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2화
새하얀 빛은 압도적으로 위력이 약해져 있었다.
주신 프리아 여신의 힘이 약해져서인가.
아니면, 신이 세상과 연결하는 무수한 연결 끈들이 약해진 탓인가.
무엇이 되었건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한 번에 저 시커먼 강, 아니 거대한 호수를 정화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말이다.
가뜩이나 주신 프리아 여신의 영향이 잘 먹히지 않는 놈들인데 그 힘까지 약해져 있다면.
당분간은 신성력으로 끝장내기보단 힘에는 힘으로 응수해주는 수밖에 없으리라.
“이, 이대로 물러날 것 같으냐!”
검은 호수 너머로 빨려 들어갔던 그레이브가 질기게 모습을 드러내며 내게 소리를 질러댔다.
“네놈은 결코 우리의 단결을 넘어설 수 없으리라, 문은 반드시 열린다. 그리고, 그 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 그때 네놈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
저주를 퍼부으며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그는 다시 이곳으로 나올 힘은 없는 듯 보였다.
아무리 치외법권이라지만 내가 촉수 생명체를 이용해 연구하면서 알아낸 바대로라면 저놈들도 한계는 존재한다.
세계의 섭리가 단순한 프로그램도 아니고 몇 번이고 상대가 들었다 놨다 하게 둘리가 없었다.
아마 한번 넘어오는 것까진 몰라도 다시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끌려 들어가면 다시 넘어오는 게 쉽지 않은 듯 보였다.
쿠웅!!!
그때였다.
거대한 빛의 세례에 서서히 일그러져 가던 검은 호수 속에서 빛이 일더니 이내 거대한 악어의 입처럼 튀어나온 무언가가 그레이브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거대한 몸을 끄집어내며 호수 전체를 강타하는 빛을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9위계 최후 성마법을 밀어내?
이 새끼들 물건이네.
콰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무언가가 내 몸을 강하게 때리자 내 몸은 마치 배트에 맞은 공처럼 가볍게 튕겨 나갔다.
“……”
아릿한 통증이 싸하게 몰려온다.
이거, 좀 아프다.
미소를 지운 채 거대한 빛에 구겨지고 있는 거대한 검은 강, 아니 호수를 지켜보던 나는 그 검은 균열 너머를 가득 메우는 무언가가 나를 직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보는 이를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섬뜩한 그 시선에 나는 한발 내디디며 머릿속에 떠오르던 생각을 내뱉었다.
“큰놈이 넘어오고 있었구나.”
그게 저쪽에서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알아낼 길이 없다지만 말이다.
콰앙!!!!
또 한 번의 거대한 충격이 내게 가해져 왔다.
하지만 제대로 공격이 들어오기도 전 허공에서 투명한 무언가의 벽이 내 몸을 보호했다.
콰직!!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공기마저 일그러뜨리는 무형 무취 무색의 공격은 내가 쳐둔 수십 겹의 방어마법조차 뚫어버리며 밀고 들어왔다.
물론, 한번 기습을 당했다고 두 번 당해줄 정도로 어리숙하게 살아온 내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 마나의 움직임조차 느껴지지 않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마나를 대량 끌어 올렸다.
투쾅!!!
동시에 무속성의 염동력 마법이 보통의 상식을 뛰어넘은 크기로 순식간에 불어나 폭발하며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렸고 나는 그 반동으로 자리를 벗어나며 손가락 끝에 화염구 두어 개를 만들어 그대로 검은 심연의 균열 너머로 던져넣었다.
콰앙!!!
그러자 나를 공격하려 했는지 내가 있던 장소에 뒤늦게 폭음이 울려 퍼졌고, 뒤이어 날아간 두 개의 화염구가 크기에 맞지 않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일대를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심연의 균열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페르세르크를 끌고 가려던 놈들의 촉수 다발이 튀어나왔던 작은 균열이었고.
이번엔 그런 균열 수십 수백 개가 뭉쳐야 나올법한 어마어마한 사이즈였다.
작은 사이즈야 무식하게 힘으로 찢어버린 경험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보옥을 사용해 육체와 혼의 완전 동기화를 이루고 있던 당시와는 다르게 지금의 나는 일부러 힘의 완전 회복 여부에 틈을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걸 준비해온 건지.
