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7화
“있었는데.”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없어져 버렸네.”
제약은 멀쩡히 유지되고 있다.
그 말인즉 나는 어떤 생명체도 죽일 수 없다는 소리였다.
틈을 파고든 악용?
딱 한 가지가 있긴 했다.
살생 금지 제약이 걸린 존재는 오로지 나.
그렇기에 내 손으로 누군가를 처리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들어맞는다면 얼마든지 효능을 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희망편 대로 가주면 좋겠는데.’
현실은 절망편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이다.
나 대신 싸워줄 수 있는 존재라고 해봐야 정령, 혹은 신수가 전부인 이 상황에서 신수나 정령이 소환되지 않는다면 결국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탐욕의 심판자가 대뜸 죽음을 맞이하였는가.
답은 뻔했다.
콰앙!!!!!
죽지 않았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각기 도깨비들은 고유의 힘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죽음의 심판자는 초고열의 화염을.
그리고, 탐욕의 심판자는.
압도적인 생명력.
무엇이 되었건 거슬리기 짝이 없다.
쾅!! 쾅!!
내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순식간에 몸을 재생하고 다시 공격을 가해오는 탐욕의 심판자 때문에 하던 생각도 멈춘 나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검지와 엄지만 펼쳐 붙인 채 그대로 마나를 대량 끌어올려 손가락의 끝을 끌어내렸다.
콰드드득!!!
동시에 저들이 가하는 방대한 중력을 무시한 독자적인 압력이 탐욕의 심판자를 그대로 지면에 처박아버렸다.
고통 따윈 느끼지 않는다는 듯 신음 한번 흘리지 않는 그를 제압한 채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음 심판을 시작하지.”
결과적으로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선 모든 심판을 받아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러한 내 말에도 불구하고 탐욕의 심판자는 제 일을 끝냈다는 듯 계속해서 나를 향해 위협적인 공격을 퍼부어왔다.
하지만 당장 초월체급에 해당하는 심판자의 위협적인 공격을 당해주기엔 현재 내 상태가 너무 좋다는 게 문제였다.
당장 그를 죽일 수 없다는 제약 이외엔 외려 방대한 힘을 모조리 관리하는 상황까지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카앙!!!
주먹과 거대한 해머가 부딪쳤지만 들려온 소리는 두 개의 금속이 강하게 충돌한 듯한 소리였다.
손가락을 살짝 꺾은 듯한 손 모양으로 해머를 막아내고 그대로 손목을 비틀어 해머의 방향을 강제로 변화시킨 뒤 부드럽게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짧게 숨을 골랐다.
요지는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잖아.
“일 끝났으면 잽싸게 퇴근했어야지.”
비꼬는 말투와 함께 그의 명치 지근거리까지 파고든 내 손이 순간 아주 느려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
그리고 처음으로 검은 도깨비가 싸움 중에 목소리를 냈다.
반사적으로 반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모를 청단이와 홍단이가 날카롭게 날아들어 탐욕의 심판자 양어깨를 관통해 움직임을 봉쇄했다.
[마왕 유르그 식(式) 붕권]
[1인치 명치 분쇄]
투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도깨비의 신형이 크게 움찔거린다.
이후 나는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오른손의 검지를 부드럽게 움직였고.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전신의 혈도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봉혈이다.
초월체라고 해도 2족 보행인 이상 효과가 없진 않을 거다.
적을 죽일 수 없다면.
움직임을 봉하는 수밖에.
* * *
쿵!!
제어를 잃고 쓰러지는 탐욕의 심판자는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히 있었는지 그는 한번 쓰러진 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다음.”
이윽고 담담하게 내가 중얼거리자 내 앞으로 거대한 체격의 도깨비가 하나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뒤로 나머지 세 명의 도깨비가 천천히 내려왔다.
탐욕의 심판자가 홀로 나왔던 것과 다르게 이번엔 다수라는 것에 조금 의문이 들던 참이었다.
색만 봐선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에 나는 굳이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그가 꺼낸 수정구를 흘낏 바라보았다.
“무분별한 색을 탐하는 것은 타락한 업일지니. 색욕의 업을 관장하는 심판자로서, 그대에게 색의 업이 쌓였는가에 대한 심판을 내리겠다.”
그리 말하며 내게 구슬을 내미는 그의 표정은 역시나 탐욕의 심판자처럼 무덤덤했다.
당장 자기 동료가 하나 죽어 나갔고 하나가 행동불능이다.
자신들이 내리는 판결에 반발하여 난장판을 치는 내게 분노하지도 않는 건지 도깨비의 표정은 섬뜩하리만치 냉정했다.
“……”
색욕의 심판자 말에 투명한 벽을 두드리며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던 일리나가 멈칫하고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그저 피곤한 얼굴로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챙그랑!!!!
아니, 정확히는 얹으려 했다.
손가락 끝에 닿기도 전에 수정 구슬이 깨져버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뭐냐 이건.”
업을 확인도 하기 전에 깨뜨리면 뭐 어쩌라는 것인가.
