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3화
조용한 침묵 속에서 모두가 시선을 모았다.
바닥에 쓰러진 베르나르도와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고르네오 남작, 그리고 페니실린 수석연구원.
죽어있던 남성과 그 남성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오열하던 소녀까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던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이의 행동에 주변이 찬물에 끼얹어진 것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이익!!!”
“치료소에서 가장 냉정해야 하는 건 보조하는 연금술사나 신관, 치료받는 환자도 아니야.”
싸늘하게 말한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그는 베르나르도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리며 말했다.
베르나르도의 덩치가 워낙에 큰 탓에 체격이 왜소한 이가 한 손으로 들어 올리기엔 분명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솜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 아니 그의 손에 번쩍 들어 올려졌다.
“커헉!”
“바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원이다. 의원이 패닉에 빠지는 순간 그 누구도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알아들었나?”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말에 모두가 침묵한다.
“고르네오 남작님. 이놈, 가르친 인간이 누구입니까.”
갑작스레 화살이 날아들자 고르네오 남작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나, 나요. 베르나르도는 내가 가르쳤었던 학생이오.”
“그럼 알겠네. 의원으로서의 마음가짐.”
“……”
“그 첫째.”
“의사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파악!!
“잘 알고 있네.”
시원하게 어깨를 두드리는 그녀가 매력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목소리가 남성치고는 상당히 가느니 차라리 남장을 한 여자라고 보는 게 옳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베르나르도였다.
멍하니 있던 베르나르도는 문득 좀 전까지 죽어있던 환자의 손을 잡고 있던 제 손에서 묘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맥박 진동이었다.
“아, 아니!? 환자가!”
깜짝 놀란 베르나르도는 대화하던 것도 잊은 채 몸을 돌려 환자의 상태를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떴다.
보통 심장이 정지한 환자를 되살리는 데엔 강한 심장 압박이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분명 멈춘 심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의 귓가에도 은은하게 울려 퍼질 정도였다.
“오, 오라버니? 오라버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오라비가 살았다는 사실이 놀라운지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소녀가 눈을 부릅뜨며 제 오라비의 뺨에 손을 올렸다.
찰싹!
“떨어져. 병균 옮아서 네가 죽으면 네 오라비는 마음이 편할 거 같냐?”
싸늘한 물음에 소녀가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지금부터 너희 전부를 살려줄 테니. 걱정 붙들어 매고 치료받아.”
“저, 정말이세요? 오라버니와 저……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살 수 있는 거죠?”
“그래.”
“아.…… 아아…… 이건 신의 기적이야…… 성녀…… 성국에서 말씀하신 성녀님이시군요!!”
“……”
확고한 대답은 가끔 사람에게 큰 안심이 되는 편이다.
“썅. 이놈의 머리 때문에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다 이거지.”
다만, 그 안심의 방향이 잘못되었는지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 * *
내가 왔을 때 상황은 개판 오 분 전이었다.
당장 숨이 넘어간 환자가 보였던 것도 있었다.
다행히 충격 요법으로 다시 살려내긴 했지만, 사실 요행을 바라고 한 행동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만큼 위급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실패했다면?
강제로라도 살려야지.
나는 내 손에 들어온 환자가 허망하게 죽도록 둘 만큼 안일한 의원이 아니다.
긴장이 풀렸는지 그대로 기절해버린 소녀를 다시 들 것으로 후송하는 병사들을 뒤로한 채 나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뭣들 합니까. 다음 환자는 사람 아니에요? 어이 너, 당장 튀어가서 환자 진료 보고서 가져와. 고르네오 남작님, 남작님께서는 이후 현 상황의 브리핑을 도와주세요. 그리고…… 이쪽은…… 처음 보는 분이네요. 연금술사 십니까?”
“아…… 예, 페니실린 수석연구원입니다.”
“아. 페니실린 수석연구원. 유명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빙그레 웃어주자 페니실린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물러났다.
“저도 남자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시고.”
“커흠!! 커흠!”
그 말에 페니실린은 마치 큰 잘못을 저질렀다가 들킨 아이처럼 허둥지둥거렸다.
하지만 곧 자신도 무언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쪽은…… 뭐, 멸균 시약이나 더 만들어주세요.”
동시에 그가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저런 걸 두고 뭐라고 하였던가.
페무룩?
