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5화
119. 칭호
“하아…… 하아!!”
숲길을 필사적으로 달리던 한 소년은 손을 잡고 뒤따라 달려오는 어린 소녀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소녀는 소년의 동생이었다.
비록 귀족 계급은 아니지만, 부모님의 수완이 좋아 평민 중에선 제법 유복하게 자라온 남매에게 이번 일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 그 자체였다.
상상이나 했을까.
비록 대륙 전역에 프리아 교단이 우세하고는 있다지만 모든 타 종교가 억압을 받는 건 아니었다.
프리아 교단에서도 인정한 하위신.
태양신 사일러스와.
달의 신 크리아스가 바로 그 좋은 예시라 할 수 있었다.
태초에 주신 프리아 여신이 이 세상에 빛을 밝히기 위해 태양신 사일러스를 창조해냈다.
그리고 태양신 사일러스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뒤이어 밤의 여신, 혹은 달의 신이라 불리는 크리아스를 창조해냈다.
여기까지는 엄연히 교단 본산의 오래된 고성경에서도 언급되어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만큼 교단 자체에서도 주신프리아 여신 이외에 사일러스와 크리아스를 믿는 소수의 이들을 굳이 억제하고 억압할 이유는 없었다.
모두가 주신은 프리아 여신이며, 나머지 두 신은 그 신에 의해 파생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남매의 부모님은 태양신 사일러스를 믿는 소수의 신도 중 한 사람들이었다.
남매가 사는 영지는 주로 태양광을 받아들이는 연금술 에너지 체제의 사업하는 영지라 할 수 있었다.
주로 연금술 학파에서 유명한 골렘인 축성용(성을 쌓는 용도) 골렘의 에너지 핵이 되는 특수한 셀을 만드는 곳이라는 소리였다.
태양의 힘을 이용해서 이루어지는 태양광발전 셀 시스템을 다루는 만큼 당연히 다른 어떤 것보다 태양신 사일러스라는 존재가 더욱이 달갑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실질적으로 퓨르라스 왕국의 콜듬 영지의 영지민 대부분은 주신 프리아의 신도보다는 태양신 사일러스를 믿는 신도들이 압도적으로 비율이 높았다.
물론 그래 봐야 영지민 1~200의 아주 작은 영지이지만 말이다.
그게 문제였던 것일까.
“하아…… 하아! 오빠……오빠!”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 귀여운 소녀가 울먹거렸다.
“멈추지 마! 달려! 계속 달리는 수밖에 없어!”
필사적인 도주는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다만 한가지는 확실히 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뿐인 동생을 데리고 이 숲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미치광이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꺄악!!”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 궂은일을 하면서 단련된 오빠와 다르게 몸이 약했던 동생은 오빠의 페이스를 따라 달릴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져 버린 여동생의 모습에 오빠는 소녀를 다그쳤다.
“일어나! 어서!”
하지만 한번 다리에 힘이 풀린 소녀가 다시 힘을 내기엔 상황이 너무 열악했다.
“오, 오빠…… 무서워……”
“업혀! 빨리!”
급히 제 동생을 업고 달려보려 하지만 어린 소년이기에 소녀를 업고 달려본들 속도가 나올 턱이 없었다.
쌔애앵!! 푸욱!!
“끄아아아악!”
결국, 도망치던 소년은 소녀를 등에 업은 채 엉거주춤 달리다 뒤이어 날아든 은빛의 화살에 다리를 관통당할 수밖에 없었다.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진 소년은 결국 제 동생을 놓치고 말았고, 바닥을 뒹굴며 이를 악물었다.
“꺄악!”
처참하게 비명을 지른 소녀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스릉……
목가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금속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
“아, 안돼!”
자신의 다리가 커다란 화살에 꿰뚫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제 동생의 목에 걸린 은빛의 검을 보며 처절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안되죠. 안되죠. 이렇게 도망가면 어떻게 하나요.”
그리고 소년의 귀로 증오스럽기 그지없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그락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화사한 금발을 가진 10대의 소녀였다.
자비로운 미소와 손에 꼭 쥐고 있는 주신 프리아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그녀를 한없이 자애롭게 보이게 만들었지만, 소년은 알고 있었다.
저 미치광이 광신도가 자신들의 영지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이다.
이웃들은 물론이고 부모님까지 모조리 살해당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퍼억!
무표정의 성기사 하나가 거칠게 그를 제압하자 소년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제 동생을 지키려 들었다.
어릴 때부터 평민답지 않은 예쁜 외모 때문이었을까.
부유했던 상인의 딸이었다던 어머니의 유전자를 쏙 빼닮아 예쁘게 자란 동생은 실제로 영지 내에서 수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예쁜이였다.
그래, 그 얼굴이 문제였다.
