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6화
거대한 드래곤에 주춤했던 병사들은 곧 하늘에서 쏟아지는 사슬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뒤이어 조용히 기도를 읊고 한 손으로 거대한 광원을 일으켜내는 레이나의 마법에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순 운석 낙하 마법보다는 평균적으로 숫자도 적고 크기도 작은 편이라 볼 수 있다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하늘에서……”
“오…… 신이시여……”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백의 운석들을 본 이들은 병사는 물론이고 뱀파이어 진형의 적들까지도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몇몇은 신성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놀란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앙!!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슬에 전신을 구속당한 블랙 드래곤 가르가스는 이성을 잃어가면서도 분노어린 괴성을 터뜨리며 그곳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촤르르르릉!! 캉!!!
그 격렬한 움직임에 수십 가닥의 사슬 중 일부가 거침없이 뜯겨 나갔지만, 나머지 사슬이 더욱 튼튼하게 놈을 옭아매며 지상에 고정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쿵!!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소형 백색의 운석이 하나둘 놈에게 빠르게 접근하며 낙하했다.
고서나 동화에서는 용의 비늘, 즉 드래곤 스케일에 대한 것이 상당히 두루뭉술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다만, 회랑의 영웅들은 내게 나 자신 이외에 적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주로 남겼다.
-드래곤이라…… 정말 오랜만이로고…….
“드래곤 많이 봤나 보다?”
“소수 정도는…… 본녀도 사실 많이 알지는 못하지.
전쟁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같이 지켜보던 내게 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
-가르가스는 아버지 뒤에서 돕던 드래곤이었어. 본녀가 죽고 마족이 몰락하면서 아마 이곳을 떠났을 테고, 그 이후 저런 꼴이 된 거겠지.
씁쓸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였다.
-데이비, 잊지 마라. 그대는 운명의 흐름을 보는 것이지 멋대로 조종하는 게 아니야. 큰 흐름은 결국 그대로 흘러가게 되어있어. 그대가 대적자가 되는 것도.
애초에 내가 살아있는 한 대적자는 다른 이가 될 수 없다.
도저히 대처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마왕 또한 그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다 잘 풀릴 일이야. 본녀 하나만 그대의 손에 죽으면 심연도 더 이상 이곳을 간섭할 이유가 없어질 테고 흐름이 뒤틀릴 일도 없을 테지. 그로 인해 그대가 신의 심판을 받을 일도…….
“좀 다물어.”
싸늘하게 말하며 그녀를 낚아채 주머니 속에 밀어 넣어버린 나는 담담하게 블랙 드래곤 가르가스를 보고 씨익 웃어 보였다.
“흐름을 피할 수 없다고? 거 명언이네.”
드래곤 스케일(비늘)은 대 마법 장벽이 스며든 영고의 보물로 알려져 있다.
역린을 제외한 모든 비늘은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드래곤의 최대 마법인 9서클의 방어마법이 걸려있기에 7서클까지의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일화 또한 존재한다.
가르가스는 타락한 드래곤으로 마법 방어력은 끽해야 고작 5서클 정도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법의 종주이자 중형 웜급 드래곤 이상의 가르가스가 9서클 마법에 무너지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직접 나서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생각은 신중하고.
행동은 과감하게.
가르가스가 이성과 제힘을 모두 되찾기 전에, 킬각이 잡혔으면 냉큼 잡아야 하는 법이다.
-크아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순백의 메테오는 정확히 비늘을 노리고 충돌하며 입자 단위로 분해되어 놈의 비늘을 사정없이 헤집어 놓았다.
[당신이 한 건가요? 정말 볼 때마다 말도 안 되는 힘이네요…….]
기겁한 레이나의 중얼거림엔 놀라움보다는 새삼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애초에 그녀와 페르세르크는 내가 이전 닉스와의 교전에서 어떤 괴물딱지인지 정확하게 보여준 바 있었다.
단순 9서클 흑마법사를 마나의 기류만으로 찍어누른 시점에서 새삼스레 놀라울 것도 없다.
다만 그녀가 한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신성 마법의 숙련도는 내 것을 사용한 것이 맞지만.
정확히 말해서 신성력의 대부분은 내 것이 아닌.
“네 힘이다. 뭐, 죽자고 한 50년만 노력해봐. 8위계 까지는 쓸 수 있을 거다.”
하드웨어는 최신형인데 소프트웨어가 조금 구형이라는 단점뿐이다.
