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2화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두 정령왕의 허세 아닌 허세 덕분에 놈과 나 사이에 공간을 단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놈이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만 모르면 된다는 점인데.
아마 속았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순간 놈은 격분하며 어떻게든 단절된 공간을 다시 이어붙이려 날뛸 것이다.
녀석에게 나를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다는 말은 더는 거리낄 게 없다는 뜻일 테니까.
“성질머리가 저 지경이라도 제법 상식이 있는 놈이었는데.”
한숨을 내쉬어본들 반쯤 미친놈에게 무엇을 바랄까.
“앨리스 대주교님.”
“어…….”
내 부름에 그녀가 복잡한 표정을 고수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병력 전부 물리세요.”
미련없는 내 결정에 그녀가 눈을 찌푸렸다.
“병력을 물리라니요.”
“사흘 정도 시간을 벌어놨어요. 저놈이 저렇게 있는 이상 성국 템플나이트도 이단심판관도 서로 싸움 못 합니다.”
서로 만나고 부딪혀야 싸움이 성립하지 지금처럼 서로 접촉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면 이야기는 뻔하다.
“그런……”
“그리고 사흘 뒤에 저게 깨지면 말입니다.”
이곳에 있는 정교 이단심문회를 통째로 날려버릴 겁니다.
내 말에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하, 하지만 이건 내전……”
“여기 알릭스시드 섬에 대해 아는 인간이 몇이나 됩니까?”
“거의 극소수죠…….”
“여기서 날뛰면 아무도 몰라요.”
살인할 때 보는 놈이 없으면 암살인 것처럼, 여기서 누가 날뛰었는지 모르면 결국 먼저 손대는 놈이 전공을 가로채는 것이다.
“이단심판관들을 처단하는 전공을 가져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가져가세요. 난 나를 건드린 저 썩을 놈들을 날려버리고 환수왕 놈만 회수해가면 그만입니다.
내 말에 그녀는 짧게 고민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리게 하는 괴물을 상대로 그녀나 성국 본산의 성기사, 즉 템플나이트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녀는 눈치가 빠르다. 아마 저 괴물과 동급 괴물이라 판단되는 내가 날뛰면 그 여파를 책임질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섬에서…… 빠져나갈게요. 대륙으로.”
“대륙 안쪽 최대한 먼 곳까지 가세요.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몰라요.”
나도 이런 시도는 처음이라.
피식 웃으며 말한 나는 대치 중이던 정령왕들을 모두 회수했다.
“허파에 바람 빼. 이제 힘들어.”
[계약자. 나는 불만이 많다.]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데.”
거대한 육신으로 위엄 넘치는 모습을 보이던 노아스는 내 말을 듣기가 무섭게 그 육신의 크기를 줄여 작은 거인의 형태까지 끌어내린 뒤 말했다.
[그대의 영지에선 주로 흙장난이나 치고 있었지. 그 외에 한 것이라곤 그저 멍하게 계약자를 기다린 것뿐이다.]
[그런 마당에 드디어 정령왕의 위세를 내보일 수 있는 현장에 소환되었음에도 한 것이라곤 허파에 바람 빵빵하게 넣고 허세를 부린 게 전부라니요.]
노아스 뿐만 아니라 엘라임도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두 정령왕은 대륙을 누볐던 대영웅과 계약을 했던 정령들이다.
어찌 보면 쓰임새의 차이가 너무 커서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정령왕씩이나 된 제가 그런 자잘한 공사 도우미나 해야 하나요?]
[그런 자잘한 일은 정령왕이 아니라 상급 정령으로도 충분하다 계약자.]
이때다 싶어 대놓고 파업을 선언할 기세로 따지고 드는 두 정령의 모습에 나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언제까지 영웅놀음이나 할 거야, 까라면 까 이것들아.”
어디 잔말이 많아.
팅!
가볍게 열쇠를 허공에 튕긴 나는 순식간에 균열이 열리는 것을 보고 두 정령왕에게 커다란 돌멩이 두 개를 건네주었다.
“신목에서 받아온 정령석이다. 너희들은 무리일지 몰라도 중급 정령들은 다수 부릴 수 있어. 한 시간. 그 정도만 시간을 끌어라.”
내 말에 불만 가득한 모습을 보이던 정령왕들은 이내 침묵한 채 정령석을 받아들었다.
동시에 말없이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륀느를 불렀다.
“륀느, 디셉티콘 편대.”
“현재 스나이퍼, 저거노트, 메가트론 대기 중. 이들의 전투능력을 륀느가 높게 평가.”
