 뜻인즉슨.
저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평생토록 유지할 여성을 평생 소유할 수 있다는 뜻과 같았다.
“쓰읍……”
말없이 어디론 가로 걸어가는 용사 레이나의 뒷모습을 조용히 뒤따라갔다. 그리고 베르앙은 단조롭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그녀에게 말을 걸 기회를 엿보기 위해 점차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금 그 유명한 성자 데이비 왕자는 성흔을 얻기 전엔 유약하고 힘없으며 다 죽어가던 평범하고 이름 없던 왕자일 뿐이었다고 들었다.
‘음, 그래. 그녀 정도면 나의 배필로 충분하지. 비록 지금 내가 이렇다 할 공로를 세우진 못했지만. 앞으로 많은 공을 세우고 주신께서 나를 제대로 봐주시어 성자 데이비 왕자와 같은 힘을 내려주시기만 한다면……’
대륙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엄청난 인물이 되는 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아니 정확히는 성자 데이비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 자신감의 근거는.
엄연히 전쟁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지독할 정도로 좋은 운과 과히 맹신하고 있는 자신의 검술 실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