그녀는 주신 프리아의 힘을 받아 재탄생한 세상에서 유일한 천족.
그녀가 모르게 품고 있는 신성력의 양은 실상 지금껏 기도 한번 제대로 하지 않은 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방대했다.
쿵!! 쿵!!
백색의 운석은 마나가 아닌 신성력으로 만들어낸 응집체 덩어리.
그런 만큼 가르가스의 속성은 마족이 아니라 신을 배덕한 뱀파이어에 가깝다.
그러니 타락한 마룡에겐 치명적인 위력을 지닐 수밖에.
[윽……, 이상하게 힘이 빠지는 기분인데요.]
“내가 해준 건 신성 마법의 구현 정도지 원료 자체는 거의 다 네 거다.”
정확히 내가 한 것은 숙련의 보조가 전부였다.
신성 마법의 스승 다프네는 나와의 대련에서 자신의 신성력을 쓰지 않고 내 것을 대뜸 빼앗아 공격을 가하는 방식을 자주 사용하곤 했다.
생전에는 그런 무식한 짓을 하지 못했던 그녀였지만 회랑에서의 오랜 삶은 한 성녀를 괴물로 만들기 충분했다.
자기 신성력도 아니고 남의 신성력의 코드와 구조를 파악하고 강탈하여 사용한 것도 억울한데, 마치 놀리듯 가볍게 발을 땅에 구르는 것만으로 제압당했다는 사실은 절대 잊히지 않으리라.
단순 짓밟기로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되냐고?
그녀의 행동과 연동되듯 하늘에서 수백 미터에 달하는 새하얀 발이 나를 짓밟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하하하! 우리 신님의 드롭킥이다. 이 xx한 x끼야!]
언제부터 드롭킥이 사람을 쥐포로 만들고 짓밟은 것인지 꼭 물어보고 싶었더랬다.
그 거대하고 무식한 공격에 개미마냥 짓밟혀 쥐포처럼 처박혔을 때의 그 기분은 분명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굴욕감을 선사하기엔 충분한 경험이었다.
당연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나도 써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법이다.
그때의 대련 이후 나는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결국, 그 방식을 터득하는 데에 성공한 전적이 없잖아 존재했다.
[제 신성력이요? 제 몸에…… 후우…… 신성력이 있었나요?]
“잊었나 본데, 너 인간 아니야 인마, 천족이야. 천족. 신의 하수인.”
[저는 당신의 검입니다.]
첫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 없이 그녀가 완전하게 부활하는 데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지금부터 전력을 쏟아부어서 가르가스를 제압해. 전쟁 자체의 흐름은 내게 맡기고.”
[네.]
미련 없이 전장의 상황에서 눈을 돌린 내가 언제 다가왔는지 조용히 서 있는 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고생 많았다.”
“너무 많은 생명이 사그라졌어요.”
그 한마디 속에는 작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불씨가 수많은 희망을 앗아가는 건 여전하네요.”
아무리 압승하는 진영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곳에 희생자가 단 하나도 없을 순 없다.
용사 레이나와 내가 보조하고 적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처럼 좀비 사태를 겪고 있다 한들, 전쟁은 전쟁이다.
살아남은 놈들은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다가오는 적들과 싸우는 건 당연했다.
당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이 죽었다.
에밀리아를 필두로 한 숲의 연합, 즉 엘프와 님프, 그리고 엔트족의 연합군 또한 뱀파이어들이 여기저기로 공세를 뻗어 나가자 그들을 차단하고 매복하는 전쟁을 치러왔다.
이미 이곳까지 오는 데에 숲의 연합군 또한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최대한 안전하고 빠르게 끝내야지.”
전쟁은 잔인할수록 빨리 끝나게 된다.
“지금이다. 이대로 달려서 측면을 쳐. 레이나가 가르가스를 묶어두고 있을 때가 저놈들 깡그리 몰살해버릴 기회다.”
내 말에 에밀리아가 조심스레 머리에 쓴 관을 풀어냈다.
그리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남은 이들이 있잖아요.”
얼마나 될지 모르는 상위 뱀파이어들.
하나같이 소드마스터급이거나 그 이상급의 힘을 품고 있는 놈들로 상대적으로 강한 존재가 많은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심연의 힘으로 강화된 존재들이 득시글거린다고 판단할 수 있다.