“충전은 확실하지?”
“마정석에 순환된 마나 충전율 각 개체 모두 90퍼센트 이상의 잔량 확인했다고 보고해.”
그 말에 나는 미련 없이 열쇠를 활성화했다.
“열려라. 참깨.”
이놈의 명령어가 왜 이딴 식인지 알 수는 없다만 결과적으로 잘만 되면 문제는 없었다.
순식간에 균열이 열리며 그 위용을 드러내자, 이 현상을 처음 보는 페르세르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신기한 듯 균열 너머를 향해 중얼거렸다.
“맙소사. 이런 말도 안 되는 균열이라니……. 이건 마법이론만으론 설명이 불가능한 게야.”
“그게 설명이 됐으면 내가 이딴 걸 쓰고 있었겠냐.”
내 힘을 쓸 때마다 시간이 뭉텅뭉텅 날아가는 이 불량품을?
내가 해명하는 이론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초월자의 개념이지 신급 존재를 넘어서는 순간, 이해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열쇠 너머의 세상은 내가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시간이 줄어든다.
단순히 무의식적에 힘을 방출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소모가 상당히 빠르다는 점을 생각하면 최대한 힘을 죽이고 있는 것이 오래 버티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게 현 상황이었다.
물론 이전의 임무 추가 성공 덕분에 시간이 2배로 늘어난 점은 상당한 이점이 된다.
화아아아악!!!
쿵!
“어?”
그때였다.
갑자기 화려하게 열리던 균열이 닫혀버린 것이다.
동시에 내 상태창에 새로운 문구가 빠르게 활성화되었다.
[위기에 빠진 두 번째 희망의 별의 생존. 환골탈태 스택 1부여 차원 열쇠 최대 용량 100퍼센트 추가 증가] 현재 용량 [90:00] 보유.]
“엥?”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두 번째 희망의 별은 내가 이전에 만났던 어린 소년.
이바 반 호엔하임의 후손인 이바노프 반을 말하는 것일 터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보상이 들어오는가.
페르세르크는 상황을 모르기에 갑작스런 사태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륀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 옷깃을 마구 잡아당겼다.
“데이비님. 데이비님. 이유를 해명!”
“뭐?”
“쌍둥이 골렘! 륀느의 후임! 대상에게 붙여둔 골렘이 분명하다 판단!”
“아…… 설마.”
그 말에 내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이바노프 반을 보호할 겸 녀석에게 정보를 얻어내라고 보내둔 두기의 골렘이.
내가 없는 사이에 이바노프를 보호하고 임무를 완수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놈들이 힘을 사용하고 다시 자연 순환하며 힘을 회복시키면서 마나를 운용했고.
내 금 같은 한 시간을 모조리 사용했다.
멍하니 상황을 직시하던 나는 곧 칭호창을 열어 별 부수미를 활성화 시켰다.
[별 부수미]
(천체폭발 일부를 흉내 낸 자에게 내려지는 칭호)
-1차 해금 완료.
-칭호 착용 시 마나 친화도 +100%
-2시간 단위로 사용자의 최대 마나치 10% 흡수.
환골탈태 스택 1 추가 사용 시 확률적으로 추가 해금 가능.
애초에 이것 때문에 차원 열쇠를 사용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현재 메가로드리아를 단번에 제압할 수단이 부족했고, 그 수단을 칭호에서 찾으려 했다.
망설임 없이 도전하자 내 앞 허공에서 화려한 빛이 모여들며 커다란 보물 상자 같은 것이 나타났고, 마치 도박이라도 하듯 빠르게 진동하며 빛을 뿜기 시작했다.
페르세르크와 륀느는 상당히 긴장한 듯 상자 속에서 무엇이 나올지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 효과가 나올 테지만 아닐 확률도 반드시 존재한다.
드르르르르르륵! 철컹!
이윽고 상자가 열리기 시작했고.
침묵 속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그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금 실패. 추가 환골탈태 1스택 소모시……]
실패?
다시 도전해?
“이런 개 x!!!”
빌어먹을 도박 시스템!
내 욕설에 후퇴를 준비하던 템플나이트와 내 앞에서 흩날리는 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앨리스가 얼이 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왜 뭐.
성자도 사람인데, 욕하면 안 되나?
* * *
열쇠가 다시 활성화되는 시간은 대충 몇 시간 정도.
