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8화
그가 말한 마법이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발현되고 있는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쿵!
“크, 큰일 났습니다! 법왕성하! 사, 상공에서 대규모 마나가 감지……”
하늘에 뜬 마법을 눈치채고 급히 보고하러 뛰어들어온 사제 하나가 데이비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슬립]
털썩……
애꿎은 살생은 좋은 선택이 아니라 판단했다.
“단순히 재운 것뿐입니다.”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신관을 향해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둔 데이비가 입을 열었다.
그곳에 있던 리나를 제외한 법왕과 앨리스는 저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마법사에게 영창이란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아무리 하급 마법이라도 저렇게 물 흐르듯이 무영창 마법을 쓴다?
그것도 저항력이 제법인 상급신관이 눈치채기도 전에 적용될 만큼 빠르고 강하게?
상식이 안 통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알지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앨리스는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앨리스 성녀후…… 아니, 대주교.”
“법왕성하. 부디 이 일은 제게 맡겨주세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앨리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앨리스님, 이리 다시 보게 되어 조금 유감이네요.”
“그러네요. 본래대로라면 아카데미의 교편을 잡는 교수님이 되기 위해서 떠나고 있어야 했을 텐데 말이죠.”
“그 제안은 유효합니다. 적어도 당신이 이 사태의 주범이 아니라는 게 확실하면요.”
그 말.
앨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말인즉, 조금이라도 연관되어있다간.
절대 곱게 놔두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강했다.
반대로 앨리스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데이비 왕자는 지극히 성자답지 않게 포악한 성미를 지니고 있다. 욕심도 많고, 굉장히 독선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그만큼 상식적인 인간이기도 했다.
잘했으면 상을 받고, 잘못했으면 벌을 받는, 이 지극히 단순한 이치에 충실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이기에 정황판단, 상황정리를 못 할 리도 없는데.
어째서 단신으로 연통도 없이 이곳까지 쳐들어와 무력시위를 시작한 것일까.
아니, 단순히 무력시위가 아니라 이건…….
협박에 가깝다.
“걱정 마세요. 성국 자체와 정교 이단 심문회가 옛날부터 지지고 볶고 싸운 건 나도 압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성국 전체가 갑자기 내 뒤통수를 후려갈길 리 없잖아요?
계시가 내렸다면 가능할 수도 있긴 한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아무런 과정 없이 들이닥칠 만큼 성국의 지도자들이 멍청하진 않으니.
상대가 평민도 아니고 현재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거대 세력의 수장이라면 제아무리 성국이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하인스 영지의 영주는 성국과 주요 거래 대상이기도 했다.
고작 작은 영지 하나이지만 알만한 국가에서는 이미 라운왕국보다 하인스 영지를 더욱 경계하는 입장이었다.
“이, 이건 어디까지나 정교 이단심문회의 독단이에요.”
정교 이단 심문회는 성국의 입장에서는 앓는 이와 같았다.
버릴 수도 없고, 끌어안고 있자니 이 미친놈들이 벌이는 짓이 보통의 수준을 넘었다.
“뭐, 성국 내에서는 그 권력을 이용해 먹는 이들이 상당수 있겠지만요.”
피에 젖은 이단 심문회가 왜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는데.
단순히 사명을 위해서? 그럴 리가.
“데이비님! 정말 오랜만이에요오! 그때 팔란 제국에서 뵌 이후로 처음이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이 머릿속이 꽃밭인, 뼛속까지 이타적인 성녀 후보 리나는 데이비가 마냥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첫 만남부터 데이비에게 유별나게 호의적이었으니 말이다.
후다닥 뛰어가 그에게 다가가려는 리나 성녀 후보를 앨리스가 재빠르게 붙잡고는 귓속말을 했다.
‘제발 부탁이니 잠시만 가만히 있어요.’
누군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고 해결해야 할지 머리부터 굴리고 있는데 이 꽃밭은 그딴 건 안중에도 없다.
무엇보다.
앨리스가 보기엔 지금까지 본 어떤 경우보다 저 웃고 있는데 데이비가 가장 무서워 보였다.
