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3화
“끄아아악!”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거칠게 끌려들어 온 성기사 하나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클로니 1급 신판관님. 죄인을 데려왔습니다.”
“고생했어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 클로니는 붉은빛 갑옷을 입은 채 지하감옥 한쪽에 깨끗하게 비치된 여신상을 향해 짧은 기도문을 올렸다.
[죄인의 죄를 사하시옵고, 그들을 회개시켜주시어…….]
숨이 막히는 침묵이 잠시 오고 갔다.
성기사를 제압하고 있는 사내는 클로니의 뒷모습을 경멸하는 표정으로 노려보았지만, 다른 그 어떤 이도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럼……, 재판을 시작하죠.”
담담하게 몸을 일으킨 그녀는 작은 금속음만을 흘린 채 잡혀 온 성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어찌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고 계신가요?”
“주신의 가르침에 반하는 이단에게 해줄 말은 없다.”
“어머, 이단을 전문으로 잡는 저희에게 이단이라니.”
퍼억!!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가차 없이 그를 후려쳤다.
“끄윽!!”
클로니 오프레시레는 10대 소녀답지 않은 엄청난 힘을 품고 있다.
그 탓에 그녀의 공격 한번이 절대 가볍게 다가올 순 없었다.
“차라리…… 죽여라……. 이렇게 나를 모독하지 마라!”
신실한 성기사였던 그의 외침에 클로니는 빙그레 웃어 보일 뿐이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답니다. 그렇기에 신께서 내려주신 자비로 회개하는 자, 순수한 존재가 되는 것이죠.”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곧 작은 손에서 우악스런 힘을 발휘하며 성기사의 턱을 강하게 틀어잡았다.
그리고는 십자가 형태의 신물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신의 사자께서 내려주신 이 신물은 이단과 신실한 존재를 구분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이 이단이라면 이것이 검게 변할 겁니다.”
그녀의 말에 성기사가 그녀의 뺨을 향해 침을 뱉었다.
“크, 클로니님!”
그 모습에 주변을 지키던 이들이 깜짝 놀라 포박된 성기사들 짓밟아 제압하고 클로니에게 달려갔다.
“그만하세요. 신께선 모든 죄가 정해지고 난 후에 행할 것입니다.”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끈적거리는 침을 손으로 닦아낸 뒤 다시 그 손으로 사내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신물을 발현시켰다.
우웅…….
옅은 빛과 함께 검게 변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십자가는…….
“죄가…… 없군요.”
변하지 않았다.
“무슨……”
주변을 지키던 성기사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그래, 신께선 자비와 자애를 가르치셨다. 너희처럼 앞뒤 분간 없이 사람을 죽이라 가르치지 않으셨단 말이다! 죽여라! 나는 여기서 깨끗하게 죽고 순교자가 될 것이다!”
성기사의 외침에 클로니는 말없이 십자가를 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이분을 다시 가두세요.”
“예?!”
“이단이 아닌 자는 저희가 처벌할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대상입니다.”
“하, 하지만 이자는 적입니다!”
“적이요?”
담담하게 말한 클로니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제가 회개시키는 건 오로지 이단과 마귀뿐입니다. 계시 또한 그러했지요. 당신은 언제부터 신성한 이단심판에 사사로운 감정을 들이밀었죠?”
클로니의 뜬금없는 선택에 오히려 잡혀있던 성기사도 당황했는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단은 회개시켜 정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단과 마귀가 아닌지는……”
말을 하던 그녀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윽!”
그때였다.
갑자기 클로니가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팍 찡그린 것이다.
동시에 당황한 성기사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검을 뽑아 잡혀있던 성기사의 몸을 꿰뚫어버렸다.
“수, 수장님!”
깜짝 놀란 성기사와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져 있던 클로니가 힘겹게 난입한 불청객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한없이 자애로운 인상을 주는 중년 남성이 웃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클로니 1급 신판관.”
“수, 수장님.”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마귀와 이단을 벌하라. 그것은 신의 계시입니다.”
“하, 하지만 이 남자……”
“이단입니다.”
짧은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신물이”
“이단입니다. 신물이 잠시 문제를 일으킨 것뿐입니다.”
억지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잊으셨습니까 클로니, 당신이 어릴 적 당신의 부모님을 끔찍하게 살해했던 마귀들의 존재를요.”
“마……귀……”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눈동자에 광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마귀…… 그래. 마귀는 모두 정화해야 해요.”
“그래요. 당신의 눈앞에 있는 저는 누구입니까?”
“신의…… 계시를 받으신 신의 사자.”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신 프리아 여신께서는 제게 이 같은 사명을 다 하라고 신의 사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현재 저희를 지켜주고 있지요. 마귀에게 홀려버린 타락한 성자와 타락한 성국 본산에게서요.”