이런 상황이니 주신 프리아 여신이 발등에 불 떨어진 것마냥 그 난리를 피워댔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 정도로 거대한 의지가 급하게 상황을 유도할 리는 없으니.
나는 우선으로 아공간에서 꺼낸 부적 몇 장을 허공에 부유시켰다.
그리고는 양손을 짝! 소리 나게 부딪히며 눈을 감았다가 빠르게 떴다.
[2급 주박술]
[천뢰봉금]
동시에 부적 몇 장이 마치 수백 장으로 늘어난 것 같은 환영을 일으켰고 그 안에서 거대한 흑빛의 창이 쏟아져 나와 호수 전체를 관통했다.
이미 9위계 성마법은 저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오며 완전히 상쇄된 지 오래였다.
이 땅에 존재하는 힘에 상당한 면역력이 있는 건지, 다른 요소로 커버치는 건지 몰라도 지금 튀어나오는 놈은 내가 이전 실험을 해댔던 살점 덩어리마냥 주는 대로 통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콰앙!!!
이윽고 후방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에 몸이 크게 흔들렸지만 나는 손을 모은 채 몸 안의 도력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검은빛으로 변한 호수는 마치 거대한 하나의 육체가 된 것처럼 창에 관통되어 흔들거렸다.
구우우우우우우!!
물 대신 끈적거리는 타르처럼 변해버린 새카만 그 괴물은 거대한 창에 몸을 꿰뚫린 채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냈다.
예상은 반 정도 들어맞았다.
2급 주술인 천뢰봉금은 흑창에 꽂힌 이의 힘을 모조리 빨아들여 힘을 앗아 스스로 제압당하게 만드는 방식의 주술이었다.
하지만 그런 흑창 수십 개에 관통당하고도 큰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이놈들은 대개 모든 힘에 치외법권이라는 사기성을 띠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8서클]
[코로나 브레이크]
8서클 이상급 대폭염마법을 쏟아부어 버리자 아주 조금씩 놈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살점 덩어리는 대충 4~5서클 정도의 힘부터 면역이 떨어지면서 슬슬 공격이 먹히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이놈은 5서클론 어림없고 그보다 한참 상위 8서클 정도에 이르러서야 아주 조금씩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제대로 된 효능을 보기 위해선 그 이상급의 마나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지만.
봉인 주술에 당했으면서도 쉼 없이 몸을 끄집어내는 괴물은 형태를 고정 지어 구분하기가 어려운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비슷한 모습을 꼽아보려 해도 형태 자체가 규칙성 없는 거대한 살점 덩어리라면 더 말해 무엇할까.
투쾅!!!
그리고.
자신을 봉인한 내 행동에 화가 난 듯 놈의 눈이 번뜩이기가 무섭게 또 한 번 무형 무취 무색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한번 당한 것에 두 번은 안 당한다.
순식간에 블링크로 파고든 나는 끈적끈적한 무언가를 줄줄 흘리고 있는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법이나 신성마법, 사령마법에 비해 그나마 주술은 조금 먹히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비슷하지만 역시나 다른 세상의 기술인 무공은 어떤지 한번 보자.
[빙마신공 오의]
[극빙신장]
사파로 유명했다던 빙마신궁이라는 곳에서 내 무공 스승 독고준이 훔쳐 배워왔다는 자하빙공의 원류는 분명 그와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장담할 수 있었다.
단순 위력만 따지면.
제대로 빙마신공을 익혀온 본래 무공의 주인 이상의 위력을 끌어낼 수 있다고.
짜드드드득!!!!
방출된 내공이 마치 거대한 용이 뻗어져 나가는 것처럼 공기를 얼려버리자 섬뜩한 한기가 일대를 순간적으로 장악했다.
마나를 정순하고 정밀하게 나누는 데에 익숙한 무공은 화력에 몰빵한 이세계의 검술과는 확실히 다른 인종 같은 느낌이 강했다.
거대한 냉기의 폭풍에 노출된 거대한 놈의 육신은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더뎌지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콰아앙!!!!