외향이 바뀌었지만, 특유의 그 섬뜩한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네요. 리나 성녀 후보님, 소식 들었습니다. 최종후보가 되셨다고.”
“에헤헤…… 과분하게도.”
그리 말하면서도 양손을 어깨에 올려놓고 아이처럼 순수하게 좋아하는 그녀였다.
애초에 리나 성녀 후보에겐 지저분한 정계 싸움 같은 건 관심이 없었다. 그저 지독하리만치 이타적인 사람일 뿐이었다.
해맑게 웃는 그 미소에 데이비의 싸늘한 미소가 살짝 누그러졌다.
앨리스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소식 들었습니다. 계시를 받은 정교 이단 심문회에서 왕자님의 영지에 과격한 검문을 행했다고요,”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떤 놈이 검문 한번 당했다고 국가를 협박할까.
“그 일은 심히 유감입니다. 다만 꼭 알아주세요. 그 일은 엄연히 성국의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신께 맹세코, 법왕성하나 여기 계신 리나 성녀후보, 그리고 저는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
“맹세까지 하신다면야, 그래도 할 건 해야지요.”
담담하게 말한 그는 자리에 앉은 채 손을 허공에 밀어 넣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 커다란 스태프가 끌려 나왔다.
“커져라! 뚝딱.”
우웅!!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또 변했다.
앨리스의 날카로운 기감에 걸린, 하늘에 뜬 거대한 마나 덩어리들이 마치 거대한 운석처럼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단 심문회가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그런 강압수사를 해온 게 어디 한두 번입니까. 이해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 치들이 겁을 잃고 선을 넘었더라고요.
“죄가 없으면 아무 문제 없다. 뭐, 취지는 좋은데 말입니다. 그 과정이 좀 거칠다 보니 제 사람이 좀 다쳤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성국에서 부패한 신관들이 서로를 처리하는 용도로 쓰거나 권력을 휘두를 때 이단 심문회를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아는데.
“이, 일단 진정하세요. 데이비 왕자님. 이런 식으로 성국과 불화가 깊어지면 서로 좋을 게 없잖아요.”
앨리스가 급히 그를 진정시키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것이다.
“좋을 게 없다라……”
쾅!!
“크, 큰일 났습니다! 성하! 하, 하인스 영지에서……!”
털썩……
두 번째 신관이 쓰러졌다.
“저 신관분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궁금합니까?”
“……”
“하인스 영지에서 성국과의 모든 거래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성국에 매번 내던 지원금을 모조리 끊었고요.”
그 금액이 상당해 성국에서도 새로운 포교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아는데요.
그 말에 앨리스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랬다.
하인스 영지는 일개 영지가 벌어들이는 수익의 범주를 벗어난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달의 풀 사업, 엘프와 드워프의 물품을 중간 교역하고,
그 탓에 각 영지 기준으로 소량의 지원금을 받던 성국은 단번에 대량의 돈을 챙기게 되었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로운 포교 사업까지 야심 차게 준비했다.
“그런데 빌어먹을 사원 몇몇이 투자자의 집에 가서 투자자의 가족을 폭행하고 협박했네요?”
이러면 어떻게 할까요. 투자금 회수해야겠죠?
“우선 성국과의 거래는 끝입니다. 지원금 또한 이제 더 이상 주지 않을 겁니다.”
주기 싫다고 안 줘도 되는 게 아니다.
“그게 싫다면.”
담담하게 중얼거린 그가 눈을 반짝였다.
동시에 환하던 바깥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비 내리겠네요.”
툭……툭…투두둑…쏴아아아아아아!!!!
그 말과 함께 때아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앨리스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나섰다.
“이, 일단 진정하세요!”
“그리 좋은 답변은 아닌 듯합니다.”
콰르르릉!!!
급기야 뇌운이 동반되기 시작한다.
단순 우연 같은 자연현상으로 치부하기엔 데이비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류가 보통의 수준이 아니었다.
콰르르릉!!!
챙그랑!!
“어이쿠, 실수했네.”
