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5화
109. 검은 날개를 지닌 폭설
철컹!!!
거대한 검은 비늘을 구속하고 있던 금속 구속구가 일순간 풀려난다.
-그르르르르……
동시에 백여 미터는 될법한 거대한 크기를 지닌 생물체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새카만 비늘 너머로 보이는 황색의 눈동자의 피막이 걷히며 세로로 찢어진 섬뜩한 눈동자가 번뜩였다.
블랙 드래곤 가르가스.
현명한 드래곤이었으나 오랜 시간 마족들의 손에 세뇌당해 타락해버린 드래곤이다.
드래곤의 수명은 천 년 단위로 어지간한 시간이 흘러도 쉽게 죽지 않는 탓에 개개인이 엄청난 힘을 품고 있는 생명체이기도 했다.
강력한 드래곤의 출몰 자체는 이미 대륙에 알려져 있었다.
솔브란 왕국을 포함한 두 국가를 단번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이 괴물이었으니 말이다.
“가라. 데이비 올 라운 그 인간의 소재가 불분명한 것이 걸리긴 하지만 적어도 놈이 본진에 없다면 그때를 이용하는 게 최적기다.”
이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불완전한 이동으로 인해 이성을 잃어버린 드래곤은 대공 아스타로트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하고 흉폭했다.
아스타로트의 말에 거칠게 몸을 움직이던 드래곤이 천천히 시야를 돌렸다.
그리고는 황색이 시야에 아스타로트를 담았다가 낮게 그그렁거렸다.
그 흉폭한 기세에 아스타로트의 표정이 잠시 창백하게 변했다.
하지만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말없이 아스타로트를 보던 블랙 드래곤 가르가스가 천천히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더니 곧이어 어디론 가로 날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끄응…… 빌어먹을 도마뱀놈 썩어도 드래곤이라고 저항력이 어마어마하군.”
이성이 있었으면 생각도 못 했을 제어방법이지만 이성을 잃은 지금은 아스타로트가 이렇게 놈을 제어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약해졌다고?
그래 봐야 기준점 이상의 재앙 덩어리일 뿐이다.
블랙 드래곤 가르가스는 원래 아스타로트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의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에게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다면 이곳에는 블랙 드래곤 가르가스가 있다.
누가 이기건 결코 남은 한쪽 또한 멀쩡하게 싸움이 끝나진 못할 것이다.
거대한 존재감을 흩뿌리며 날아가는 드래곤의 뒷모습을 보며 대공 아스타로트는 연합군 본대를 이끌고 있던 상위 뱀파이어인 글러트니에게 말했다.
“그 기괴한 바이러스는?”
“해결책을 마련 중입니다. 그 전까지는 감염된 자들을 모조리 격리하면서 제압해 나가고 있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상위 병력을 모두 투입해라. 이번 전면전에 모든 사활을 걸어야 우리에게 활로가 생긴다. 적어도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겠지.”
그 말에 귀족의 자존심이 뭉개진 글러트니의 표정이 조용히 찌푸려졌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스타로트는 강자였고, 뱀파이어의 동맹군이며, 갑의 위치에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아스타로트의 힘이 없었다면 자신들의 종족은 불완전한 로드의 아래에서 복수도 잊은 채 계속해서 숨어 살아야 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거대한 빙설을 만들어내며 창공 높이 날아오르는 블랙 드래곤을 조용히 보던 아스타로트는 자신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전쟁의 승패가 어찌 되었건 결국 승리는 우리가 할 거다. 네놈이 어디까지 알고 있건 마왕님의 부활을 고작 그 정도의 테러로 막을 수 있을 거로 생각지 마라.”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 * *
레이나는 좀 전부터 자신을 따라오는 기묘한 느낌의 소년 때문에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전쟁터에 젊은 귀족가 영식이나 왕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연합군이다 보니 수많은 국가의 인간들이 모이는 게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저 소년은 다른 이들과 다르게 조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코른 왕국을 대표해서 선발대로 병사를 이끌고 찾아온 소년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직 철이 없는 어린아이와 같았기에 도대체 코른 왕국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어린 소년에게 병사를 쥐여주고 이곳으로 보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없이 자신을 따라오는 그 행동을 무시한 채 레이나는 요새의 망루 위로 올라가 말없이 상황을 두루두루 살폈다.
전쟁의 승패는 얼마나 더 많은 패를 숨기고 꺼내놓을 수 있는가에 따라 걸려있다.
지금까지 서로 불균형하던 싸움을 균형에 맞게 만들어왔다.
하지만 저들이 또 뭔가를 숨기고 있다면 그에 따른 대처가 필요했다.
자신을 되살려준 데이비라는 사람은 자신을 상당히 믿어주었다.
그 믿음에 보답하고자 그의 곁에서 그의 검과 손을 자처한 시점에서 레이나는 절대 데이비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망루에서 내려와 특유의 차가운 시선으로 고개를 돌린 레이나는 좀 전부터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베르앙이라는 소년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 때문일까.
자신이 들키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던 베르앙은 뜻밖의 목소리에 당황한 듯 과하게 헛기침을 하며 억지로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어흠! 어흠! 별거 아닙니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사색에 잠겨 계신 것을 발견하고.”
과하게 어색한 말투를 쓰며 다가온 소년이 시선을 돌렸다.
“코른왕국의 베르앙님이 걱정할 문제는 아닙니다만. 총사령관으로서 추태를 보였네요. 용서하시길.”
