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6화
갑작스레 나타난 기괴한 몬스터들과의 격전.
그 후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제대로 된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겁에 질려있었고, 몇몇은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쉽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언제부터 이랬어.”
“며칠 전……, 정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로부터 쭉 이런 상황이에요. 저하께서 신경 쓰실까 봐 말씀을 안 드리고 있었는데…….”
“에이미.”
내 조용한 부름에 그녀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저하.”
“탓하려는 게 아니야.”
담담하게 말한 내가 녀석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넌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혼자 떠안아 왔다. 고작 몇 달이 문제가 아니야. 그동안 명령이라는 이유로 네가 원치 않았던 일을 해야 했을 수도 있을 거다. 영지를 통치하는 데 있어서 네가 원치 않았던 일을 규율 때문에 해야 했을 수도 있고.”
“……”
“그건 잘못된 거다.”
담담하게 말한 내가 의무실 침대에 앉아 파르르 떨고 있는 사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만물을 굽어살피는 주신 프리아시여.]
"나는 너를 중요한 인재로 보고 있다. 내가 말했지. 군신의 관계가 아니라 사장님과 종업원의 관계로 생각하라고. 효율적인 것은 언제든지 발언하고, 아니다 싶은 건 언제든지 태클을 걸어와야 하는 거다. 네가 나를 생각한다는 이유로 혼자서 꽁꽁 싸매고 있어서 득이 될 게 뭐가 있지?“
[여기, 가련한 혼들이 모여 모두 신의 자비를 구하고 겁에 질려있나이다.]
“하, 하지만……”
“이 사실을 내게 말해서 내가 하던 일도 멈추고 이곳으로 오는 게 손해가 클까. 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손해가 클까.”
“죄, 죄송합니다…….”
“영지의 모든 영지민들은 내 가족이다. 너 또한 나의 소중한 가족이고. 나는 비록 직접 통치하는 횟수가 적지만, 그만큼 너를 믿고 있다. 네가 힘들면 당연히 내게 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게 맞아. 하지만, 그런 자잘하고 부질없는 이유로 효율적인 방법을 벗어나는 걸 나는 아주 싫어한다.”
네 앞에 있는 이는 누구냐.
단순히 대하기 어려운 상급자이자 이 나라의 왕족이냐.
네가 믿음을 가지게 한 사람이냐.
내 말에 에이미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잘할 수 있지?”
“네!”
“그래. 착하다. 나는 너를 믿고 있다. 너 또한 나를 전적으로 믿어라.”
잘못이 무엇인지 집어주고 기회를 주는 것.
나는 그것이 제대로 된 지도자의 통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영향력 약해졌다고 엄살피우지 마시고, 완벽한 어린양 어장관리 잘 부탁드리리다.]
[8위계 성마법]
[대 정화(grand purification)]
화아아악!!!
따스하고 환한 빛이 기사와 병사들을 감싸기 시작하자 바들바들 떨던 병사들의 몸에 서서히 안정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데이비님. 대상의 현재 상황은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중이라 분석, 정화마법과는 맞지 않을 거라 판단.”
“글쎄다.”
단순히 무서운 것을 보았다고 하기엔 반응들이 너무 획일화되어있다.
인위적으로 새겨진 절대적인 공포는.
옥x크린 마냥 정화마법으로 지워드리는 게 인지상정인 법.
강제로 공포를 새기는 특성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다.
내가 손도 못 쓸 상태를 만들고 싶으면, 최소한 초월계통의 공포 각인 흑마법정도는 가져와야 할 거다.
너 아웃이다. 이놈아.
화아아아악!! 챙그랑!
허공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병사와 기사들이 일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공포에 찌들어있던 이들을 자극하던 것들이 사라지니 수면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고통받던 이들은 순식간에 몰려오는 잠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간단한 식사 거리를 준비시켜 아마 반나절은 꼬박 잠들어있을 거야. 일어나면 배가 고플 테니 나눠주도록 해. 그리고 휴가를 주고 푹 쉬게 해주고.”
“네.”
“고생했다는 한마디 정도는…… 아니다. 이건 내가 직접 전하마.”
“네!”
에이미가 힘차게 답했다.
뒷정리를 그녀에게 맡겨둔 채 나는 곧바로 페르세르크가 잠들어있는 침실로 향했다.
“으응……, 데이비?”
“페르세르크. 이것 좀 확인해봐.”
심연의 권능은 그녀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며 최소한의 힘만 남기고 모조리 소실되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건……”
내가 건넨 거대한 깃털을 보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동시에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옅은 빛이 머금어지더니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환수…… 창공의 폭풍 용왕…….”
이쯤 되면 거짓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메가로드리아의 깃털.”
“혹시나 했는데 당첨이었네.”
이걸 어디서 구했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깃털을 받아 아공간 속에 던져넣은 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비, 이게 어찌 된 게야? 메가로드리아라면 분명……”
“그래, 룩스대륙의 3대 깡패 환수왕.”
“그런 환수왕의 깃털이 어찌 그대의 손에 있어.”
그녀의 말에 나는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다.”
내가 심각하나 표정으로 침묵하자 그녀 또한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알아봐야지.”
“……”
메가로드리아의 깃털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 외에 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집 나온 놈 사정 따위를 내가 어떻게 알아.”
무슨 일이 터진 건 알겠는데.
찾을 수가 없다.
이런 경우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정보원이 딱 하나 존재하긴 했다.
* * *
“그래서, 그 일로 나를 또 찾아왔다. 이 말이냐? 네가 있는 동부대륙에서 이곳 서부의 신목의 성지까지 거리가 얼마인지는 알고 있는 거냐?”
