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0화
영혼들을 정화한 내가 그곳에서 할 일은 없었다.
악인의 처단?
그건 지금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비록 성자의 위치에 있다곤 하지만 나는 엄연히 라운왕국의 소속이니 말이다.
실질적으로 내가 간섭할 수 있는 범위는 이단심판관들이 전부였다.
그들과 결탁한 타국의 귀족?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저들이 알아서 할 일이렷다.
“라운왕국 내였다면……”
“적어도 지금의 라운왕국 귀족들은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알거든.”
내가 라운왕국 귀족에게 요구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정도껏 나대라.
아무리 귀족의 권리에 목마른 자들이라 해도 그 권리를 지탱하는 평민들을 억압하면 남는 것은 파멸뿐이니까.
비록 중앙 집권체제를 가진 라운왕국이지만, 리네스 왕비와 바리에나 공작을 필두로 한 전 귀족파가 대부분 숙청되고 난 이후부터는 그래도 어느 정도 나라의 흐름이 안정되었다.
퍽 우스운 일이다.
대륙 전체가 사건·사고로 들썩이는 가운데 라운왕국 내에선 평화롭기 그지없다니.
라운왕국의 왕족이라는 책임은 내가 라운왕국의 왕족으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는 한 언제까지고 유효하다.
츠츠츠츳!! 스팡!!!
메가로드리아와의 싸움에 이어 성불까지 한 마당이라 마나가 거의 바닥까지 떨어졌지만, 회복력 상승의 칭호 덕분에 회복 자체는 상당히 빠르게 이뤄낼 수 있었다.
체감될 정도로 빠르게 차오르는 마나를 쥐어짜고 쥐어짜 필요한 양이 모이기가 무섭게 워프를 감행한 나는 거대한 군세가 모인 성국으로 바로 도달할 수 있었다.
클로니 오프레시레라는 화염계통 특질능력자를 놓친 건 아쉬울 게 없었다.
잠깐 만나본 그녀의 성정대로라면 그녀는 자신이 죽을 자리라 할지라도 필요하면 반드시 나타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와는 다르게 광폭화한 주제에 이단심판관들을 보호하고 있던 그 미치광이 환수왕 메가로드리아는 조금 문제가 심각했다.
“그가 제대로 힘을 발현하면?”
“그랜드마스터급이 작정하고 날뛰기 시작하면 대륙이 무너지는 거 한순간이야.”
왜 불가능하겠냐. 그보다 여건이 불리한 나도 충분히 가능한 게 이놈의 대륙일진데.
꼭 싸움 시작했다고 머리 텅텅 빈 괴물처럼 무작정 돌진할 이유는 없다.
서서히 돌려 깎아버리면 오래 걸리지 않아 대륙 무너뜨리는 것도 한순간이라는 소리였다.
그만큼 현재 티오니스 대륙은 인재 부족의 현상을 겪고 있으니까.
머릿수로 덤벼본들 내가 그에 호응하지 않으면 저쪽은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마당에 단순 출력량으로 치면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급인 환수왕이 날뛰면?
안 봐도 뻔한 블루레이 DVD일 뿐이다.
왜 리인포스 알파같은 라스트 위스퍼 비밀기사단이 생겨났는데.
그 위험성을 과거 선조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티오니스 대륙은 좋게 봐주려 해도 과거에 비해 기술 면에서나 무력 면에서나 모든 점에서 뒤처지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발전해야 했던 과거와 다르게 현재는 평화를 영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데이비 왕자님?”
순수를 상징하는 듯한 순백의 복도를 빠르게 걸어 들어가자 퀭한 얼굴로 서류를 빠르게 정리하던 앨리스 대주교가 나를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당장 멈춰요.”
“네?”
“성전이고 뭐고 당장 병사 돌리란 말입니다.”
내 말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는데요. 왕자님. 당신이 아니라 해도 이 일은 이제 도를 넘었어요. 정교 이단심문회는 법왕 성하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대륙 곳곳에서 크나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요.”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도 주신 프리아 여신님의 이름을 내걸고 말이죠.”
그녀가 뜻하지 않게 분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빌어먹을 자식들 잘되라고 주신께서 은총을 내린 게 아니라 이 말이에요. 이쯤 되면 당신의 요구가 있건 녀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생 실전이다. 이 개자식들아, 라고.
“병사……”
“그리고 이미 늦었어요. 정교 이단심문회의 본 회랑이 있는 곳으로 템플 나이트들을 대거 투입했고, 성국의 병사들 또한 1차 2차로 나뉘어 출정한 후라고요.”
처음엔 내가 성국을 엎어버릴까 걱정되어 급히 병력을 차출했다는 모양이었다.
이후 그들의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2차적으로 병력을 파견한 것이고 말이다,
“이번 마지막 본대가 출발할 때엔 저도 직접 출정합니다.”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망할. 도대체 최근 들어 무슨 전쟁이 이렇게 많이 터지는 건지 모르겠네요! 대륙연합에서 전쟁금지 아니었나요?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내전도 쉬쉬하고 있던 대륙 분위기가 하루아침에 작살이 났어요!”
짜증스레 그녀가 중얼거렸다.
