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8화
110. 단 한 명을 위한 함정
“끄윽……”
“우, 우르가님?!”
기겁한 뱀파이어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나보다 80센티는 더 커 보이는 사내의 등에서 천천히 뛰어내렸다.
“키가 좀 더 커야 하나. 모양 빠지게.”
-180이 작은 키는 아니야. 데이비.
“그냥 해본 소리야.”
쿵!!!
반응조차 하지 못하도록 내가 놈의 숨통을 끊어버리자 뱀파이어들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괴물이라고? 내 시선에선 니들이 더 괴물인데.”
키도 크고.
이빨도 날카롭고.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송곳니 부분을 강조하자 그들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어떻게 기척도 없이……”
퍼엉!!
말이 끝나기도 전 나는 이미 그들을 지나치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최대한 날뛰어주라.”
이 계획의 가장 중요점은 바로 시간이다.
그 시간을 맞추냐 못 맞추냐에 계획이 뒤틀어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최대의 도박이라 봐도 무방했다.
“륀느, 매뉴얼대로만 해라.”
짧게 중얼거린 나는 곧 걸음을 옮기려다 멈췄다.
내 발밑으로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새빨간 혈액들이 마치 구속구처럼 내 발을 묶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억…… 크윽! 감히…… 나를 두고 어딜 가는 것이냐.”
숨을 헐떡이며 일어난 거구의 사내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나는 고개만 슬쩍 돌린 채 페르세르크에게 속삭였다.
“쟤 더럽게 질척거리지 않냐?”
-구질구질한 게야? 쿡쿡…….
페르세르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내 말만 듣고도 충분히 도발되었던 모양이었다.
발을 구속하던 혈액의 압박이 서서히 강해지며 그의 전신으로 그가 흘린 피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치 수십 개의 창처럼 날카롭게 변하더니 그의 명령에 따라 내 몸을 향해 파고들었다.
카앙!!
하지만 첫 번째로 날아든 혈창은 내 손에 가볍게 튕겨 나갔다.
“우르가라고 했나?”
“이놈!!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우리 종족의 숙원을 이루기 전엔 죽을 수 없노라!”
그의 외침과 함께 혈창들이 금속탄환을 쏟아내는 대전차포도 우습게 넘나드는 속도로 날아들었다.
처음과 비교해 수십 배는 빨라진 속도에 페르세르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신을 꿰뚫을 속도로 파고드는 놈의 공격은 좀 전 치명상을 입은 놈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촤악!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놈에게 당할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뱀파이어의 일개 개인에게 당할 정도였다면.
시작부터 이런 일은 벌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지킬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인간인 내게는 최저한의 날뜀 상한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윽고 날아든 혈창들을 향해 손을 뻗은 내가 눈을 번뜩였다.
동시에 대량의 마나가 움직이며 일대를 동결시켜버렸고.
우르가가 쏘아 보낸 혈창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대로 묶어버렸다.
“마, 말도 안 돼…….”
무너지며 허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향해 나는 맹렬하게 흔들리는 혈창 하나를 낚아채고는 말했다.
“나를 막고 싶었으면 전쟁을 벌이지 말았어야지.”
그 병력 모조리 끌고 와서 나를 막아.
그대로 혈창의 제어를 뜯어버린 나는 그것을 마치 투창하듯 놈에게 던졌다.
그리고 그것에 이마를 관통당한 그는 또다시 치명상을 입었는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너희들 불사의 능력 그거 굉장히 거슬리더라.”
촤악!!
이어지는 푸른 잔상이 놈의 불사의 권능 자체를 지워버리자 결국 우르가는 부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여기는지 저항을 포기했다.
“괴물 같은 놈……, 네놈이 여길 어떻게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린 이미 준비를 마쳤다.”
“내가 암살할 땐 함정에 쫄아서 튀어 본 적이 없는데.”
무조건 상대 목을 따고 작살나면 작살났지 중간에 빠꾸 따윈 없다.
“쿨럭! 암살이 언제부터 학살이 되었나.”
그의 질문에 나는 지조 있게 내 신조를 읊어주었다.