서서히 조여오는 얼음이 마치 귀찮다는 듯, 거대한 심연의 괴물이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꾸물럭거리는 게 전부일 것 같던 살점들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단순 검은 살점 덩어리에 불과했던 놈의 육신이 서서히 증식하기 시작하더니 그 안에서 기괴하게 생긴 촉수 다발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형태는 내가 알고 있던 그 심연에서 가져온 촉수 생명체와 매우 흡사했다.
[우린 하나다.]
그리고.
거대한 살점 덩어리가 어느 정도 나왔을 때.
나는 살점 덩어리의 중앙에 생겨난 눈동자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육성이 아닌 정신교감에 가까웠다.
[우린 모두 초월체의 의지로 모여들지니.]
“……”
[그 의지가 완벽해질 때 반드시 우리의 염원을 이루리라.]
“거 못 알아들을 소리나 하고 자빠졌네.”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내가 대규모 8서클 화염마법을 펼쳤다.
대충 확인할 것은 다 했으니 더 늦어지기 전에 태워버려야 했다.
잘 먹히지 않는 공격이라고?
계속 쏟아붓다 보면 놈도 견디는 데에 한계가 생기는 법이렷다.
콰앙!!!!!
하지만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균열에서 점점 튀어나오는 이 살점 덩어리같은 괴물의 생명력은 질겼던 모양이었다.
거대한 폭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증식을 시작한 놈의 육신은 점차 마법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 8서클의 화염마법조차 크게 통하지 않는 상황까지에 이르렀다.
2급 주술이었던 봉인은 이미 대부분 풀려버린 지 오래였고 그 외에 내가 놈의 육신을 제어하기 위해 걸어둔 수많은 것들이 무효화 되고 있었다.
그것들이 단순 힘을 잃어 무효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상대측이 점점 더 위험할 정도로 강해지고 있다는 것.
“흐음……”
단순히 실험을 즐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곧 비어있던 내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살점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끝을 고하리라. 수백만, 수천만의 염원이 모여 만들어진 이 육신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미물이여.]
[우리는]
[하나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울리는 수많은 목소리는 확실히 효율적으로 사람을 빡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마지막 확인 차원에서 헬파이어를 만들어내 던져보자 역시나 싶을 정도로 큰 효과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9서클 마법까지 무시하기 시작하는 그 위험천만한 육신이다.
이런 놈이 대륙에 풀렸다간 말이다.
아마 오래가지 않아 생명체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멸살하리라.
고민은 깊었고, 결심은 짧았다.
한 발을 내디딘 나는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넘긴 뒤 천천히 금기의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오로지 내 육신에 한해 규칙을 어기는 금기의 힘은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효능이 천차만별이 된다.
어차피 페널티 먹은 것, 제대로 효율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9서클 마법조차 제대로 먹히지 않게 되어버렸다.
신성력은 신이 힘을 잃으며 영향력이 약해졌고.
유일하게 효능이 있던 주술도 슬슬 익숙해졌는지 제대로 된 효능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잘 알고 있어도 못 막는 걸 때려 박아 주는 수밖에.
아공간에 손을 밀어 넣은 나는 곧이어 커다란 스태프, 초월의 종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내 육신에 가해진 딱 한 가지 제약을 금기의 힘으로 강제 무시하며 눈을 번뜩였다.
공격이 안 먹힌다고?
이제는 완전히 튀어나올 때까지 구경해야 한다고?
아무런 대책 없이 내가 즐기듯 너와 놀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네.
9서클 마법도 견뎌내기 시작한다면.
어디, 초월계통 흑마법도 견뎌보던가.
내 손에서 검은 흑운이 피어나오기 시작했다.
파괴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초월계통 흑마법에 금기의 힘을 더해 놈들이 저항하지 못하게 만든다.
어찌 보면 놈들에게 최대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힘이었다.
거대한 해골이 일렁이듯 검은 안개는 마치 블랙홀처럼 일렁이며 게걸스레 주변을 먹어 치웠고.
그런 흑운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그 튼튼하던 괴물을 포함한 일대 수백 미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우야. 생각보다 너무 센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