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8화
퉁!! 퉁!!
일리나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막는 이 투명한 감옥은 그녀가 아무리 강하게 두드려도 굳건하게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일정 거리 이상 절대 접근하지 못하게 막기라도 하듯.
아니면 아예 공간 자체가 뒤틀려서 길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자신의 외침이 저들에겐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기가 막힐 지경인데.
그걸 반박할 수가 없으니 그녀의 성격상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데이비는 현재 대적자라는 생소한 위치에 있고 신의 뜻을 따르는 성자이면서 스스로 전 마왕이라는 그 은발의 소녀를 위해 마왕이 되었다.
그 결과 신의 분노를 샀고, 신벌을 내려받았다.
현재의 데이비는 너무 불합리한 상황 속에 놓여있었다.
퉁!! 퉁!!
“……”
지켜줄 이 없이 쓸쓸한 그를 지켜주겠다고 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상황인가.
자신의 힘으론 도저히 이 공간을 깨뜨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은연중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검에 대한 재능과 열정 하나만큼은 저 괴물 같은 데이비조차 자신보다 한 수 위라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수천만 명이 대단하다고 하는 것보다 데이비가 한 한마디가 파급력이 더 컸기 때문일까.
그녀는 그 기대를 실망시키기 싫다는 이유로 더욱 검에 매진한 바 있었다.
“그 경지를 다시 떠올릴 수 있다면……”
마음 같아선 당장 그 이기어검이라는 경지의 검술을 다시 한 번 사용하고 싶었다.
스스로 움직이는 검을 부리는 경지는 소드마스터의 상위 개념이었기에 그녀의 목표이기도 했고, 데이비를 통해 별 가르기라는 기술을 사용했을 때 느낀 황홀감은 다시 한 번 더 느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카앙!!
하지만 현재 그녀의 실력으론 사실상 어림도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오러블레이드를 휘두르는 데이비의 모습을 보고 자신과 대련해주던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했었다. 이후 그가 가르쳐준 요령을 터득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이번 건 그런 규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눈을 감은 채 그때 잠깐 느낀 황홀경을 다시 깨우쳐보려 마나를 끌어 올린 그녀는 되든 안 되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지금 혼자 외롭게 싸우고 있는 데이비를 저대로 두는 건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로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색욕의 업.
그 말에 그녀는 하던 것도 모두 잊은 채 데이비를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절세미남은 아니지만, 충분히 잘생긴 축에 속하는 소년이다.
기술, 인망, 지식, 무력, 재력. 지위.
가까이서 보면 참 비극이라 부를 정도로 기괴한 놈 그 자체였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불릴 만큼 사기적인 스펙을 지닌 인물이다.
그 어떤 것도 모자람 없다고 소문이 난 탓에 대륙 최고 신랑감이라는 소리가 팔란 제국 내에서도 심심찮게 나돌고 있지 않았던가.
그는 과연 얼마나 많은 귀족, 왕족 영애들에게 구애를 받아왔고 연인을 만들어왔는가.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
이어지는 말에 일리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무죄.
색욕의 업을 쌓은 적이 없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 말뜻을 모를 수가 없다.
“세상에…… 저런 스펙을 지니고 있는데 여지까지 연인 한번 없었다고?”
색욕의 업이 없다는 게 그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가 아는 데이비라는 인간군상은 단순 손만 잡고 잘게가 아니라 눈감고 10초만 헤아려봐 라고 말할 것 같은 성질머리의 소유자였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게 아닌 이상 그가 자신의 연인을 그냥 두었을 리가……
그렇다면, 아직 누군가의 손을 타지 않았다면.
오히려 너무 뛰어나서 사람이 함부로 다가오기 어려운 느낌의 인간이 바로 데이비였다면.
자신에게도 무언가 여지가……
“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자기 생각을 인지하고 깜짝 놀란 일리나가 제 뺨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이 급한 상황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괜히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철없는 생각이라니.
폐관수련을 진행하며 더 이상 주변에서 자신을 걱정하지 않도록 성숙한 존재가 되자고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말이다.
고개를 훼훼 저어 보이고는 양 뺨을 찰싹 때린 그녀가 다시 검을 쥐었다.
안되더라도 차라리 해보고 후회하리라.
자아가 잠든 칼디라스이기에 큰 기대를 할 순 없지만, 반드시 해내리라 생각하며 그녀가 검을 쥐었다.
그리고는 기세를 폭발시키듯 끌어올려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였다.
그녀는 검을 끝끝내 휘두르지 못했다.
티오니스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조금 특이한 복장을 한 동년배의 소녀와.
그 소녀를 보고 극렬하게 동요하는 데이비의 처음 보는 표정 때문이었다.
“데이비?”
일리나는 그의 얼굴에 어린 표정과 그 안에 담긴 감정의 편린에 자신이 지금 뭘 잘못 보고 있는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 * *
전생의 삶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리 잘난 삶은 아니었다고 말할 것이다.
“어찌 그러느냐?”
“하…… 하 돌아버리겠네.”
