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7화
베르단데.
그 이름은 분명 평민 출신으로 6대 미녀로 불리며, 한때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의 구혼을 받았던 것으로 유명한 여인의 이름이었다.
베르단데라는 이름이 독자적인 이름은 아니지만,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그나마 대륙 정세에 제법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효과적일 텐데.
지금 이곳에 살아있는 게 나 말고 누가 있을까.
섬은 검은 뼈대만 남은 채 완전히 증발해버렸다.
이단심문회의 건물 채로 말이다.
일대 바다는 지형까지 뒤틀린 채 무너져 내렸고,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외부에서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당연히 들어오는 게 안되니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시체가 되어버린 콜로서스는 사실상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를 통해 이 난리통을 만들어낸 [울드]라는 그 심연의 공주가 걸리적 거릴 뿐이었으니 말이다.
말없이 몸을 돌려 이단심문회의 건물이 있던 곳으로 들어선 나는 뼈다귀도 남기지 않고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의 터를 손으로 천천히 짚었다.
검게 탄 흔적이 손끝을 따라붙자, 붉게 물들었던 손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지하가 있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나는 검은 암석을 원료로 사용해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지하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열 고압에 극도로 강한 암석인 탓에 가공 자체가 불가능하진 않지만 화이트노바를 맞고도 견뎌냈다.
퍽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창 롱기누스를 꺼내 든 나는 그 무게를 이용해 문의 경첩 부분을 강하게 두드렸고 어긋난 것들이 부서지기가 무섭게 홍단이로 베어버렸다.
역시 물리계통에 한해서 모조리 베어버리는 홍단이는 후진이란 없다는 듯 암석째로 갈라버렸다.
쿵!!!
문을 부수기가 무섭게 드러나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보며 나는 왠지 모를 이유에 그저 홀린 듯 그 내부로 들어갔다.
* * *
정교 이단심문회의 지하감옥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했다.
그리고.
감옥인 주제에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다.
인기척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빛조차 들지 않았다.
자칫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나갔다.
쾅!!!
그때였다.
묵묵히 걸어가던 중 멀지 않은 곳에서 큰 소리가 난 것이다.
“……”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을 만큼 갑작스럽고 큰 소리였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일리나를 데려왔으면 아주 재밌었겠네.”
일리나, 혹은 에이리아 황녀.
에이리아 황녀는 기본적으로 겁이 많은 사람이니 효과가 좋을 테고 일리나 또한 겉으론 강한 척하지만, 과연 이런 분야엔 어떨지 궁금한 반응을 자주 보이곤 했다.
한참을 걸어 내려간 나는 유일하게 인기척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대한 석문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홍단이로 베어내자 여신상으로 추정되는 석상들이 반쯤 부서진 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지하감옥 자체가 부서지진 않았지만 역시 지진이 한차례 강타한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갑옷을 입은 채 침묵하고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녀였다.
“이름이 분명…… 클로니라고 했던가?”
특질능력자이며, 조금 이상할 정도로 힘이 강했던 소녀였던 것 같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 앞에 대고 가볍게 핑거스냅을 튕겼다.
따악!
“으읏……”
동시에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멍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는 아직 사태판단이 안 된 듯 보였다.
분명 이년은 골수 광신도였다.
콜로서스 그리암이 나였다면 그녀를 곁에 두고 자주 이용해 먹었을 텐데.
어째서 이곳에 갇혀있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구면이지?”
“……아아…… 아아아 성자님이시군요.”
고통과 피로에 찌들어있으면서도 그녀는 해맑게 웃어 보였다.
“저를 재판하러 오셨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빛이 나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목에 걸린 작은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용사 레이나의 말에 따르면 저걸 가져다 대어 검게 변하면 이단, 빛이 변하지 않으면 이단이 아닌 존재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십자가가 내게 반응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그 십자가를 신물이라 속이고 클로니에게 건네준 콜로서스 그리암이 죽어버렸기 때문이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신이 타락한 줄 알았답니다. 그래서 재판을 하고자 했어요. 당신은 숭고한 존재. 숭고하기에! 그 어떤 이도 당신을 더럽혀선 안 되죠! 당신은 신의 사랑을 받은 분이니까요.”
“세상에 신의 사랑을 받는 이들은 몇몇뿐이야.”
“아니에요. 신께선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신을 배척한 이단조차도요. 그렇기에 죄를 태우는 것으로 정화가 되지요. 죄인의 뼈가 흰 것도 그 이유 때문이랍니다.”