“사람 목숨이 파리목숨도 아니고 소중한 생명 하나하나 사라지는 걸 우습게 아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
격분하며 욕설까지 숨기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의 수행 사제 하나가 기겁하며 크게 헛기침을 했지만, 그녀는 이미 화가 잔뜩 난 듯 들어먹질 않았다.
“그래서요? 무슨 이유로 병사를 돌리시라는 거죠?”
그녀의 물음에 나는 이미 늦었음을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메가로드리아가 도망치지 못하게 그 자리에서 확실히 묶어버렸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단심판관들도 사람입니다.”
“그건 알아요.”
“미치광이 광신도라도 머리는 돌아가는 놈들이고요.”
내 말에 그녀가 눈을 찌푸렸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그놈들이 뭘 믿고 성국의 교단 본산과 싸우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까?”
내 말에 그녀의 몸이 우뚝 굳었다.
“지금 저놈들 손에 그랜드마스터급 환수하나가 붙어있어요. 이대로 전진하면 다 개죽음 된다 이 말입니다.”
쾅!!!
내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벌컥 열리며 신관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대주교님!”
황급한 표정으로 뛰어들어온 사제는 곧 앨리스에게 득달같이 달려가더니 그녀에게 소리치며 보고해왔다.
“바, 방금 정교 이단심문회의 회랑이 있는 알릭스시드 섬에서 급보가……”
그 말과 함께 앨리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에 나는 사제의 어깨를 강하게 잡고는 물었다.
“그곳 위치가 어디지?”
“위, 위치 말입니까?”
“좌표 불어. 당장.”
내 말에 사제는 허둥지둥하더니 이내 품 안에서 커다란 보고 서류를 꺼내 들었다.
“분명 여기 있을 겁니다! 자, 잠시……”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던 사제는 곧이어 좌표를 찾아냈는지 내게 건네주었다.
빈약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좌표였다.
이것대로 넘어갔다간 반드시 머리통이 거꾸로 지면에 처박히는 참사가 벌어지리라.
하지만 충분했다.
말없이 혼란에 빠진 앨리스의 팔을 잡아끈 나는 그대로 손을 빠르게 휘저었다.
우웅!! 퉁!
동시에 내 발밑을 기준으로 푸른색의 빛을 내뿜는 거대하고 정교한 마법진이 빠르게 지면에 출력되기 시작했다.
“뭐, 뭘 하시려는 거죠?!”
“저와 다르게 그놈은 마나통에 여유도 있고 기본적인 권한이 파괴적입니다. 그냥 두면 다 죽어요.”
상대측에 그랜드마스터급 환수왕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론 안되었다.
왜 환수왕이 아직도 이단심판관을 보호하는지는 의문이다만.
그건 과정일 뿐이고 결과론적으로 볼 때 현재 그놈은 반쯤 미쳐 나와 적대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성국의 인간들이 애꿎은 학살을 당하기 전에 전쟁을 강제로 소강상태로 만드는 것.
며칠 정도의 시간을 벌겠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자, 잠깐만요! 이대로 공간 이동마법을 쓰시겠다고요?!”
기겁하는 앨리스의 외침에 나는 묵묵히 허공에 손을 빠르고 정확하게 놀렸다.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빛의 입자가 문자를 배열해냈고 나는 수식을 만들어내 빠르게 계산해 넘겼다.
“이 좌표는 통신좌표에요! 나도 마법에 대해 들은 바 있어요! 공간이동 마법의 좌표는 이런 거로는 어림도 없다고! 자칫하면 개죽음이……”
“거 시끄러우니까 좀 다물어요.”
내 말에 그녀가 움찔하며 멈췄다.
치지직!!
빠르고 능숙하게 계산식이 완성된다.
그녀의 말마따나 부족한 좌표로 제대로 된 마법이 발현될 리 없다.
자칫하면 맨틀 끝에 처박혀버릴 수도 있고, 대기권 바깥으로 튕겨 나가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 계산도 못 하면, 그 빌어먹을 마법 스승의 제자라고 명함을 내밀 자격도 없으리라.
이론과 경력, 그리고 깨달음은 내가 가지고 있는 현재 가장 심도 있는 무기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시도했다.
츠팡!!
이윽고 수십 개의 좌표가 완성되었고, 나는 손을 거침없이 휘둘러 그것을 사방에 흩어버렸다.
기존의 전이 마법은 사용할 수 없으니 편법을 쓰는 수밖에.
나는 망설임 없이 양손을 끌어모은 뒤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서두 생략합시다. 시작할게요.]
우우우웅!!!!!
동시에 지금껏 내게서 신성력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했던 앨리스나 사제의 눈에 경악 어린 시선이 걸렸다.
그들이 생각하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도저히 한 생명체가 품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의 신성력이 거대한 홀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기적 원합니다. 성당 부술까요. 기적 내려줄래요. 성자 때려치울까요. 기적 내려줄래요.]
[당신의 어린양이 지금 당장 목숨 걸고 도박을 하려 하니. 죽게 두기 싫으면 은총을 하사하여 주시옵기를. ]
쩌적!!
공간이 일그러지며.
일순간 시야가 뒤바뀌었다.
허공에서 나타난 내 시야에 비친 것은 하늘을 새카맣게 물들인 채 당당하게 떠오르고 있는 거대한 환수왕 메가로드리아와 겁을 집어먹고 굳어있는 성국의 병사들의 대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