목소리조차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잊을까.
모두 기억하는 주제에 전생의 추억만큼은 기억의 어두운 곳에 묻어 굳이 떠오르지 않게 강제로 봉인해두었는데.
망각하지 못한다는 저주는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왔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가족.
누나와 삼촌, 그리고 동생. 마지막으로 사진만 남은 부모님의 얼굴.
“스스로도 느끼는 바가 있는 게지.”
동생과 모습은 동일하지만 말투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최종 심판관은 굵직굵직하고 저음이던 목소리와 다르게 지금은 말끔하고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앳된 목소리였다.
“자. 말해 보아라. 네가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였느냐.”
그 말에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천천히 말아쥐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모든 심판은 개논리라며 비웃어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최종 심판관의 말에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망각을 할 수 없다는 건 저주와 같다.
무심코 던진 상처가 될 말 한마디, 무성의했던 대처 하나하나가 전혀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직접 보겠느냐?”
말없이 양손을 펼쳐 올린 소녀의 행동에 나와 그녀의 사이에 커다란 반투명 구체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안으로 너무 그리웠던 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쥐죽은 듯 고요한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7평 남짓한 커다란 백색의 방과 그 방의 중앙에 놓인 커다란 침대.
그리고.
죽은 것처럼 잠들어있는 평범한 인상의 한 남자였다.
“누구인지는 스스로 알겠지.”
그 물음에 나는 파르르 떨리는 이를 악물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없다.
특수 병실에서 대여섯 개의 링거를 맞으며 잠들어있는 건 다름 아닌 전생의 내 삶.
전부였다.
* * *
고요한 실내는 척 봐도 특수 병실이라는 것을 알 만큼 삭막해 보였다.
내부에 있는 것이라곤 푸른 딱지가 붙은 전자제품이나 책, 혹은 여러 가지 그림이나 사진이 전부였다.
조용한 병실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오빠야, 내 왔다. 오늘도 쳐 늘어져 자나. 나무늘보도 아니고 뭐꼬! 그게.]
“옴마야 X벌 세발낙지가 지 혼자 쳐들어와 가지고 말도 하네. 학교도 바쁜기 여가 어디라고 기들어오는데.”
[당연히 오빠야 상태 보러 왔지]
“징그럽다 떨어져라. 티벳여우 같은기 어디 들러붙는데.”
지금 내게 이 환상을 보여주고 있는 소녀와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얼굴이었다.
소녀는 한쪽에 비치된 약병을 확인하다 대뜸 표정을 찌푸린다.
[하! 오빠야 니 돌았나. 약 꼬박꼬박 챙겨 먹으라 했나 안 했나!]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향해 화를 내는 고집 센 인상의 소녀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의사쌤들이 언제 수술할지 모르니 운동 틈틈이 해두라 캤제? 삼촌이 오빠야 위해서 이렇게까지 병원비 지원했으면 오빠 니도 뭐 좀 해라! 언제까지 동태새끼마냥 쳐 늘어져 있을 건데.]
저 때가 내 나이 스물하나였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치료와 언제 나을지 모른다는 정신적 고통 그리고, 내 병을 고치기 위해 병원비를 대주는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삼촌과,
나의 치료를 간절히 바라는 가족에게 느낀 죄책감으로 삶의 의욕을 죄다 잃어버렸을 때였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는 나를 향해 화를 내면서도 몸을 일으킨 내 등을 두드려 마사지해주는 동생 모습의 환상을 보던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이를 악물었다.
“귀찮게 뭐하러. 안 한다. 안 해.”
차라리 죽자. 죽어서 이 고통을 남에게 더 이상 떠넘기지 말자.
[돌았나! 언니야 또 넘어가는 거 볼라고? 아주 돌았지 그냥.]
급기야 어깨를 툭툭 때리며 짜증 내는 동생의 모습에 나는 더욱 담담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요새 왜 이러는데 대체!]
“내가 원했나? 치료해달라고 빌드나!”
[와, 이거 완전히 인간쓰레기네?]
“니는 이게 얼마나 X같은지 모르지? 날마다 찾아와서 검사랍시고 전신에 바늘 꽂아대고 툭하면 약물 치료한다고 정신이 혼미하다! 그 효과도 없는 치료 때문에 아파 죽겠다고! 괴로워 뒤지겠다고!!”
[다 오빠야 니 위해서 그런 거 아니가!]
“X! 이게 사는 거가?! 사는 거냐고?! 죽었으면 죽었지 더는 못해 처먹겠네!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데! 니는 한번 보고 공감하면 끝이제? 나는 X발 이걸 24시간 내내 한다! 벌써 몇 년째고! 가망도 없는데 아픈 척 참고 있으라고?! 말해봐라!!”
[오빠야……]
대중매체에서 아픈 이들이 돌봐주는 가족을 향해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배가 불렀다며 욕을 했던 게 나였다.
그런데, 내가 그 꼴이 될 줄이야.
히스테리가 극도로 심해진 건 나이가 제법 들어서였다.
