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5화
익숙하지 않은 감촉과 육신.
익숙하지 않은 시야의 높이.
익숙지 않은 냄새와 입맛.
하나하나가 새롭지만 씁쓸하게 다가왔다.
사실 그토록 원했던 육신이지만 이것을 얻는 과정에서 그녀가 잃은 게 너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손해는 다름 아닌 한 사람의 존재였다.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벌써 이틀째 식사를 거르고 있는 은발의 소녀가 걱정이 되는지 녹발의 소녀가 조심스레 물어오자 페르세르크는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역시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혼령의 상태까지 합쳐서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그 햇수가 무려 3천 년에 가까운 시간으로 많은 시간을 잠으로 보냈지만 한 생명체가 살기엔 오랜 시간이라는 건 분명했다.
오랜 시간을 마왕으로 존재해오며 누군가에게 존대한 적이 없고, 그 이후 검에 봉인되고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 탓에 가장 크게 괴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말투였다.
“륀느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오라버니와 혼례를 치를 분이라고……”
“아……”
녹발의 소녀 타냐의 말에 페르세르크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시선을 회피했다.
‘데이비, 이놈을 그냥……’
도대체 이 미친놈은 자신이 눈을 돌리는 아주 잠깐을 틈타 어디까지 손을 써놨단 말인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데리고 영지로 복귀하고 감시하는 륀느부터, 말없이 자신에게 최고의 예우를 갖추고, 마치 왕족 대하듯 하는 사용인들, 그리고 어디서 흘렸는지 혼약 상대라며 퍼져있는 소문까지.
얼마나 황당했는지 깨어나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에게 다가온 달의 숲 엘프 수장인 유리아 헬리샤나가 혼약을 치를 때 쓰라며 정령의 축복이 담긴 반지까지 주고 간 사례가 있었다.
그 모든 게 고작 사흘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 온 지 정확히 나흘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본인은 아직 침대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도 상당히 힘겨운 일이기에 당장 멀리까지 나가는 행동은 최대한 지양해야 했다.
그녀가 쓰러지면 데이비의 명령을 받고 자신을 정중하게 모시는 하인스 영지의 사람들에게 미안함만 남을 테니 말이다.
결국, 페르세르크는 그녀의 기억을 되짚어 만나는 이들마다 데이비를 만났을 때 꼭 한마디를 전해달라 부탁을 남겼다.
돌아오면 두고 보자.
물론, 그 한마디가 제대로 전해질 리 없다는 걸 알지만, 그녀로선 당장 데이비를 보고 싶었다.
왜 그랬냐고 따지고 싶기도 했고,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
말없이 생각하던 페르세르크는 자신이 왜 데이비를 노심초사 걱정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각하고는 한 손으로 눈을 감싸 쥐었다.
“모, 몸이 편찮으신가요?”
“괘, 괜찮아요. 식사는 입맛에 맞지 않아서일 뿐 다른 이유는 없어요. 심려를 끼쳐 미안해요.”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타냐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출신 불분명에 안 그래도 마족의 상징이라 치부되는 뿔을 달고 있는 소녀가 나타났다.
본래대로라면 당장 경계하고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으련만.
데이비를 따르는 이들은 세상이 어떻게 뒤집히건 결국 데이비의 말이 우선이라는 듯 그녀를 깍듯이 대접하니 오히려 마족 입장에서 양심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후우…… 조금씩이라도 드셔요. 혹시라도 몸이 불편하시면 의원을 불러들일게요.”
“고맙네…… 아니, 고맙습니다. 타냐 왕녀님.”
“페르세르크님은 오라버니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제게는 언니와 다름없는걸요.”
“본…… 아니, 저는 그리 기대를 받아도 될 사람이 아니에요. 왕녀님.”
“어머, 겸손하셔라.”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곧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보석하나를 페르세르크의 손에 쥐여주었다.
“정령의 축복이 담긴 돌이에요. 몸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설화가 있다고 해서 챙겨왔어요.”
“고마워요. 소중히 할게요.”
평소 성격대로라면 나긋나긋한 표정을 지은 채 느긋한 태도를 보였을 그녀였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런 성격도 꺼내놓을 수 없을 만큼 긴장 상태였다.
“그럼. 쉬세요.”
빙그레 웃은 뒤 문을 닫고 나서는 타냐의 뒷모습을 보며 페르세르크는 표정을 굳혔다.
“미련한 것……”
정말 미련하다고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었다.
타냐에게?
아니,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고 온 장본인에게 말이다.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보니 보이는 것은 늘 그렇듯 맑고 화창한 하늘이었다.
든 사람 자리는 몰라도 난 사람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세상은 데이비의 난 자리를 몰라줬지만, 페르세르크에겐 마치 편안하게 쓰던 육신의 반 이상이 마비 온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괜찮겠지…… 괜찮을 게야.”
정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불안함에 간단한 움직임을 보이는데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모든 사태의 원흉인 데이비가 그녀를 마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마왕이 됨과 동시에 신벌을 받아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녀도 모를 리 없다. 신벌의 존재를 말이다.
문제는 데이비가 받은 신벌은 생각 이상으로 묵직한 힘을 담고 있었다.