짧게 일축한 그녀는 다시 따라다니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베르앙은 이번이 기회라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이런, 나를 기억해주실 줄 몰랐습니다. 용사 레이나양.”
부드러운 어조에 호감 가는 미소를 띠며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레이나의 생각을 그는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 저는 총사령관입니다. 개인적인 호칭은 자제해 주세요.”
“아…… 이런 미안하오. 어흠! 어흠!”
무안한지 떨떠름하게 답한 그가 조심스레 레이나의 시선을 살폈다.
그리고는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이고는 조용히 물었다.
“왜 그리 복잡한 표정이십니까?”
“별거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거 같습니다만. 혹시 고민거리라도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저 베르앙, 비록 나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신의 사랑을 받는 몸으로써 도와드릴 일은 도와드리겠습니다.”
신의 사랑?
이건 또 뭔 개 풀 뜯는 소리냐는 심정으로 레이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신의 사랑이요?”
“아아, 그게 말이오. 다른 이들에겐 말하지 않았소만……, 사실 프리아 여신께서 내게 축복을 내려주신 것 같소.”
그 말에 레이나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동시에 그녀의 몸 안으로 은은한 신성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신성력으로 확인해봐도 딱히 이렇다 할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별로 그래 보이진 않는데요.”
“흠흠. 들어보시오. 내가 말이오. 전쟁터에서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될 정도로 운이 좋단 말이오. 몇 번이고 운이 좋게 목숨이 위험한 상황을 넘기면서 느꼈소이다. 그냥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신께서 나를 편애하시고 축복을 내려주신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가 없진 않소?”
그 말에 레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별 미친놈이 다 있다더니…….
조금 기묘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신의 사랑이라곤 여겨지지 않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곧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조용히 경고하려 했다.
“신기한 놈이네.”
느긋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누, 누구요!”
깜짝 놀란 베르앙이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돌렸다.
레이나 또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며칠 전 탈영했다고 부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소문의 주인공이 느긋하게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데이비님.”
“별문제 없었습니까?”
일단 공적인 자리라 존대를 하는 것일까.
레이나는 내심 기쁘면서도 씁쓸한 느낌을 숨긴 체 조심스레 말했다.
“덕분에요.”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데이비의 모습에 레이나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던 베르앙의 얼굴에 조금 당혹스러움이 크게 어린 듯 보였지만 레이나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데이비에겐 달랐던 모양이었다.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요?”
“아…… 아아! 그렇소! 내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당당하게 말하는 소년의 모습을 데이비가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후회할 텐데.”
“예?”
황당한 소년의 물음에 데이비는 고개만 저어 보일 뿐이었다.
“준비하세요. 곧 블랙 드래곤이 움직일 겁니다. 잊지 않았을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좀 전까지의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킬 한마디가 그 입에서 터져 나왔다.
“……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죠.”
어떻게 잊을까.
블랙 드래곤은 아니었으나 사룡에 의해 그녀는 마족의 기지에서 탈출하며 얼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었다.
일생의 원수나 다름없었던 용족을 향해 그녀의 눈에서 조용하고 뜨거운 분노가 들끓었다.
“밑밥은 내가 깔아놓고 왔으니까 당신은 그냥 그놈을 쳐 죽이면 돼.”
이어지는 그 말에 레이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데이비가 하는 짓을 이해하기엔 어려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세상의 섭리에 어긋나 사라졌던 자신을 한 달 만에 부활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수많은 병력을 앞세운 채 말에 올라있던 일리나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비는 이미 다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말이 탈영이지 그는 이곳에도 몇 가지 마법을 설치해둔 뒤 다시 떠나버렸다.
그가 하려는 행동이 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말로는 이용한다, 죽도록 둔다, 뭐 다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단 한 명도 죽지 않게 하려고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어쩌면 그건 그만의 티가 나지 않는 선행이 아니었을까 싶은 레이나였다.
“적들은 현재 내부의 문제로 기습에 취약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들의 수가 적은 건 아니에요. 지금도 계속해서 적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만큼 지금이 아니면 승기를 잡을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짧게 연설한 그녀가 창을 높게 들어 올렸다.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죠. 전군, 돌격.”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돌격을 명하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뱀파이어의 진형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들의 움직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나며 길이가 무려 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너무 빨랐다.
전쟁 도중에 나타날 거라곤 예상했지만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나타난 것일까. 레이나는 자신과 데이비가 예상착오를 일으켰다고 판단하고 다시금 병력을 후퇴시키려 했다.
병사들도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난 거룡에 겁을 먹은 듯 그대로 굳어버린 모습이었다.
“뭐해. 들이박아.”
그때, 그녀의 귓가에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래곤 때려잡는 용사 역할 제대로 수행해. 밑 작업은 내가 한다.”
조용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만 울려 퍼졌다.
“따라 해. 레이나.”
[신께 간청하오니 저 사악한 악룡을 구속할 힘을 내려주소서.]
“시, 신께 간청하오니 저 사악한 악룡을 구속할 힘을 내려주소서!!”
미묘하게 부끄러운 대사라 얼굴이 붉어진 레이나가 급히 한 손을 들고 소리쳤다. 그러자 하늘에서 거대한 금빛의 사슬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며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던 흑룡의 전신을 구속했다.
“그, 금빛 사슬이!”
놀란 병사들의 외침을 무시한 채 레이나는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 읊었다.
[신께 간청하오니, 이 어린양의 앞길에 마가 낄지라도, 할부금 꼭 갚을게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따라 한다.
쿠웅.
동시에.
조금 이상한 기도문과 다르게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순백의 운석 수십 발의 포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