“보는 놈 없으면 암살이야.”
“미친놈이로군…….”
서걱!
다시 한 번 청단이의 푸른 잔상이 궤적을 그렸고 곧 우르가의 머리통이 떨어져 나갔다.
불사의 권능을 파괴당한 이상 머리통이 날아가면 상위 뱀파이어라도 죽음만이 남을 뿐이었다.
콰앙!!!
우르가가 쓰러지고 난 후 나의 침입을 눈치챈 이들이 이쪽으로 모여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나는 청단이를 허공에 띄운 뒤 오딘의 지팡이, 초월의 종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며 대량의 마나를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하늘의 눈으로 인해 상당량의 마나 소모가 있었지만.
이전 신목과의 전투 때보다 훨씬 늘어난 마나량으로 인해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순식간에 내 손 위로 모여드는 새하얀 백광의 화염이 거대한 고속 톱니처럼 회전하기 시작하며 귀가 아플 정도의 소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단단한 유적이니 완전히 무너지진 않으리라.
-데이비! 안돼!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나는 모르겠고, 자꾸 쓸데없는 생각 하다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페르세르크.”
마치 기어가 끼워지듯 심장에 서클이 빠르게 자리 잡고 돌아가며 전신의 서클과 연동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역회전의 반동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노, 놈이다!”
“뭔가 마법을 쓰려 한다! 막아라!”
늦었다, x끼들아.
[8서클 역회전]
[폭염계 파이어볼]
[화이트 노바]
이쪽에서 가릴 것 없이 들어간다. 어디 그 거지발싸개 같은 육신에 누굴 집어넣으려는 건지 잘 생각해보던지.
쿠웅!!
가볍게 바닥으로 백광의 화염을 던진 나는 마치 폭탄이 터지듯 일대를 소멸시켜나가는 화염을 보며 그대로 그 일대를 벗어났다.
* * *
콰아앙!!!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새카만 화염들이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어내며 닥치는 대로 부숴버렸다.
처음 은밀하게 잠입한 것과는 달리 나 여기 있소 하는 꼴로 대놓고 돌아다니는 내 행동에 페르세르크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콰앙!!
단단한 벽면이 응축된 다크볼에 무너져 내렸고.
그 틈 너머로 수십의 뱀파이어들이 기습을 펼치듯 파고들었지만 내게 닿기도 전에 함정 마법이 발현되며 시커먼 화염이 놈들에게 달라붙었다.
“끄아아악!!”
“부, 불이 꺼지질 않아!”
물을 부어도 산소를 차단해도 계속해서 타오르는 화염에 뱀파이어들이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고 바닥을 뒹굴었다.
놀라울 정도로 저항력이 부족한 본진의 방어에 나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렇다 할 목적지는 없었다.
단순 길이 보이면 그곳으로 걸을 뿐이었다.
그런 비효율적인 내 행동에 페르세르크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뭔가 느낌이 이상한 것이……, 데이비, 아래야.
“……”
거대한 공동에 들어선 나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게 파인 지하 공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강화되지 않은 시야로는 청록의 빛만이 가득 보이는 지하는 언 듯 보기엔 그 내용물을 확인하기 어려워 보였다.
마치 거대한 지하기지를 연상시키는 공간은 자연적인 석재를 깎아서 만든 것인지 여기저기에 중간 기둥의 지지대 역할을 하여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대박! 냄새 제대로 나는데. 너무 늦게 찾았네.”
-저들은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을 게야. 본녀가 보기에 이 건물은 은폐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지하 시설 같은데. 아마 그 힘이 남아있었던 탓에 지금껏 뱀파이어들이 이곳을 들키지 않은 것이겠지.“
1만 년이 지났음에도 작동하는 지하유적들.
하인스 영지의 지하유적 또한 무수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남아 영지를 말려 죽이고 있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번엔 쓸데없는 짓 하지 말자.”
이전 유적에서 괜한 호기심에 건드렸다가 얼마나 피를 보았던가.
헤라클래스의 클론은 정말 내 예상과는 동떨어진 사태였으니 말이다.