아직 어린 동생을 눈여겨본 영주가 동생을 후원하겠다는 명목으로 멋대로 데려가려 한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두 눈 뜨고 동생을 빼앗기려 하던 찰나, 영지를 시찰하러 왔던 왕국의 왕자님이 부패한 귀족에게 큰 호통을 치고 동생을 보호해주었지만.
앙심을 품은 영주는 그 길로 이단심문관에게 동생을 신고해버렸다.
인간의 탈을 쓴 마족이라고 말이다.
그 근거는 이러했다.
평민답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의 가능성.
영지민들의 대부분을 홀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
없었다.
결국, 이단심판관들이 들이닥쳤고.
영지는 초토화되었다.
살아남은 영지민은 극소수로 전원이 죽는 것은 영주가 바랬던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사태는 이미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자. 일어나세요. 저는 죄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죄인에겐 한없이 자비로우니까요.”
빙그레 웃어 보인 그녀가 품 안에서 작은 십자가를 꺼내 동생에게 들이밀었다.
이에 오빠는 악을 쓰며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십자가는 서서히 검게 변할 뿐이었다.
“어머, 정말 마족이었군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담담한 대답이 들려온다.
“어쩔 수 없죠. 죄를 태워 순백의 존재로 정화하는 수밖에. 뭣들 하나요. 십자가를 준비하세요. 저는 회개하는 죄인을 위한 기도를 올려야겠어요.”
그 말과 함께 성기사들이 소녀를 묶어버리려 할 때였다.
후웅!!!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순간 지상을 어둡게 물들였다가 사라졌다.
“음?”
“방금 뭐가 거대한 것이 하늘에……”
뒤늦게 하늘에서 뭔가 지나갔음을 깨달은 성기사들과 1급 이단심판관 오프레시레가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좀 전 새카맣게 변했던 하늘은 말끔하기 그지없었다.
“1급 심판관님. 방금……”
“흔들리지 마세요. 마는 언제고 우리의 곁에서 우리의 신념을 흔들려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마음을 다잡고 신성한 의무를 행해야 해요.”
담담한 말과 함께 소녀가 들어 올려진다.
커다란 관을 지고 나타난 성기사가 그 안에서 접이식 십자가를 꺼내 설치하고 소녀를 그 위에 묶었다.
“미안해요. 죄를 회개하기 위해선 정성을 들여 만든 십자가에 매달아야 하겠지만……, 이 또한 시련이니 부디 회개하시길.”
“사, 살려주세요. 주, 죽고 싶지 않아…….”
“어머, 죄를 회개하시면 모두 해결할 수 있어요. 주신 프리아 여신께선 당신의 회개를 마음 열고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그 말과 함께 소녀, 클로니 오프레시레의 손에 화염이 일렁거렸다.
“신의 화염이 당신을 정화하리라.”
“시, 싫어…… 싫어!! 싫어!!!!!”
처절한 비명과 함께 온몸을 버둥거려보지만, 소녀의 약한 힘으로는 십자가의 구속을 풀 수 없었다.
이윽고 클로니의 손에서 벗어난 화염이 그녀를 불태우려던 그 순간.
모두 볼 수 있었다.
새빨간 화염이 십자가를 삼키기도 전에 어디론 가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말이다.
“이건 뭐죠?”
조금 당혹스러운 듯 소녀의 화형식을 지켜보던 클로니가 눈을 찌푸렸다.
“1급 심판관님!!”
그리고 성기사의 외침과 함께 고개를 든 클로니는 자신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거대한 존재를 보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전신에 화염이 일렁이고 있는 그 존재는 다름 아닌 화염의 새.
동화 속에 나올법한 피닉스였다.
-끼이이이이익!!!
거대한 포효를 흘리며 화염을 모조리 삼켜버린 피닉스는 곧이어 클로니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말없이 피닉스 아니, 주작 불닭이를 올려다보던 클로니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스릉…… 카앙!!
하지만.
그녀가 검을 채 뽑기도 전에 강한 충격이 그녀의 검에 가해졌고, 반쯤 뽑혀 나왔던 검은 다시 검집으로 들어가며 클로니의 손을 떠나 지면에 반쯤 처박혀버렸다.
“……”
“대낮에 멀쩡한 소녀를 태우려 들다니.”
담담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공공의 적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분쟁뿐이라더니 그 말이 맞나 봅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여성의 모습에 클로니가 확장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로니의 동공은 섬뜩할 정도로 수축한 채 여성, 레이나를 노려보았다.
“소문이 자자한 빛의 용사……, 레이나님이시군요. 어째서 신성한 이단심판을 방해하는 거죠?”
그 말에 여성이 품 안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어째서 방해하냐라…… 당신, 이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불태우려 드는 건데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마귀에게 현혹된, 혹은 마귀일지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물론, 자비로우신 주신 프리아 여신님의 자비에 의해 회개하는 자는 죄인이건 악인이건 모두 구원받을……”
“미친년.”
