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6화
전쟁이 끝나면 해야 할 것은 피해 복구와 상대 잔당의 박멸, 그리고 사후 공적 문제로 나뉜다.
5일 전, 갑자기 전쟁이 끝을 고하면서 그 양상은 우습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산으로 배가 가건, 산이 배로 가건.
중요한 것은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이들이 이번 전쟁의 결과를 두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건 성국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성국은 삼 제국을 제외한 가장 큰 국가로 사실상 단일 무력만으로 치면 삼 제국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대륙 모든 국가에 퍼져있는 신도의 90퍼센트가 주신 프리아 여신을 모시는 교단원인 만큼 그 힘은 보통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천 년 이상 유지되어온 성국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페르세르크는 단호히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 있는 뿔이나 눈동자의 색만 아니었어도 마족이라는 의심을 받을 리는 없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기엔 이단심판관이라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실제로 그녀가 칼디라스에 봉인되어있을 때.
단순히 혼을 빼놓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이유로 마녀로 치부되어 일가족 모두 화형당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던 일리나를 본 적이 있었다.
그 탓에 현 팔란제국의 황제가 격노하여 성국의 지원을 모조리 끊어버렸고, 그 때문에 성국에서 한차례 이단심판관들의 기세를 죽여놓은 사례가 있다.
만약 그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면.
좋지 않다.
당장 그녀는 힘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있는 걸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정쩡한 환각 마법은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법.
조용히 고개를 들어 상황을 지켜보려던 페르세르크는 문득 시종장 베르닐과 실랑이를 하던 연합군의 성기사들이 사라진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에오니샤가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여기 계세요! 절대 나오시면 안 돼요!”
급히 튀어나가는 그녀를 만류하고 싶지만 일어서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이곳은 왕족의 침실입니다. 약속도 없이 이리 영주성에 들이닥치다니요!”
“급작스레 찾아온 점 사죄드리겠습니다. 왕녀님. 하지만 저희도 확인해야 합니다.”
사내의 목소리에 언제 온 것일까.
타냐의 약간 가라앉은 항의가 들려왔다.
“말도 안 되는 폭거를 부리지 마세요. 이곳은 당신들이 공인한 성자의 침실입니다. 성국의 사람이라 하여서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와도 되는 겁니까?”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페르세르크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부릅떴다.
그러자 문 너머의 모습이 서서히 투명화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압니다, 너무 잘 알지요. 성국의 성자님이 쓰시는 침실이라는 걸 어찌 모를까요. 다만, 제보가 있었던 만큼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용서하시길.”
“당신들 지금 큰 무례를 저지르는 거예요.”
“왜 비키지 않으십니까? 정말 문제가 없다면 그저 보여주셔도 되는 일인 것을요.”
“이런 전례는 없었으니까요. 아무리 이단심판이 신성하다 말하는 당신들이라 하여도 이렇게 타국 왕족이 머무는 침실을 멋대로 들이닥치는 건 유례 없는 일 아닌가요?”
타냐의 목소리에 이어 에오니샤의 조용한 항의가 이어졌다.
“지금부터 전례를 만들면 되겠지요.”
“이 일, 반드시 성국에 항의할 겁니다.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시면 당신들은 반드시 파멸할 거야.”
에오니샤가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아예 작정하고 찾아온 듯 비킬 생각도 하지 않는 연합군의 성국 심판관과 성기사들이 한 발짝 더 내디뎠다.
“좋을 대로 하시길. 별문제 없다면 제 목이라도 내어드리지요. 하지만 이건 아셔야 합니다.”
“이 일은 주신 프리아 여신의 계시라는 것을.”
그 말에 페르세르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에 마족인 자신이 있는 것을 들키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빠르게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직 공간 전이 마법은 불가능하고 몸을 숨기는 마법은 들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뿔만 숨긴다면 그래도…….
‘아니, 아닌 게지…….’
아주 작정하고 찾아온 놈들이라면 반드시 그녀에게 마수를 뻗쳐올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생각을 굳힌 그녀가 마기를 슬슬 끌어 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 때문에 이곳의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당당히 마족이라 밝히고……
“아니야…… 아니야…… 대체 어떻게 해야……”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결국, 몸싸움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한 상황에 페르세르크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허, 비키십시오. 이런 식으로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저희도 무력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당신들이 검을 뽑는 순간 이 영지 전체가 당신들을 적대할 겁니다.”
“저희를 말입니까? 저희는 성국의 이단심판관들입니다. 그리고 연합군의 수뇌부이기도 하지요. 지금 사태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데이비 성자는 지금 탈영을 죄목으로 연합군 내에서 찾고 있는 실정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위협해오는 사내의 말에 타냐와 에오니샤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동시에 성기사들이 두 사람을 포위하더니 급기야 두 사람을 육체적으로 제압하기 시작했다.
“꺄악! 이거 놓으세요!”
“뭐, 뭐하는 짓이죠?! 일국의 왕족을 이렇게 막대하다니!! 그것도 그 나라에서!”
격한 몸싸움으로 번진다.
타냐가 궁술에 조예가 있다곤 하지만 근력은 낮은 편이었다.
또한, 에오니샤는 공순이일 뿐 육체 능력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어린아이였다.