허망하게 깨져버린 유리 구슬을 보던 내가 빨리 설명해보라는 시선을 보내자 색욕의 심판자인 검붉은 도깨비는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심판받는 자 데이비 올 라운. 그대의 머릿속엔 불경할 정도로 불손한 번뇌가 가득하다. 이는 엄중한 형벌의 대상으로서 관리되어야 마땅하다. 허나, 스스로를 제어하여 업을 전혀 쌓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
뭐 인마?
“……”
멍청이가 아니면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다.
“따라서 색욕의 업을 관장하는 심판자로서 심판받는 자 데이비 올 라운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무죄를 때려버리는 색의 심판자는 번복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어차피 유죄건 무죄건 변하는 건 없다.
다만, 다른 건 둘째치고 이것만큼은 꼭 유죄를 받고 싶었다는 것이 내 심정이었다.
“바꿔.”
“뭐라?”
“유죄 하자고.”
“그대는 마치 갓 태어난 아이처럼 맑기 그지없다. 인간의 근본인 번식의 욕망마저 이겨낸 그대의 청렴함에 경의를 표하지.”
“이 망할 도깨비가 지금 사람을 놀리고 있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나는 다른 모든 규율보다 색욕의 업을 우선시한다. 그보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어금니가 순간적으로 얼얼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가 가진 색욕의 업은 마치 갓난아이처럼 순수하다. 어찌 죄를 물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말이 더 열 받는다는 사실을 그는 아마 모르는 듯 보였다.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곧이어 색욕의 심판자는 자신의 손에 거대한 창을 만들어낸 뒤 한발 물러났다.
“최종 심판관의 명이 내렸다. 데이비 살생의 업을 관장하는 심판자를 살해한 데이비 올 라운에 대한 형벌은 모든 심판이 끝난 후로 미루도록 한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다른 두 명의 도깨비가 앞으로 나섰다.
시기와 오만 그리고, 분노
그들은 나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어 보였다.
마치 동시에 판결을 내리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내게 손을 뻗은 채 잠시 눈을 감고 침묵했다.
좀 전 색욕의 심판자로 인해 긴장감이 전혀 남지 않게 되어버린 나는 알아서 하고 얼른 끝내고 끝장을 내자는 심정으로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주신 프리아 여신의 의도대로 뭐가 되었건 심판의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신벌이 끝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시기의 업을 관장하는 심판자로서 판결을 내리겠다.”
“분노의 업을 관장하는 심판자로서 판결을 내리겠다.”
“오만의……”
아주 잠깐의 침묵 끝에.
그들은 예상외로, 또는 예상대로 뻔한 답변을 내놓았다.
유죄 선고였다.
그럴 수밖에.
보통 같아선 무죄가 뜰 리가 없을 테니까.
실질적으로 두 가지를 제외하고 모조리 유죄가 뜬 것이다.
마치 기계처럼 나를 일정 거리를 두고 에워싸는 도깨비들을 보며 나는 문득 하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7등계 심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 나를 심판한 건 6개인데.
그럼 나머지 하나는?
서서히 마나를 끌어 올리며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즈음이었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던 탐욕의 심판자가 마치 강제로 몸을 재구성하는 것처럼 부서져 내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최종 심판관의 말씀에 따라 6계의 심판을 끝낸 심판받는 자 데이비 올 라운의 마지막 심판을 진행한다.”
탐욕의 심판자 말에 다른 심판자들은 말없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최후의 심판은 나태의 심판. 최종 심판관께서 직접 진행하시리라.”
그 말과 함께 거대한 빛이 내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화려할 정도로 눈이 아픈 그 빛 속에서 나는 금방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의 형태를 보고 눈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 잘나신 심판관이 누구인지 한번……
말을 하던 내 입에서 여유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이건 장난인가, 진짜 도발인가.
멍한 얼굴로 나는 내 앞을 향해 다가오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다른 심판자와는 다르게 작은 인간이었다.
왜소한 체격에 아직 앳된 외모로 유별날 정도로 다른 이들에 비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은 소녀가 입고 있는 복장이었다.
푸른색 계통의 살균복으로 주로 병원균이 옮지 않도록 특수 무균실 같은 곳에서 입을 수 있도록 제작된 의상이기도 했다.
나는 저것이 너무 익숙했다.
“나태의 심판을 시작하지. 지금 내가 보이느냐.”
이윽고 조용히 침묵하던 아이, 아니 풋풋한 소녀의 입에서 완전히 그 사람과 똑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내가 침묵하고 있자 소녀는 무표정으로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말했다.
“내가 보이느냐 물었다.”
“현……”
왜 목소리가 쉽게 나가지 않는 건지.
시야가 흐릿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아는 인물일 수밖에. 지금 네 앞에 있는 최종 심판관인 나의 모습은 너의 나태함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았던 이의 모습이니.”
“뭐라고?”
그 말에 나는 허망한 얼굴로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엔 그 존재가 나타났음에 놀랐고, 그다음엔 최종 심판관이라는 자의 말에 놀랐다.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있던 나는 곧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작은 키의 소녀가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 이를 빠득소리 내며 갈았다.
“그래. 네 업보를 심판해보자꾸나.”
“현아……”
마치 트리거가 열린 것처럼.
나는 기억의 한편에 가장 오래된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망각은 축복이다.
천 년이 지났음에도 전생의 가족의 얼굴 하나 잊지 못하는 건 저주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