“그는 비록 마귀에게 홀린 모습을 보였지만 정식재판을 통해……”
“이런, 당신은 가끔 이게 문제입니다. 너무 고지식하고 딱딱한 일 처리 방식은 옳지 않아요.”
담담하게 말한 그가 클로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그녀가 무너져 내렸다.
“탑에 가두세요. 클로니 1급 심판관은 감히 신의 사자인 제게 의문을 품었습니다.”
“하, 하지만 수장님.”
“어허. 신의 사자가 하는 말을 어길 셈입니까?”
그 말과 함께 사내의 눈이 한순간 번뜩였다.
옅은 빛과 함께 성기사들은 곧 멍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쓰러진 클로니를 안고 그를 지나쳤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바닥에 쓰러진 성기사는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며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정교…… 이단심문회 수장 콜로서스 그리암……”
“호오…… 저를 잘 알고 계시는군요. 1급 성기사셨습니까?”
“네놈의 악행은 도를 지나쳤다. 신께선 자비를 베풀라 하셨지 무분별한 살생을 가르치신 적이 없다!”
죽어가는 그의 외침에 콜로서스 그리암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맞습니다. 신께선 자비를 가르치셨죠. 하지만 그 자비를 가르치신 신께서 제게 어떤 자비를 내리셨습니까?”
“무슨……”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평생을 신께 한목숨 바쳐왔습니다. 이 어두운 길을 택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손가락질하는 더러운 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신은 알아주지 않았지요.”
담담하게 말한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 그녀를 구한 건 우연이었습니다. 단순 변덕이었지요.”
“누굴…… 말하는 거지?”
“아, 몰라도 됩니다. 이야기를 마저 하지요. 미색이 제법 반반해서 살려주었습니다. 헌데 알고 보니 그녀는 제가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더군요. 저는 그녀에게 신과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굴종했지요.
그랬더니 뭐가 제게 왔는지 아십니까?
저 존재입니다. 신의 사도!
자신을 메가로드리아라 칭하는 저 엄청나게 강한 존재를요! 그 존재는 힘 그 자체였지요! 제 말을 거역하지도 못합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산하게 어렸다.
“그녀는 이곳에 자신의 동족을 찾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수십 년 전 이곳에 먼저 넘어왔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찾으러 왔다더군요.”
“대체…… 어디서 넘어왔다는 거지?”
“그야 저도 모르지요. 중요한 건 그녀가 신의 사도인 메가로드리아를 제게 종속시켜주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 말에 성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이단심문회가 단체로 미친 짓을 하기 시작했을 때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이들도 사람입니다. 이단을 처벌하는 데에 혈안이 된 자들이지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이들을 죽이기 위해선 이들에게도 세뇌를 걸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클로니 오프레시레는 특이한 존재였지요.”
“……”
“그녀는 처음부터 강했습니다. 왜 그런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 그래, 특질능력자라 부른다지요? 제가 볼 땐 다중 능력을 다루는 듯합니다만. 어쨌건 그녀는 어릴 적 눈앞에서 마귀에게 부모가 뜯어먹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단이라 하면 아주 치를 떨지요. 하지만 반대로 이단이 아닌 자에겐 한없이 정직한 미치광이입니다. 그게 문제에요.”
그녀는 전력으로 써먹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세뇌했습니다.
제 의지로요.
그녀는 거짓 신물을 통해 제가 원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판단하고,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불태워왔습니다.
진실이요?
알면 뭐가 달라집니까? 이미 손에 피를 묻힌 신념도 꺾인 멍청한 살인귀일 뿐인데.
빙그레 웃는 그의 미소는 클로니가 보이던 순수한 광기와는 다르게 추악할 정도로 어두워 보였다.
“미쳤군. 제대로 미쳤어! 자신의 부하까지 속인 건가?!”
“그렇습니다. 미쳐야지요. 그래야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룰 테니…….”
“성자와 대주교께서 네놈의 악행을 파헤쳐주실 것이다. 신께 자비나 구걸해라 빌어먹을 이단자.”
“이단은 신을 배반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상대가 같은 신이면 그건 이단이 아니에요.”
그 말뜻을 이해한 성기사가 섬뜩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성자도 곧 저 신의 사도의 손에 살해당할 겁니다. 신의 사도는 정말 강력한 존재니까요. 그러니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 * *
[해금 성공! 칭호 별 부수미의 2차 능력이 개방.]
핑!!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칭호의 내용이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짧은 시간 후에 나는 그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별 부수미]
(천체폭발 일부를 흉내 낸 자에게 내려지는 칭호)
-1차 해금 완료.
-칭호 착용 시 마나 친화도 +100%
-2시간 단위로 사용자의 최대 마나치 10% 흡수.
-칭호 장착 시 소유자의 의지에 한해 마나 제어.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마나량 추가 흡수.
너무 단순한 한마디가 붙었다.