90여 분의 시간을 모조리 쓴 대신 이바노프를 보호한 쌍둥이 골렘의 하드 캐리 덕분에 별 수고를 들이지 않고 환골탈태 스택을 회수한 나는 칭호 능력을 해금했지만, 고스란히 실패해버렸다.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다행이라면 아직까진 유르기안 대륙을 대상으로 열리는 문인 터라 이바노프가 메인인 저 세상에선 이바노프를 쌍둥이 골렘이 계속해서 보호하는 한 스택은 돌아온다.
띠링!!
6시간이 흘러 차원 열쇠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돌았고 나는 다시 열쇠를 활성화 시켰다.
철컥!!
그리고 정확히 90분의 시간이 모조리 증발하며 또다시 보상이 들어왔다.
[두 번째 희망의 별을 도와 심연의 생물을 격퇴. 환골탈태 스택 1부여 현재 용량 [90:00] 보유.]
애석하게도 이번엔 시간이 늘어나지 않았지만, 환골탈태 스택은 성공적으로 누적되었다.
이미 템플나이트의 다수가 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배에 올랐고 남은 건 몇몇 성국 관계자가 전부.
그중에서 나는 아직 메가로드리아와 대치 중인 채로 양손을 모아 빌었다.
“주신 프리아께 고하옵건대……”
[해금 실패. 추가 성공확률 소량 누적 추가 환골탈태 1스택 소모 시……]
“빌어먹을 여신!!”
나처럼 당신과 교감하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신자가 어디 있다고 이렇게 내치시는지요.
신 따위 믿어도 소용없다더니…….
두 번째 시도는 말끔하게 실패했다.
[간절한 어린양, 운빨 요망]
[해금 실패. 추가 환골탈태 1스택 소모 시……]
“빌어먹을!”
세 번째 실패.
[아! 그냥 성공 좀 시켜주시죠. 나랑 장난합니까?]
[해금 실패. 추가 환골탈태 1스택 소모 시……]
네 번째 실패.
쾅!!쾅!! 쾅!
격분하는 감정에 바닥을 발로 구르자 커다란 진동이 수차례 일어나 일대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망할 여신”
신성모독이라고?
“신은 죽었다.”
“그게…… 성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 게야?”
“아! 몰라, 안 도와주면 신이고 뭐고.”
벌써 시간만으로 24시간이 흘렀다.
대부분 병력은 이미 배에 올라 빠져나가 버렸고, 이제 성국과 대치 중인 것은 나와 나를 따라온 몇몇이 전부였다.
의외라면 앨리스가 이곳에 남았다는 점이었다.
“으웅!! 륀느 모때써!!”
“관리가 부실한 감자엔 독성이 있다고 분석. 식용으론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륀느의 양 뺨과 팔을 잡고 늘어지며 생떼를 부리는 홍단이와 청단이.
처음엔 신기한 듯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흥미를 잃고 초월의 종언을 쓰다듬으며 헤실거리고 있는 페르세르크.
벌써 하루가 지났음에도 내가 힘의 회복은커녕 계속해서 이상한 짓만 하고 있으니 앨리스로선 기가 막히는 듯했다.
“저기…… 데이비 왕자님. 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아 기다려봐요. 이것만 성공하면 돼.”
“아니, 지금 적진 앞인 거 몰라요? 눈앞에 적이 있는데 뭐하시는……”
“저기 경계 서고 있잖아요.”
내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까딱인다.
한쪽엔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며 으르렁대고 있는 신수 불닭이와 쿠릉이가 있고, 한쪽에는 륀느가 가져온 디셉티콘의 골렘 메가트론이 섬뜩한 느낌을 주는 전기톱을 점검하며 마치 석상 가디언처럼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대체 저 흉폭하게 생긴 골렘은 또 뭐람……”
이제는 나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앨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아는 성자의 이미지가 다 박살 나고 있으니 참담한 심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나는 시간이 다시 돌아 열쇠가 활성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고, 다시 90분의 시간이 증발하자 환골탈태 스택이 내게 들어왔다.
이거 완전.
자동 농장이 따로 없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양손을 끌어모은 뒤 경건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팔자에 없는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성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태초의 기도문 1장.
[태초의 주신 프리아 여신이시여, 이 어리석은 어린양이 불초 고하옵건대. 시련을 기꺼이 걸을지니, 한 줌의 빛줄기를 내려주시옵고……]
[당신의 자애와 자비에 따라 당신을 섬기되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나눠 주시옵고……]
[나의 이름 아래에 평생 당신을 모실 것을 맹세하오니……]
[프멘……]
띠링!!
[해금 성공! 칭호 별 부수미의 2차 능력이 개방됩니다.]
“……”
빌어먹을 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