다시 한 번 그딴 일이 벌어지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파앙!!!
이윽고 플라이 마법을 몸에 두르고 천천히 바닥을 박차 내려가기 시작한 나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빛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넘었을 때.
나는 정확히 내 미간을 노리고 날아드는 새카만 창을 볼 수 있었다.
콰악!!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채며 낙하한 나는 그대로 플라이 마법을 푼 채 창을 던진 이를 향해 그대로 손에 낚아챈 창을 돌려주려 했다.
콰직!!
하지만 내게 날아온 창은 보통의 창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내 손을 떠나기도 전에 검은빛의 스파크로 변한 창이 마치 내 몸을 사슬로 옭아매듯 묶어버린 것이다.
“……”
말없이 손을 포박당한 채 서 있자 어둠 속에서 두 명의 남성이 걸어 나왔다.
한 명은 회색빛의 장발을 가진 젊은 인상의 사내였고, 나머지 한 사내는 바바리코트와 흡사한 복장에 중절모를 쓴 사내였다.
조금 특이한 방식의 포박에 나는 말없이 사슬을 스윽 훑었다.
이거.
뭔가 묘하게 익숙한 힘이다. 세상의 섭리에 구애되지 않는 그 힘, 최근에 이걸 본 적이 있다.
분명 세상의 뒷면인 만큼 내가 한번 그 틈새를 깨부숴버린 탓에 함부로 못 넘어오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아아……, 우매한 인간이 왔군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여기까지 겁도 없이 올 줄은.”
“속았다고?”
“자기 무덤 자리도 모르고 기어들어 온 부나방이 어찌 똑똑하다 할까.”
붕대로 얼굴을 가린 기괴한 사내는 기이한 웃음을 터뜨리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뒤편에 아직 한 명 더 인기척이 느껴지지만 상관없었다.
내 관심은 오로지 붕대를 감은 사내에게만 향해있었다.
쿵!! 쿵!!
동시에 신장이 2미터 80은 넘어 보이는 거대한 체격의 사내들이 나를 에워싸듯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 앞에 있는 붕대 사내와 같은 바바리코트를 연상시키는 복장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인간은 아닌데.
“아. 나를 위해서 만든 놈들인가?”
“하나하나의 위력은 분명 네 녀석에게 미치지 못할 게야. 하지만.”
그들이 8명이 모이고 장소가 이곳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단언컨대 네놈은 여기서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사용할 수 없다.
그 말에 나는 한 손을 조용히 쥐었다 폈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단 한 번, 나를 잡기 위해 놈들이 숨기고 숨겨온 한 수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콰앙!!
동시에 7명의 괴한이 양손을 들어 기이한 힘으로 나를 더욱더 강렬하게 봉인하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육중하고 거대한 덩치를 이용해 내게 빠르게 쏘아져 들어왔다.
그리고는 반응할 새도 없이 주먹을 내 뻗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담긴 일격에 나는 팔이 묶인 채로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
그러자 소매 속에 숨겨진 주머니에서 작은 시계가 하나 튀어나왔다.
비록 원수의 딸이지만 배다른 동생이었던 에오니샤가 자신에게 기회를 준 내게, 만들어준 첫 번째 시계였다.
소중하게 그 시계의 분침과 시침을 확인한 내가 눈을 찌푸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콰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모두가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놈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직 시간 한참 남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침묵하는 거한의 머리를 짓밟으며 내가 서늘하게 말했다.
“설마 이게 끝?”
어떻게 힘을 발현했는지 모르겠다는 경악한 시선은 덤이었다.
그 시선의 주인은 얼굴에 붕대를 감은 기괴한 사내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회색 장발의 사내였다.
사령 마나의 흐름이나 생김새, 그리고 뿔의 길이로 보건대, 대공급 마족이다.
“이, 이보게! 저 인간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거라 하지 않았나! 이 무슨……”
“저, 저자…… 이 세계의 힘이 아닌 것까지 다루는군요.”
“니들 머리 꼭대기에 내가 있어요. 이 xxx할 놈들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
계속 궁금해 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