주신 프리아 여신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망쳐버린 데이비를 과연 용서할지 아니면 격분하여 정말로 신의 단죄를 내릴지는 그녀로서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일리나도 휩쓸렸다는 점, 그리고 이제 마왕이 아니게 되어버린 자신을 노리고 심연이 어떤 짓을 해올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일었다.
게다가 마왕의 자리.
그녀가 겪어본 마왕의 자리는 한가지 제약을 두게 된다.
막대한 힘을 대가로 마왕에겐 마족을 책임질 의무가 생긴다는 소리였다.
인간과 최근 전쟁을 벌였는데 그런 마족의 왕이 데이비다?
이 사실이 대륙에 알려지면 절대 좋은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걱정되는 것이 한둘이 아녔다.
“그러니 어서 돌아와……”
차라리 붙잡고 왜 그랬냐고 소리라도 지르게.
속으로 그런 푸념을 하는 중이었다.
달칵!
굳게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린 것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페르세르크는 곧 커다란 문 너머 작은 소녀가 고개만 쏘옥 내미는 것을 보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오니샤……왕녀님”
반사적으로 익숙한 호칭이 튀어나갈 뻔했지만,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다.
페르세르크와 에오니샤가 이렇게 독대를 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
말없이 들어온 작은 소녀인 에오니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곱게 넘긴 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연통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마법사라고 들었어요. 실력이 대단하신 분이라고, 그런데 여긴 오라버니의 침실인데 역시…… 익숙하시네요.”
그녀의 말에 페르세르크는 본능적으로 찬장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다.
에오니샤는 아직 정말 어린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관찰력이 좋았다.
“무슨 뜻인가요?”
“별말은 아니에요. 그냥…… 오라버니께서 당신과 함께 있는걸 본적이 없었는데 이곳이 상당히 익숙해 보이셔서요.”
작은 뿔테안경을 고쳐 쓰며 에오니샤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그 말인즉 이곳에 자주 오셨던 분이라는 뜻이겠죠.”
담담한 그 말에 페르세르크는 한 방 먹었다는 듯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특한 동생을 보는 듯한 미소였다.
“어머, 눈치가 빠르시네요. 왕녀님.”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이미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오라버니와 혼례를 치르실 분이라고.
혼약.
그 단어가 왜 그리 어색한지.
말없이 손을 꼭 쥐었다가 편 페르세르크는 곧이어 그녀가 가진 마기를 이용해 찬장을 열었고, 유리아가 준비해둔 여러 가지 기괴한 찻잎 중 그나마 멀쩡한 것을 골라 찻잔에 담았다.
데이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그녀는 아직 혼약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어색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데이비에게 뭔가 다른 감정을 느꼈다는 건 자신도 잘 알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사실 오라버니와 오랜 시간 같이 계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째서죠?”
“습관이 비슷하시니까요. 마치 한몸이었던 것처럼.”
눈썰미가 보통을 넘어섰다.
바리스나 타냐, 윈리의 경우 재능이 좋다고는 하지만 대륙에 널리 찾아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재능이다.
상황과 노력, 재능이 받쳐주면 얼마든지 가능한 경지.
하지만 에오니샤는 달랐다.
그제야 페르세르크는 왜 데이비가 에오니샤를 두고 일리나 데 팔란과 계열은 다르지만, 동급의 전무후무 사기적인 재능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번 보는 것으로 자신의 검술을 만들어낸 일리나.
그리고 저토록 어린 나이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관찰력이 놀라울 정도이며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에오니샤.
어떤 의미에서 정말 데이비의 인맥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어 그녀에게 건네주려던 찰나였다.
“어허! 지금 검문을 피하시겠다는 겝니까?!”
전쟁이 벌어지거나 말거나 조용하던 영지에 오랜만에 시끄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페르세르크는 문득 연합군 소속의 문장을 달고 있는 사내 몇몇을 볼 수 있었다.
기사단을 대동한 채 나선 이들은 분명 연합군이다.
“성국에서 발표를 했다고 해요.”
“발표?”
“네, 신의 계시가 내렸다고 해요. 마족과 뱀파이어를 말살하라. 뱀파이어와 마족의 전면 공적화. 덕분에 지금 성국에선 눈에 불을 켜고 마족이나 뱀파이어를 찾아 들쑤시고 있나 봐요. 그들을 숨겨주거나 도와주면 이단 심판회에 회부한다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찰나, 페르세르크는 문득 창밖의 기사단과 그 기사단을 이끌고 온 사내들의 시선이 그녀가 있는 데이비의 침실로 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니! 고개를 숙여주세요!”
동시에 에오니샤가 깜짝 놀라 페르세르크를 끌어안고 몸을 숨겼다.
“소문을 들었어요. 저들은 마족과 뱀파이어에게 무자비한 이단심판관들이라고. 들키는 순간 매우 곤란해질 거에요.”
이단심판관의 재판은 꽤 유명하다. 악마라고 판단된 이들을 재판에 독자적으로 회부,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까운 유죄확률로 죄가 확정되는 순간 일가족 모조리 화형에 처하기로 유명하다.
지금처럼 구심점이 되는 데이비가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불안한 영지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는가.
그것도 마치 이곳에 마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너무 좋은 타이밍에 찾아왔다.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