18살에서 19살이 될 무렵부터 약이 슬슬 듣지 않게 되면서 상황이 악화하자 자연스레 나는 극도로 예민해진 것이다.
거기에 수많은 요인으로 인한 정신 스트레스까지 겹쳐 당장 치료보다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수십 번이고 할 만큼 괴롭게 보냈다.
[오빠야 니는 진짜 못됐다.]
결국, 흐느끼며 녀석이 호소해왔다.
[언니야도 삼촌도 나도, 오빠야 하나 완치되는 거 볼라고 지금까지 달려왔다. 거의 10년 가까이 이렇게 오빠야만 보고 다들 노력하고 있는데 오빠야 니는 지금 아파 뒤지겠다고 찡찡대나? 그라믄 언니야는? 언니야는 그동안 오빠야 먹여 살리고 돌봐준 언니야는 도대체 뭔데!]
“그러니까 제발 나 같은 거 냅두고 자기 삶 좀 살라고!”
격한 언사.
동생 현아와의 싸움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처음엔 오빠 동생으로 서로 아껴주다가 상황이 이만큼 몰리니 서로 격해지는 것도 여러 번이었다.
“가라. 누나야한테도 말하고.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제발 좀 내 좀 내버려두고 니들 인생이나 좀 살라고! 내 하나 때문에 지금 누나나 니나 지 인생도 못살고 이게 뭔데! 삼촌은! 생면부지 남처럼 살아온 삼촌이 내가 뭐라고 그 많은 돈을 병원에 쏟아부어야 되는 건데!”
[오빠야……]
“어제 들었다, 치료방법 없다면서,”
그 말에 소녀는 절대 들켜선 안 되는 것을 들킨 것처럼 움찔거렸다.
[아니…… 오빠야 내 말 좀 들어봐라. 그게 말이다.]
“집어치우자 이년아, 내 생각해서 그거 말 안 하고 숨기면 모를 줄 알았나? 살아야 몇 달이라면서, 그냥 죽게 내버려도 ……. 제발 좀…… 그냥 내가 죽을게. 죽으면 더 이상 이렇게 힘들 것도 없다고!”
감정이 격해져 눈물까지 흘리며 나는 현아에게 그렇게 소리쳤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걱정은 그게 전부였을 것이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는 가족을 생각한다는 핑계로 가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리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세상 경험부족하고 병실에서만 살아온 나는 그 당시에 멍청한 방법으로 동생과 누나가 병원에 오지 못하게 막았었다.
거기까진 문제가 아니었다.
나을 수 없는 병 때문에 언제까지고 나를 위해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가족을 보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였던가.
“그만……”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던 나는 영상의 소리와 화면을 눈에 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그만하라고.”
내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며,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가장 미안했던 순간이었다.
“어째서지? 이건 네가 선택한 삶이다. 그 이후는 어찌 되었는지 스스로도 잘 알겠지!”
“경고하는데…… 이 이상 자극하지 마라. 심판자.”
섬뜩할 정도로 낮아진 내 목소리에 여동생 현아의 모습을 하고 있던 최종심판자가 천천히 머리를 풀어헤쳤다.
익숙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익숙한 샴푸 향이 풍겨 왔다.
소중한 동생의 모습이었다.
“어찌하겠느냐. 위대한 의지께서 네게 제약을 내리셨겠지. 다른 심판자와 다르게 나는 진실을 알고 있느니라.”
“……”
“지금 그 꼴로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할 테지. 인간이란 제 잘못을 뒤늦게 깨닫는 가련한 존재다. 과연 네가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그 말에 나는 그대로 심판자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대량의 마나가 심판자를 향해 쏟아졌다.
죽이지 못해도 저 빌어먹을 입을 좀 다물게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주신의 제약이 또 한가지 내게 쏟아부어 졌다.
[데이비 올 라운의 무력 사용을 금한다.]
살생금지, 무력 사용 금지. 두 가지의 금기로 인해 모든 전투가 봉해졌다. 가히 세계수 이그드라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제약이었다.
“……”
내 성질머리를 잘 아는 당신이 신벌을 핑계로 나를 이 상황에 몰아넣었고, 역린이나 다름없는 전생의 기억 일부를 굳이 끄집어내어 들쑤신다고?
이제 당신이 뭘 원하는 건지 정확히 알았다.
신벌을 핑계로 한 나의 강제 강화. 심연이 그리 두려우셨나.
그리되길 그렇게 원하는 모양인데.
이번만큼은 어미 잃은 청개구리가 어떤 심정이 되었는지를 보여드리리다.
첫 수련 이후 일부러 어긋나게 만들어둔 혼의 톱니 중 일부를 천천히 끼워 맞추기 시작하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나를 압박하던 제약과 이곳의 기류들이 서서히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류에 집어삼켜 지며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세상은 신과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신의 제약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없다면.
그 규칙에서 아주 잠시만, 그것도 내 육체에 한해서 자의적으로 독립하는 수밖에.
투웅!!
새카만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하얀 눈동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