이윽고 그들을 뒤로한 채 떠나려는 나를 향해 고르네오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 데이비 왕자님이십니까?”
“예.”
망설임 없는 그 대답에 나머지 두 사람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데이비 올 라운왕자!”
“세상에……”
쉽게 믿기지 않는 듯 보였다.
“분명 오우거도 한 손에 때려잡는 어마어마한 거한이라고……”
“한 손으로 기사의 머리통을 쥐어 터뜨리는 괴물이라고 들었는데……”
나에 대한 인식이 대체 어떻게 되어있었던 것인지.
내가 말없이 고개를 돌려 고르네오 남작을 바라보자 그가 뜨끔한 얼굴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 그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왕자님. 그저…… 소문이 조금 과장되어서……”
나이 지긋한 그가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두어 개의 주삿바늘을 망설임 없이 버리고는 다시 약품을 챙겨 들었다.
“이 병의 이름이 뭐라고요?”
“검은 죽음이라 합니다. 온몸에 검은 반점이 생겨서 죽는다고 해서요.”
“융해 가속 바이러스와 비슷하죠?”
“아…… 예. 하지만 색이 다르고 증상이 조금 다르더군요.”
“맞아요. 다만 이름은 바꾸셔야겠네요. 병명은 그 병의 증세를 유추하게 하니까요.”
담담한 그 말에 고르네오 남작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서, 설마, 이 병이 뭔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알죠. 이병에 걸린 환자 치료횟수가 3만을 넘었는데.”
무슨 병이건 변수는 확실히 잡으라면서 말입니다.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게다가 3만 명 가까이 치료하는데 중앙 질병 관리단의 의회원이었고, 이제는 의학 아카데미의 교수를 맡은 그가 모르는 일이라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 모습에 데이비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믿어볼래요? 아니면 지난번처럼 의심하실래요.”
“믿어야지요! 암! 다, 당연히 믿습니다!”
그 외침에 데이비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 병은 연초엔 태양풍과 자외선의 영향으로 흑색이 아니라 백색으로 발병해서 주로 착각들 많이 합니다. 치료방법은 같은데 말이죠.”
데이비의 말에 베르나르도와 페니실린이 놀란 얼굴로 고르네오 남작을 보자 그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데이비 왕자님.”
“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의원이 사람 살리는 데에 고민할 이유는 없어요.”
물론, 나는 대륙 의원 자격증 같은 건 딴 적 없지만요.
스스로 돌팔이라 말하지만, 이곳에 있는 의원들 그 누구도 그를 부를 수 없었다.
돌팔이 의사라는 단어로 말이다.
* * *
“흑사병과 비슷하지?”
“흑사병? 흑사병이라면 그대의 전생에……”
“비슷하긴 한데, 감염경로가 조금 달라. 그리고 진짜 흑사병에 비하면 전염속도도 조금 느린 편이고.”
담담하게 말하며 나는 방금까지 거품을 물고 있다가 안정된 환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치료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려. 못해도 여기서 한 달은 체류해야겠는데.”
“치료 약은?”
“만들어야지. 다만 대륙 곳곳에 퍼진 이 망할 병은 시기에 따라서 변이해. 그러니까 이곳의 병을 파악한 후에 그에 맞춰서 약을 만들어야 돼.”
담담하게 말한 내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몇몇 귀족과 고르네오 남작이 있었다.
“오오…… 데이비 올 라운 왕자님. 대륙에 명성이 자자하신 분을 뵈니 영광이오. 나는……”
“데이비 왕자님, 나는 겔리만 백작이라고 하외다. 이리 만나서 반갑소. 나는 이리 아름다운 왕자님을 뵌 적이 없소. 그야말로 미공자 그 자체로군.”
언제는 잔뜩 무시하고 했던 주제에.
베르나르도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나는 그들과 손을 마주 잡고 빙그레 웃어주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 손은 놓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방금까지 환자를 만지고 왔는데.”
내 말에 악수하던 귀족이 화들짝 놀라 내게서 떨어졌다.
“커흠! 커흠!”
“쯧.”
짧게 혀를 찬 나는 그들을 심드렁하게 지나쳤다.
‘빌어먹을 계집애 같은 놈이……’
뒤에서 들리지 않게 소곤거리는 것 같은데, 다 들린다.
망설임 없이 흑마법을 끌어올려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빠악!!
