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0화
이게, 일단 저지르고 보네?
나는 입안에 감도는 그 한마디를 내뱉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말보다 빠르게 이미 그녀는 움직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그녀의 행동은 조금 곤혹스러웠다.
발뒤꿈치를 들고 품에 안겨든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일리나의 행동은 뜬금없었고, 기습적이었다.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드디어 이 녀석이 미쳐버렸구나!’ 싶었다.
그런 순간적인 오판단에 당황하고 있을 즈음.
나는 문득 몸속의 무언가가 입과 입을 통해 그대로 빠져나갔음을 깨닫고 행동을 멈추었다.
내 몸에 그런 것이 있었나 의아해하던 찰나 내게서 천천히, 아주 수줍은 소녀처럼 떨어진 일리나가 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잖아…….”
“뭐?”
외려 이런 상황이 적응되지 않아 내가 한발 물러나려 하자 그녀는 더욱 나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힘들었던 거야……”
“뭐, 진짜 잘못 주워 먹은 거 아니냐? 내가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그녀를 떼어내며 뺨을 꼬집어버리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던 일리나가 결국 엉엉 울어버렸다.
“흐어어엉! 그래도! 흐윽…… 그래도오!”
“그래도는 뭘 그래도야 안 떨어져?”
“흐끅!”
“뚝 그쳐! 그리고 코 묻는다. 떨어져라.”
“……”
딸꾹질까지 하며 글썽글썽하는 그녀의 눈빛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위로해주어야 하는가 하는 마음으로 가득해 보였다.
가뜩이나 페르세르크가 떨어져 나간 탓에 이제 상대를 보는 정보창 능력이 많이 약해져 있다.
기브 앤 테이크라고 했던가.
그녀를 구한 대신 내놓은 대가치고는 많이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본래 빌려온 능력이니 영구적이지 않다는 건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페르세르크가 떨어져 나갔음에도 내게 심연의 권능이 일부 남아있는 이유,
그건 나로서도 아직 알 수 없었다.
단순 잔재가 남은 것인지 오랜 시간 지나면서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인지는 말이다.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일리나의 본래 성정은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굉장히 냉정하고 차가운 축에 속했다.
속마음이 어떠하건 그녀가 평소 짓는 표정은 누군가가 함부로 다가가기 어렵게 만드는 아우라가 존재했으니 말이다.
콰직!!
부서져 내리는 세상 속에서도 일리나는 태평할 정도로 오랫동안 훌쩍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진정되었을 땐 이미 나와 그녀가 있는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세상이 바스러져 내린 후였다.
“흐끅…… 그래도……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지켜줄게. 전생의 삶은 어떻든 현생은 꼭 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내가 도와줄게!”
“……”
그녀의 말에 나는 문득 좀 전의 그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에서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친.”
동시에 나는 눈을 부릅뜨며 그녀의 양어깨를 부서질 듯 강하게 틀어잡았다.
“꺅! 아파!”
비명을 지르는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내 시선은 오로지 다른 곳에 꽂혀있었다.
일리나의 발끝이 마치 일그러진 홀로그램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세크리파이스.
순수한 영혼이 금기의 대가를 대신 지불한다.
나는 금기의 업보, 즉 헤라클래스에게서 받은 이 빌어먹을 양날의 검 같은 힘을 활성화한 대가로 많은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일리나.”
어처구니가 없어진 내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귀를 콱! 잡아당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프리아 여신이 시키드나?”
“꺄악! 아파! 데이비 뭐 하는 거야!”
“프리아 여신이 나 대신 너보고 죽으라 시키든?”
말을 하던 중 나는 곧 일리나가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거 분명 초대 성녀 다프네가 가지고 다니던 것과 흡사하다.
신의 이름 아래에 한가지 기적을 담고 내려진 신성석이다.
그 효능은 신이 의도하는 한가지 기적을 발현하거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담아둘 수 있다.
일리나는 즉, 신성석의 힘을 이용해 나와 접촉했고, 그 방식을 통해 내게 가해진 대가의 일부를 빼앗아버렸다.