하지만, 나는 이 한 줄의 내용만을 원했다.
언제든 깰 수 있는 적금은 최고의 선택권이 될 테니 말이다.
“좋아, 나는 이때를 위해 살아온 것이다.”
당당하게 말한 내가 벌떡 일어났다.
그런 내 모습에 서로 아웅다웅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되거나 말거나.
나는 현재 싸움을 중단시키고 있는 단절된 공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루가 흐르면서 사람이 사람인 만큼 이단심문회의 성기사들의 수가 상당히 줄어있었다.
실질적으로 이 단절된 공간으로 인해 전투가 서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남은 이들은 내 접근에 긴장하기라도 했는지 시선을 모았다.
반면 메가로드리아의 경우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자신의 힘 회복에 여념이 없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감도는 거대한 몸체를 지닌 메가로드리아는 언 듯 봐도 수십 미터에 달하는 크기를 지니고 있다.
퉁!! 퉁!!
이윽고 긴장감이 극도로 치닫는 거리까지 다가간 내가 찢어진 공간을 나누는 균열을 맨손으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한껏 소리쳤다.
“마! 문 좀 열어봐라!”
물론, 이미 찢어진 균열이 다시 순식간에 수복될 리는 없다.
몇 차례 힘으로 두들기던 나는 곧 균열의 흐름을 빠르게 파악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정도면 하루 반나절에서 이틀 정도……”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다.
수단이 준비되었으면 이제는 스스로가 준비할 때니까.
우웅!!!
곧바로 나는 한 손을 펼쳐 마나를 방출해냈다.
동시에 허공에 보랏빛 마법진이 하나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내 발밑, 머리 위, 전방 후방 좌우.
가릴 것 없이 마법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주변의 마나가 마치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먼지처럼 내 육신으로 빨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대량의 마나가 움직이고 짧은 시간에 어마어마한 양의 마법 수식이 머릿속에서 계산되며 마나를 구현시킨다.
미리 캐스팅해두는 마법사가 왜 사기라고 하는지 보여주마.
* * *
마법진을 유지하기 시작하고 하루가 더 흘렀다.
드디어 내가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은 륀느는 골렘을 회수하고 내 곁을 지켰고, 페르세르크는 조용히 내 주머니 속에 들어와 상황을 지켜보았다.
홍단이와 청단이는 검으로 돌아와 내 허리춤에 채워졌고.
앨리스는 돌아가라는 내 경고도 무시한 채 멀리 숨어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제 하루 정도면……될 게야. 헌데, 잠도 자지 않고 괜찮은가?”
하루 전부터 마법진을 활성화 한 채 석상이 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페르세르크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그래.”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잔뜩 말라 있던 입술을 한두 번 뻐끔거린 뒤 대답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내 말에 주변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물러나. 최대한 멀리.”
이윽고 내 말과 함께 륀느가 작아진 페르세르크를 데리고 어느 정도 물러나기가 무섭게 나는 마법진 하나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우웅!!!
동시에 대량의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일대에 오색의 거대한 마나가 마치 소용돌이처럼 내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거대한 상승기류처럼 하늘로 올라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 손끝을 타고 만들어지는 건 며칠 동안 준비해온 마법의 결정체였다.
그 모습을 보던 페르세르크는 마나의 심상치 않은 기류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륀느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눈치채고 페르세르크를 대동한 채 내게서 빠르게 멀어진다.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마나의 흐름에 민감한 상대.
창공의 폭풍 용왕 메가로드리아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나를 보고 파충류 같은 눈동자를 크게 확장시켰다.
어이쿠 너무 늦게 발견하셨네.
“시간 얼마 남았냐?”
공간이 단절된 탓에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놈은 정확히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놈을 향해 짓고 있는 내 웃는 얼굴을 말이다.
[8서클 역회전]
[폭염계 파이어볼]
[화이트 노바]
역회전 마법인 화이트 노바는 이미 내게 사망했던 전대 세계수에게 한차례 써먹었던 개조마법이다.
마법사의 신이라 불리던 오딘이 만들어낸 별종 같은 비효율 정점의 파괴력 위주 마법이라는 말이다.
단순히 8서클 마법을 다루던 내 마나량의 대부분을 사용했던 당시와 다르게 9서클 마법사로 성장한 내가 며칠 분량의 마나를 강제로 끌어모아 충전하고 한꺼번에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별 부수미의 칭호.
말 그대로 저 서클, 연비가 나쁠 정도로 마나를 투자하는 마법에 최적화된 칭호가 아닐 수 없다.
“자. 시간이 빨리 흐르면 좋겠다. 그치?”
내 미소에 놈이 한발, 또 한발 물러나며 긴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야 이걸 빨리 먹여주지.
아무리 환수왕이라도 이거 직격하면 그냥은 못 넘어간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놈의 푸른 깃털 때문에 표정이 파랗게 질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