“커헉!”
무형의 무언가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쳐 천막 밖으로 날려버리자 몇몇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생님은 앞으로 모근의 여신께서 친정으로 도망치실 겁니다.
그놈의 머리가 자랑인지 뭘 덕지덕지 바르실 만큼 각별히 관리하시는 모양인데.
탈모 저주의 재앙 앞에 관리가 무슨 소용입니까.
“우선 지도를 준비하라 하시어 일대의 지형이 모두 드러나는 지도를 준비했습니다만……”
고르네오 남작은 내가 왜 이런 모습으로 변한 건지 아직도 의문인 듯 보였다.
그가 준비해놓은 회의실 자료들을 훑어보던 나는 지도의 한 곳을 짚었다.
“여기 보입니까?”
내가 짚은 것은 격리구역을 나타내는 문양들이었다.
“예……. 일대의 병이 발병한 격리구역이지요.”
“지도를 보면 병의 원인이나 감염경로를 알 수 있습니다.”
“지도를 말입니까?”
그가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남작님 이 강 말입니다. 이 강이 어디서 시작된 건지 보세요.”
내 말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포르마크 평야에서…… 아!!”
그 말과 동시에 그가 눈을 부릅떴다.
“그, 그렇군요. 포르마크 평야는 마족과 뱀파이어와 연합군이 전쟁을 벌인 곳이군요. 용사 레이나님이 소규모 군세를 이끌고 적들을 대량으로 쓸어버린 대승의 장소……”
“그곳에서 발생한 병원균이 한가지 생명체를 타고 쭉 이어져 왔을 겁니다. 때문에, 이 강에 인접한 영지들이 죄다 이 꼴이 났고요.”
내 말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 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금껏……”
“모든 가능성은 염두에 두셔야지요. 륀느.”
이어지는 내 말에 천막 밖에서 은발의 꼬마 소녀가 맨발로 자박자박 들어왔다.
대부분 병균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복과 보호장비를 장착하고 있는 데에 반해 나와 륀느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말이다.
“데이비님. 명령하신 민물고기. 채집완료. 륀느가 낚시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등허리에 난 날개를 팔락거리는 륀느였다.
날개 깃이 젖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지체된 것으로 보아선……
“농땡이 피우지 말고 바로 손으로 낚아챘어야지.”
“하지만 륀느의 날개. 매우 민물고기의 어그로를 끌기 좋도록 유동 가능.”
“쯧.”
눈을 반짝이며 항변하는 녀석에게 더 말해 무엇할까.
륀느가 건네준 수십 센티의 민물고기를 받아든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고르네오 남작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놈이 범인입니다.”
“이건 자나르라는 민물고기가 아닙니까. 껍질에는 항체를 높여주는 물질이 많아서 의약품의 재료로도 자주 쓰일 텐데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히 껍질이 병균 차단에는 좋지요. 좋긴 하죠. 그 때문에 이 병이 생기는 겁니다. 이번 돌림병인 [백흑담]은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가 오히려 다른 바이러스에 매우 약하거든요. 그래서 이 물고기 안에 몸을 숨기고 증식한 겁니다. 다른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게요.”
이놈의 물고기가 몸에 좋은 부분을 꼽으라면 껍데기에 있다.
그 말인즉, 내부로 무사히 들어가기만 한다면 다른 바이러스로부터 이 빌어먹을 백흑담 바이러스가 잘 살아남는다는 소리였다.
“하, 하지만 바이러스가 어떻게……”
“이거죠.”
그렇게 말한 내가 근처에 있는 작은 나이프를 뽑아 그대로 물고기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손을 밀어 넣었다가 그대로 무언가를 빼냈다.
“윽!”
동시에 사방에선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은 길이 5센티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기생충이었다.
“윽!”
남아있던 귀족들은 그 흉측한 모습에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고, 몇몇은 구토 증상을 보이며 도망쳤다.
하지만 고르네오 남작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니베린촌충이군요. 무해한 기생충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화르르륵!!
화염을 일으켜 기생충을 불태워버린 나는 피가 잔뜩 묻은 손을 가볍게 털어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독성이 없는 액체 두 개가 만나서 갑자기 맹독이 된다는 이야기, 못 들어봤습니까?”
“그, 그럴 수가!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왜 안 돼요. 눈앞에 있잖아요.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