* * *
“좋은 말 할 때 내놔."
‘안돼…….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 못 해.’
내가 엄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자 일리나는 벌떡 일어나 내게서 두어 발자국 물러나며 손에 쥔 돌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안돼! 널 죽게 둘 수 없어!”
“그걸 네가 감당할 수 있을 거 같냐? 안 내놔?!”
내가 버럭 소리치자 그녀가 크게 움찔거리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소멸이잖아!! 널 이차원 전체에서 박탈하는 거잖아!”
“네가 가지면 뭐 다를 줄 아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일리나. 내놔.”
“싫어.”
단호하게 답한 그녀가 급기야 그것을 입안에 쏙 밀어 넣어버렸다.
“가져가 봐. 가져가 봐! 베에에!”
입안에서 작은 돌멩이를 오물거리던 일리나가 혓바닥을 쏘옥 내밀었다.
“쓰읍!”
“히끅!”
그 도발에 짜증이 난 내가 강제로 빼앗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깜짝 놀란 그녀가 딸꾹질을 하다 그대로 돌멩이를 삼켜버린 것이다.
“야!! 뱉어!”
“우욱!”
내 말에도 불구하고 일리나는 삼킨 돌멩이를 뱉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몸을 웅크렸다.
“쿨럭…… 쿨럭쿨럭! 시, 싫어! 네가 사라지는 건 싫어!”
“네가 대신 사라지겠다고?”
“아니야! 난 사라지지 않아!.”
투웅!!
마치 내부에서 무언가가 터진 듯 그녀가 크게 움찔거렸다.
동시에 의식을 잃은 일리나가 추욱 늘어지기가 무섭게 그녀의 신형이 서서히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잘 만났다 이 빌어먹을 주신.”
콱!!
사람을 가지고 놀아?
내가 일리나, 아니 일리나의 몸을 빌린 그 존재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일리나의 몸 안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주신 프리아의 의지 파편이었다.
실제로 칼디라스를 제외하면 신성력이 없는 그녀의 몸에 대량의 상위 신성력이 감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신이란 감정이나 자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규칙과 함께 세상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하나의 의지체였으니 말이다.
말없이 허공에 뜬 채 나를 내려다보던 주신 프리아 여신은 곧 나를 내려다보다 손을 뻗었다.
화아아악!!!!
동시에 말 대신 거대한 무언가가 내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
기본적으로 짜여 있던 마왕과 대적자의 거대한 흐름이 뒤틀리며 세상의 미래가 변했다.
그 미래를 본 주신 프리아 여신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정 이상 강해지지 않기 위해 선을 지키던 나를 강제적으로 강화시키는 쪽으로.
신벌을 핑계로 나를 이곳으로 불러와 극도로 자극했고.
결국, 꼭지가 돌아버린 내가 금기의 업보를 활성화.
주신이 내건 제약을 강제로 부숴버리고 이 세상을 박살 내버렸다.
그녀에겐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딱 한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큰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헤라클래스가 가진 고유의 힘은 규격 외의 성능을 자랑했다.
당연, 주신의 권능조차 부숴버릴 만큼 오만하고 독선적인 힘을, 주신의 또 다른 일면인 세계의 섭리와 법칙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당연, 그만한 대가가 내게 가해졌다는 것이다.
실컷 강화해놓았는데 내가 잘못되어버리면 주신 프리아 여신도 닭 쫓던 개 꼴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만큼 그녀는 한가지 선택을 내렸다.
내가 아닌 일리나를 버린 패로 사용한다고.
내가 사라질 바에야 한 명 정도 없어도 되는 인간 하나를 희생시켜 나를 살리고 미래를 도모한다.
참 냉정하고 깔끔한 판단이지만.
이걸 내가 그냥 두고 봐줄 생각 따윈 없다.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린 나는 망설임 없이 아공간에서 작은 십자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주신 프리아 여신을 상징하는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아무런 힘도 담기지 않은 금속 십자가이지만 그걸 사용하는 이가 성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일리나를 포기하고 나를 살려서 이용해 드시겠다?”