“꺄악!”
결국, 비명을 지르는 타냐의 행동에 영주성이 또 한 번 들끓었다.
스릉!!! 차앙!
“그 손 놓아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왕녀 저하께 손을 댄단 말인가!!”
시야 너머로 수십의 병사와 몬미더 근위조장이 나타났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성기사들이 급히 검을 뽑아 들고 대치했다.
“여긴 데이비 왕자 저하의 영지다! 성국의 일원이라는 자가 대륙 유일 성자의 거처를 이리 들쑤셔놓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하아…… 몇 번을 말하게 하십니까.”
담담하게 말한 그가 몬미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빠악!!!
그리고 거침없이 그를 걷어차 날려버렸다.
“커헉!”
그 발길질에는 성력이 묻어있었던 탓에 이제 마나를 조금씩 다루기 시작하는 몬미더가 견뎌내기엔 어려운 일격이었다.
“끄헉!! 꺽!”
“단장님!”
“이…… 이놈들!!”
챙!! 챙!!
순식간에 검이 교차하고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에오니샤는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타냐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쿨럭…… 쿨럭……”
피를 토하는 몬미더가 몸을 일으키려 들자 성국의 이단심판관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 눈높이를 맞췄다.
“이보세요. 하인스 영지의 근위장님.”
“……”
“내가 이 계급에 당신이 겨누는 검에 멈춰야 합니까?”
“이 수모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마음대로 하세요. 아! 참, 잊고 있는 모양인데……”
짧게 중얼거린 그가 송곳처럼 얇은 칼을 꺼내 들었다.
푸욱!!
그리고는 미련 없이 몬미더의 어깨를 찔렀다.
“크아아아악!!”
“꺄악!”
“몬미더!!”
놀란 두 왕녀의 외침과 고통에 찌든 몬미더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마족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근위장을 연행해. 그리고 두 왕녀님도 조심히 모셔라. 본국에 연통을 보내고 지시사항이 내려오는 대로 재판을 시작한다.”
“이, 이거놔!!”
철컥! 철그럭!“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며 두 왕녀를 붙잡는 성기사들과 몬미더를 제압하는 성기사들의 행동이 도를 넘기 시작했다.
뿌득……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페르세르크는 곧 주먹을 부러질 듯 강하게 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팡이로 몸을 지탱한 채 일으킨 그녀가 숨을 짧게 들이켰다.
어쩔 수 없다. 이단심판관의 재판은 말이 재판이지 유죄 확정과정일 뿐이다.
어쩌다 성국이 저렇게 겁 없는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저 세 사람을 지키리라.
서서히 그녀의 손에 마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마왕이었던 그녀였다.
그녀의 힘은 보통수준은 아니었다.
달칵……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귓가로 단조로운 목재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그리고 주변 공간을 장악하는 듯한 고요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르세르크는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는 가느다란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환자는 환자답게 침대에서 벗어나지 마라. 의사 소견 무시하다간 아픈 주사 놔주는 수가 있다.”
느긋하면서도 조용한 목소리였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든 페르세르크는 곧이어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았다.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
160 정도의 작지도 크지도 않은 키.
호리호리한 체격까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누구……”
하지만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쉽게 구분하기 힘든 호리호리한 체격의 인영을 심연의 권능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가 본래 저런 모습일 리가 없는데.
“데…… 이비?”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하던 페르세르크는 그녀를 지나쳐 침실 문 쪽으로 걸어가는 인영을 향해 소리쳤다.
“데이비?! 데이비야?!”
“그래.”
평소 그와는 다른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느낌은 확실했다.
대체, 신벌을 받으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만 그런 것을 제쳐놓고서라도 그녀는 기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뜻이니 말이다.
모습이 좀 변한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와 말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낸 것이 벌써 몇 달, 어지간한 이들이 몇 년을 함께해온 것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해온 두 사람이었다.
끼익……
이윽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힌 데이비는 밖에서 문을 무수고 들어오기 위해 검자루를 들고 있는 이들을 그대로 직시했다.
페르세르크에게 보이는 것은 그저 왜소한 체격이 되어버린 데이비의 뒷모습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변한 건 외형뿐.
그는 여전히 데이비였다.
“x새들이 여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오나.”
퍼엉!!!
기이한 소리와 함께 성기사 두어 명이 그대로 벽을 부수고 튕겨 나간다.
“어?”
당황한 이들의 표정이 문밖으로 보였다.
그리고 가장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성국의 이단심판관이 보였다.
이윽고 데이비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돌렸다.
포승줄에 묶이고 있는 몬미더와 강제로 연행되고 있는 두 왕녀가 보였다.
“어이.”
이윽고 잠시간 침묵하던 그가 이단심판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
“네 상관 x새야.”
서걱!
대답을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붉은 섬광이 번뜩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단심판관 관리의 목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제법 강한 힘을 지닌 이단심판관이었지만.
그의 최후는 너무 허무할 정도로 빠르고 깔끔했다.
“누구 몸에 감히 손대고 있나.”
뭔가 제대로 열 받은 듯한 싸늘한 목소리였다.
이전엔 분명 저런 사태에 놓여도 저렇게 싸늘한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는데.
페르세르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