그리고, 그런 위협이 실감 나게 하고 싶기라도 했는지 갑작스레 내리친 벼락이 더욱 강력한 위세를 드러냈다.
“꺅!”
짧은 비명을 내지른 리나 성녀 후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
“저…… 데이비 왕자님, 혹시 화나신 건가요? 안되요오……. 모처럼 예쁜 얼굴인데에……”
악의 없는 저 걱정에 무어라 답을 할까.
데이비의 미소가 미묘하게 싸늘해지자 앨리스는 속이 철렁하는 기분이 들어 퍼뜩 나섰다.
이 정신 나간 꽃밭이 진짜!!
“알겠어요! 말씀하시는 부분 최대한 참작할게요! 거래를 끊는 건 왕자님이 좋을 대로 하세요! 하지만 전쟁은 안 됩니다! 절대요! 이건 왕자님과 성국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녀의 필사적인 외침에 데이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전쟁 금지 조약이 있는 마당에 설마 제가 전쟁이나 일으키려고 왔을까요. 그냥 통보하러 온 겁니다”
언제 그딴 거 신경 쓰고 서대륙의 ‘현’ 국을 털어먹으셨나요?
그 반박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앨리스는 알고 있었다.
동생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던 ‘현’ 국에 찾아간 이 행동주의자이자 과격하고 난폭하기 그지없는 성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이다.
“이번에 하인스 영지에 개짓을 하게 주도한 자들만 찾아주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한 달, 한 달만 주세요. 한 달 안에 이번 사태를 정리하겠어요. 아무리 데이비 왕자님이라도 이 일은 성국이 나서야지 왕자님이 나서서 이리하시면, 결코 왕자님의 이미지에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거, 가장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그 말에 데이비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뭐, 좋습니다. 앨리스 대주교께서 나름대로 도움을 주기로 하셨는데, 너무 화만 내면 좋진 않겠죠. 다만, 한 달은 너무 기네요. 사흘쯤 합시다.”
“사, 사흘?! 안 돼요! 정교 이단 심문회는 저희 성국의 수뇌와는 독립된 단체에요! 서로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요! 사흘은 너무 시간이 짧아요! 적어도 이주는……”
“사흘.”
“데이비 왕자님! 본래 삼십 일이 걸리는 일을 사흘 만에 어떻게 해결해요?!”
“사흘.”
쿠르릉!!!
마치 얼마 안 남았다는 듯 서서히 마법이 굉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정말!! 일주일!”
“사흘.”
“……”
절대 번복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모습에 앨리스는 덫을 밟아도 제대로 밟았다고 생각하며 법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알겠어요. 사흘……. 하지만 약속해주세요. 당신이 나서지 않겠다고.”
체념한 듯 중얼거리는 그 모습에 데이비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동시에 바깥의 뇌운이 모조리 사라지고 마법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증발해버렸다.
“그럼……”
“뭐, 그래도 사흘이 너무 짧은 건 사실이긴 하죠.”
“……어떻게 하면 기한을 늘려주실래요?”
앨리스는 거의 반쯤 자신이 휘말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안을 던졌다.
시작은 이쪽에서 했으니 끌려다녀도 억울하다 하소연할 수도 없다.
‘아아……아아아아!! 빌어먹을 광신도 X끼들!!’
속으로 정교 이단 심문회 내에 있는 광신도들을 부득부득 갈아대던 앨리스는 겉으로는 자애로운 미소를 거두지 않고 물었다.
“가능한 선이라면……”
“성역에 이걸 좀 보관해주세요. 그러면 기한을 일주일 정도로 늘려드리죠.”
데이비의 이어지는 말과 함께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은 돌멩이를 본 앨리스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게…… 뭔가요?”
“제 취미생활에 쓰일 강화부품입니다. 어렵게 구한 데다가 이제 다른 곳에서는 못 구하는 귀한 겁니다.”
요즘 제 취미작품들의 강화가 영 더디더라고요.
이것만 쓰면 벽을 넘은 초유의 작품들이 나올 거 같은데.
그 말에 앨리스는 생각했다.
이 인간은 대체 성국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