“……”
내 말에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빛내던 주신 프리아 여신이 시선을 돌렸다.
일리나의 육신은 내게서 빼앗은 대가의 일부를 견디지 못하고 발끝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당장 돌려놓으시죠.”
“……”
대답은 없었다.
쾅!!!
반사적으로 주먹을 뻗은 내 손이 투명한 막에 의해 막혔다.
오호라, 그래도 주신은 주신이라 이거지.“
콰직!!!
순간적으로 금기의 업보가 활성화되며 그녀가 친 투명한 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주신의 힘을 무효화시킬 정도로 강한 힘이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그 힘이 주신의 힘을 모조리 튕겨내기엔 미약했다.
쾅!!! 쾅!! 쾅!
거침없이 몇 차례 더 벽을 두드린 내가 싸늘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그녀는 나를 애정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나 또한 그리했으니 그것에 굳이 억울하다는 심정을 토로하진 않는다.
하지만, 갑질에도 정도라는 게 있는 것이다.
주신 프리아 여신은 내가 그녀의 의지를 개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난 듯 보였다.
몇 차례고 벽을 두드리던 나는 행동을 멈췄다.
가만.
그녀가 나를 이렇게까지 지키려 든다는 건.
대처할 수단이 사라져버렸다는 소린데.
십자가를 쥐고 있던 내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요. 그리하겠다 이 말이죠?”
동시에 내가 십자가를 역으로 쥐었다.
망할 여신이 멋대로 군다면. 나도 멋대로 협박할 수밖에.
“나 이거 역으로 꽂을까요?”
내 말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다시 내게 향했다.
이에 나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십자가를 흔들어 보였다.
“진짜 꽂아요? 우리 한번 이혼서류에 도장 찍어봐? 서로 갈 곳까지 가보자 이겁니까?”
아 몰라, 나는 아쉬울 거 없어.
세상이 뒤집히면 다 같이 죽는 거야.
내가 망설임 없이 협박을 계속하자 침묵하던 그녀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나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우웅!!
동시에 내 앞으로 상태창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뒤틀리던 글귀가 변하기 시작하고 특정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일리나의 육신에서 거대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육신이 내게로 힘없이 떨어졌다.
[일리나 데 팔란이 양도받은 소멸의 대가. 주신의 이름 아래에 대가의 내용을 변경, 데이비 올 라운이 소유한 잔불로 대처. 두 존재 모두의 생존 가능성 다량 획득.]
오래 적금해둔 여분의 생명이 허망하게 날아가 버렸다.
[이후 대가의 90퍼센트, 주신 프리아 여신의 이름으로 대리 부담.]
그 말에 내가 픽 웃어 보였다.
잔불이 아깝지만, 주신 프리아 여신이 이것까지 생각해두고 나와 딜을 한 것이라면 여기선 흥정을 멈추는 수밖에.
“진즉에 그럴 것이지.”
다만, 나는 주신 프리아 여신도 상당한 뒤끝의 소유자였다는걸 잠시 잊고 있었다.
[신을 의심하는 성자, 괘씸한 데이비 올 라운에게 주신의 이름으로 대가의 일부를 선택, 재조립 후 부여.]
“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모종의 빛이 내 몸 전체를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내 몸의 일부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2주 간격 총 한 달간. 육신의 변형. 주신의 이름으로 현상을 반드시 유지.]
멋대로 제한을 부수지 않게 막겠다는 의지가 한껏 강하게 느껴졌다.
그 말과 함께 엎드려있던 내 시야로 새카맣고 긴 무언가가 후두둑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찰랑거리는 그것은 내 머리부터 이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 정체는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었으니 말이다.
“어?”
반사적으로 내 목에 손을 가져다 댄 내 눈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 따윈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주신 프리아 여신의 힘, 일부가 일리나와 나를 감싸더니 곧 다시 본래 우리가 있던 세상으로 내던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