“……”
“대화가 통할 거로 생각한 내가 정신 나갔지. 그보다 당신, 화염계통의 특질능력자였구나.”
콰앙!!
굉음과 함께 성기사 몇몇이 순식간에 주작 불닭이의 발에 짓밟혀 제압당했다.
스릉!
챙!!
반면 멀쩡히 남아있던 기사들이 급히 검을 빼 들었지만.
쿠르르릉…… 콰지직!!!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뇌운이 그들을 갑옷 채로 새카맣게 태워버렸다.
“……”
순식간에 주변을 정리해버리는 두 신수의 등장에 클로니는 수축한 동공 그대로 레이나를 보며 물었다.
“신의 의무를 대리해야 할 용사가 타락이라니……. 안타깝기 그지없군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그 말투에 레이나는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념을 지닌 개새끼만큼 말이 안 통하고 위험한 놈도 없는 거지. 넌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 미친년이고.”
담담하게 말한 레이나가 고개를 까딱이며 창을 빙그르르 돌렸다.
동시에.
바닥에 반쯤 꽂힌 검집에서 검을 천천히 빼 든 클로니 오프레시레가 섬뜩한 화염을 몸 주변에 배회시키며 입을 열었다.
“신께서 내리신 거룩한 시련, 가시밭길은 언제고 기꺼이 걸으리…….”
그 말과 함께 일대에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말없이 클로니를 지켜보던 레이나가 숨을 짧게 고르며 그녀를 제압할 방법을 찾으려던 찰나였다.
뒤에서 성기사들을 제압한 채 두 사람을 지켜보던 불닭이의 눈에 불이 붙은 것이다.
끼이이이이이이익!!
[감히! 어디 잡스런 불 따위가 내 앞에서!]
클로니가 일으킨 화염이 자신의 화염을 빼앗아가려 들자 극도로 격분한 불닭이는 기왕지사 자신을 위협하는 아버지도 없겠다 마음껏 분노하기로 마음먹었다.
퍼더더덕!!
날개를 펄럭이며 쏜살같이 덤벼든 불닭이의 존재에 클로니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불닭이를 바라보았지만, 불닭이는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덤벼들어 그녀를 마구잡이로 쪼아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화염에서 안전했지만, 반대로 그 상황은 불닭이도 유효했다.
마나로 보호해도 뜨거움이 느껴지는 열기에 레이나와는 조금 달랐다.
[요놈!! 요놈!! 요놈!]
콕!!콕!!콕!!콕!!
“꺅! 이건 또 무슨?!”
시련, 시련하지만 클로니 또한 이런 상황은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었다.
* * *
“……”
에이미는 영특하기 그지없다.
경제 분야에 관해서 특출나게 뛰어나지도 않지만 그렇기에 현상 유지능력이 뛰어난 게 바로 에이미였다.
내가 에이미에게 영지를 맡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선을 넘지 않기에 영지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재능.
어떤 의미로 보면 가장 대단한 재능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
나는 바닥에 쓰러진 수많은 고블린과 트롤, 오우거의 시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은 아직 발전이 되지 않았지만, 엄연히 영지의 영역 내라 할 수 있다.
특히, 고블린 같은 경우는 영지 내에 얼씬 못 하도록 주기적으로 디셉티콘 편대를 파견해 강력하게 정리하고 있는 편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영지 한복판에 이만한 몬스터가 나온 것인가.
“마탑의 마법사분들과 영지 근위대분들이 고생해서 큰 피해가 번지기 전에는 막았지만요……. 그사이에 세 사람이 중태에 빠졌어요.”
“이놈들이 들어 온 곳은?”
내 말에 에이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없어요. 마치 허공이 열리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처럼요.”
에이미의 말에 나는 오우거의 가죽을 손으로 압박했다.
티오니스 대륙의 오우거와는 묘하게 다르다.
“그 외 특이사항.”
“그게 기본적인 몬스터의 평균 전투능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힘을 발휘한 모양이에요……. 그리고, 생존자의 목격진술이 있긴 한데……”
“말해.”
내 말에 에이미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눈이 시뻘건 혈광을 띄었다고 해요……. 마치 광전사라도 된 것처럼요. 용병생활 하면서 그렇게 섬뜩한 눈동자들은 처음이었다고…….”
비슷한 사례는 이미 몇 차례 본적이 있었다.
괴석 거인, 그리고 샨드라 미네아의 분신체.
그러던 중 나는 몬스터들이 넘어온 흔적들 사이에서 이상한 것 한 가지를 발견했다.
“목격자 불러와.”
굳어버린 내 표정에 에이미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그 흔적에 꽂혀 있었다.
그것은 고블린과 트롤 오우거에겐 존재하지 않는 깃털이었다.
다만, 그 깃털. 제법 익숙하기 그지없다.
이거, 분명 삼대 그랜드마스터급 환수 중 한 놈. 창공의 폭풍 용왕 메가로드리아의 깃털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