“그래서 있는 마나 없는 마나 다 끌어당겨서 편도 워프에만 세 번을 사용하고 있잖습니까. 나도 죽을 맛입니다. 방구석 폐인도 아니고, 정원 밖으로 좀 나와서 바람도 쐬시지요. 어르신.”
“예끼 이놈!”
세계수 알이 장난스레 나를 타박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세계수의 눈이라면 적어도 창공 너머까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가장 유용한 정보원은 사실 아이나 헬리샤나. 즉 내 곁에서 잭으로 활동하고 있는 다크 엘프이지만.
아무리 정보 길드라도 정보수집이 불가능한 영역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영역을 아무렇지도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조력자는 현재 그녀가 전부였다.
“알.”
“알았다. 알았어. 예끼 이놈, 정말 부려먹는 데엔 아주 도가 텄구나.”
“그래서, 안 해주실 겁이니까?”
“해야겠지. 내가 어찌하여 네 녀석과 손을 잡고 있는데.”
그녀의 목적은 평화의 유지, 존속이다.
메가로드리아가 만약 샨드라미네아의 분신체처럼 미쳐있다면 그녀에게도 큰 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해서. 그 거대한 환수를 본 이들은 무어라 답하더냐.”
“그림자만 보았답니다.”
대 정화마법으로 정신을 차린 하인스 영지의 병사, 기사들에게서 들은 정보는 딱 한 가지였다.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고, 고개를 들어 그것을 확인했을 때.
기억이 사라졌다고 말이다.
결국, 기억하는 것은 거대한 그림자와,
내가 알에게 보여준 깃털이 전부였다.
“헌데. 네 말대로라면 이성을 잃고 광기에 미쳐 날뛰는 환수가 그들을 살려주었다는 뜻이 되느냐?”
“메가로드리아가 제가 아는 그놈이라면 그리 쉽게 광기에 먹히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꼴에 삼대 환수 중에 가장 정신력이 강한 놈이라서요.
내 말에 그녀는 조용히 침묵한 채 눈을 감았다.
동시에 그녀의 전신으로 무형의 기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세계수 알의 크기는 언뜻 보면 그저 조금 거대한 나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녀의 뿌리는 대륙 전역으로 뻗어있고, 세계수치고 작아 보이는 나무는 겉보기와 다르게 세상 만물과 접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가 솟구치고 빠르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자유를 찾은 바람의 정령처럼 움직이는 힘의 기류는 곧 하늘 높은 곳까지 닿았다.
알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였다.
“없구나."
밑도 끝도 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쉽게 발견되진 않겠다는 거겠지요.”
“고작 환수가 세계수의 눈을 피한다고?”
“고작 환수가 아니니까 문제지요.”
환수왕과 그냥 환수의 차이는 극렬하게 드러난다.
“이걸로 놈이 제정신이 어느 정도 박힌 놈이라는 건 확실해진 거 같네요.”
“그렇겠지. 광기에 미쳐버렸다면 차라리 어디 있는지 모습은 드러날 테니까.”
미쳐버린 놈이, 생각을 하고 판단해서 자신을 숨길 리는 없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실제로 차원을 강제로 넘어오며 미쳐버린 놈들은 자신의 본능에 모든 것을 맡겨왔다.
특히 메가로드리아처럼 현수라 불릴 만큼 정신력이 강한 녀석이라면 아마 그 광기에 저항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관련된 정보가 생긴다면 내 직접 네게 건네주도록 하마.”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헌대, 그것은 어찌 되었느냐?”
“그것 말입니까?”
“그래. 칭호.”
그녀의 말에 나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아직 내 몸에 남아있는 심연의 힘이 내 상태창을 빠르게 출력했다.
“확실히 능력이 붙어있긴 하는데 말입니다. 하나같이 환골탈태 1 스택을 요구해야 활성화가 되는 모양입니다.”
지금 내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알은 내 발언을 굳이 복잡하게 이해하지 않았다.
“차원 열쇠가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한번 투자해보는 것은 어떠하느냐?”
그녀의 제안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환골탈태 1 스택.
현재 내가 보유한 스택은 고작 1이지만, 그렇기에 큰 미련이 없었다.
당장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지. 얼마나 쌓여야 가능한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
묵묵히 플러스마크가 붙은 칭호들을 손끝으로 끌어내리던 나는 문득 가장 마지막에 얻었던 칭호.
별 부수미의 항목에서 손을 멈추었다.
[별 부수미]
-현재 효능이 발현되지 않음. 환골탈태 스택 1 사용 시 해금
“별 부수미라……”
말 그대로 칭호의 뜻은 별 부수미.
스타브레이커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지나치게 오만하기 짝이 없는 칭호지만 나는 알의 꼬드김에 한참을 고민하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결국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환골탈태 1 스택을 과감하게 투자해보았다.
어차피 차후 주기적으로 쌓을 가능성이 있다면, 칭호 쪽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굳이 환골탈태 스택을 사용하지 않고도 활성화된 칭호도 분명 존재했다.
[무죄를 선고받은 숭고한 무경험자]
-이성에게 호감을 받을 비율 50% 증가.
-달아오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오오라 방출. 거사 성공률 1% 상승.
이런 거지 같은 칭호의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거지 같은 칭호조차 무언가 효과를 내게 부여한다면.
해금 조건이 붙은 칭호 또한 보통 성능이 아닐 거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그그그그극!!! 파스스스!!
이윽고 별 부수미 칭호의 옆에 있는 플러스마크를 가볍게 터치하자 무언가 돌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칭호의 숨겨진 효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효능은 제법 놀라웠다.
“와우…… 주신님이 드디어 돌아버리셨나.”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내용에 내가 추임새를 남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