적어도 뱀파이어를 겨냥한 좀비 바이러스를 저항해낸 놈들은 직접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대로 밀고 나간다. 딴 생각하지 말고 오합지졸만 정리해.”
“…… 몸조심하세요.”
“걱정 고맙다.”
빙그레 웃자 에밀리아가 쓰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그녀가 타고 온 페어리 엘크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은 뒤 그 위에 올라탔다.
“모두 지금까지 잘 따라와 주었어요. 적들이 혼란스러운 지금, 이곳에서 저 블랙 드래곤을 처리하지 못하면 앞으로 더 많은 분이 희생당할 거에요…….”
비록 인간과 협력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주세요.
조용히 말한 에밀리아가 작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를 따르는 엘프 정령사와 궁수들은 대부분 이전 세계수 때부터 존재해온 이들이다. 그런 만큼 인간에 크게 좋은 감정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전대의 세계수인 알과 그녀를 모시는 신녀인 에밀리아에겐 놀라울 정도의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절도있는 자세로 빠르게 이동하는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이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 곳곳에서 전해져오는 신호들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는 그중에서 가장 크게 변동을 주고 있는 신호를 향해 몸을 틀며 아공간에 손을 밀어 넣었다.
저쪽이 제 일을 해준다면.
이쪽은 이쪽이 할 일을 할 때다.
나는 신성력을 내뿜기 시작하며 블랙 드래곤 가르가스를 몰아붙이고 있는 레이나를 향해 천천히 남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내 손끝으로 물방울들이 모여들며 아름다운 여성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계약자.]
“뭔가 어수선해 보이는데.”
[…… 별것 아니에요. 무슨 일이죠?]
“저기 저놈 보여?”
내가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키자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바닥에 묶인 채 무력화되어 이성을 잃은 머저리 드래곤 가르가스의 모습에 엘라임의 표정은 조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용족이군요……. 그것도 웜급 이상. 하지만 그 힘은 본래의 반은커녕 3분의 1도 내지 못하고 있어요.]
“가서 인간을 도와서 저놈을 처리해줘.”
[알겠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가장 높은 바위 턱에 올라섰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말이다.
나를 제외하고 대륙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이기어검을 쓸 정도로 검술 실력이 좋고 대량의 신성력을 보유한 천족, 물의 정령왕. 두 마리의 신수가 덤벼드는데 저깟 아종 드래곤만도 못한 놈과 싸워서 지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드래곤족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브레스와 마법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웜급 드래곤의 수준보다는 한 참 못 미치는 약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성을 잃은 놈들이 마법 또한 쓰지 못하니.
결국, 튼튼하고 힘센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이윽고 아공간에서 거대한 장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주머니 속에 있던 페르세르크가 작게 중얼거려왔다.
-초월의 종언이면 다 끝날 것을.
“그놈의 마법 성애자 같으니.”
혀를 짧게 찬 뒤 나는 손에 쥐어진 장궁을 가볍게 두드렸고 이내 활의 양 끝에 바람이 머금어지기 시작하자 미련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
그리고는 시험 삼아 정확히 가르가스가 있는 곳을 겨누고 지금껏 준비해온 힘을 응축시키기 시작했다.
물리 재료가 아닌 마나로 만들어진 고농축의 화살이 빛을 환하게 흩뿌리기 시작하자 나는 미련 없이 한쪽 눈을 감고 부드럽게 활시위를 비틀었다.
[거리, 1200]
[속성 마(魔)]
내 전생은 활의 민족 출신이다.
내가 활 실력이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성적이 제법 우수했던 분야이기도 했다.
어디 활로 쏘는 수십 킬로미터 단위의 저격 맛 좀 봐라.
[대 강사]
[광충룡포]
“날개 하나만 떼주마.”
[네?]
레이나의 의문 어린 목소리를 상큼하게 개무시하며 나는 그대로 활시위를 놓았고.
거리가 수 킬로미터나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섬광은 공간마저 찢어발기며 날아들어 가르가스의 거대한 두 쌍 날개 중 한 짝을 완전히 찢어버렸다.
“다음 놈은 저쪽인가?”
가르가스도 가르가스지만 상위 뱀파이어들이 슬슬 전쟁을 교란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쪽은 저쪽대로 사활을 걸었을 테니 아마 지금까지 숨어있던 대부분의 상위 뱀파이어란 뱀파이어는 다 튀어나올 것이다.
괜히 내가 높은 곳에서 신선놀음하고 있던 게 아니다 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