그녀의 확고한 신념이 서린 말에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이단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진 이상 저는 당신을 재판하고 정화할 권리가 없답니다. 아마 당신의 뼈는 지금 순백색을 띠고 있을 테니까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가 말했다.
“신께서 계시를 내렸다는 건 거짓말이다.”
“네?”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분명 심문회 수장께서 계시를 내려받으시고 신의 사도와 신물을……”
“신의 사도는 환수일 뿐이고 신물은 만들어진 가짜. 네가 죽여온 이들의 8~90퍼센트는 이단이 아닌 죄 없는 사람들.”
잔혹할 정도로 진실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나는 멍하니 매달려있는 그녀 의 앞 아공간에서 꺼낸 단검을 던졌다.
“거짓말인지 진실인지는 굳이 생각할 것도 없겠지. 넌 네 신념에 숨어서 봐야 할 걸 보지 않고 죄 없는 이들을 태워죽였다.”
“……제가…… 이단이 아닌 지켜야 할 존재를 죽였다고요?”
“그래.”
그리고는 그녀를 묶고 있던 사슬을 뒤로한 채 그녀를 지나쳤다.
“결단은 너 스스로 내려라.”
미련 없이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 뒤편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거든.
이 지하에 숨겨진 공간이 또 있다.
멍하니 주저앉아 단검을 바라보고 있는 클로니를 뒤로한 채 더 안쪽까지 들어온 나는 단단하게 만들어진 검은 암석의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섬의 뼈대를 이루던 암석과 동일하다. 그렇기에 나는 미련 없이 홍단이로 벽면을 그어 베어버렸다.
콰르르릉!!
동시에 미끄러지듯 무너져내린 벽면 너머로 숨겨진 자연동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함정이 가득해 보이는 공간을 넘어들어온 나는 곧 동굴의 끝에서 작은 보석함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 열쇠로 열리는 식의 보석함이었지만.
나는 무식하게 힘을 주어 그 함을 부숴버리고는 그 내부에 있는 흑요석을 꺼내 들었다.
단순 보면 흑요석 같은데.
내부에는 다른 힘이 스며들어있었다.
어지간해선 모를 힘의 변화.
심연의 힘이었다.
“이런 게 여기 있었나?”
흑요석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굴리던 나는 문득 벽화에 적힌 글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어려운 신성어로 되어있었지만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섬의 지하에 있는 고대 유적에서 가져온 돌로 마치 봉인되어있는 것처럼 보관되어있던 것을 선대 이단심문회의 수장 중 하나가 챙겨와 이곳에 보관했던 모양이었다.
그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묘하게 싸한 기분이 들며 흑요석을 가지고 있으면 계속해서 사특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신을 배척하는 이단으로 판단. 오래전의 선대 이단심문회 수장은 이 흑요석을 이곳에 봉인하여 숨겨두었던 모양이었다.
현 수장이었던 콜로서스 그리암조차 몰랐던 것 같은데, 혹시나 유적이 있을까 싶어서 내려와 봤더니 역시나 유물이 숨겨져 있다.
도굴하면 모조리 득템인 상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대 유적은 그만큼 난해하게 숨겨져 있고 놀라운 사실들을 품고 있었다.
아직 많은 것을 알진 못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 알 것 같았다.
이놈의 심연이 티오니스 대륙에서 한차례 깽판을 쳤었다는 사실과 만 년 전 이놈들을 누가 몰아내 버렸는지를 말이다.
자연동굴에서 빠져나와 지하감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나를 반긴 것은 코를 찌르는 혈향이었다.
신념에 살고 죽는 미친것들은 자신의 목숨 따위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살아온 자가 신념이 뒤틀렸을 때.
내릴 극단적인 선택은……
익숙할 뿐이다.
* * *
이단심문회의 사태가 끝나고 시간이 흘렀다.
성국 발샤스는 이단심문회의 쿠데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정식으로 이단심문회라는 것을 축소하고 더욱 평화적인 단체로 바꾸겠다고 대륙에 발표했다.
이곳 티오니스 대륙은 지구의 중세와 비슷하면서도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삶의 질이 상당히 높고, 노예나 농노 같은 이들이 많았던 중세와 다르게 평민들도 환한 미소를 짓고 살아나는 세계였다.
그리고, 연금술과 마법의 발달로 제법 깨끗한 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놈의 대륙은 상대적으로 굉장히 미적 감각이 높다는 점이다.
“3달……”
곰곰이 중얼거린 나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내 앞에 놓인 카드와 흑요석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일 이후 석 달이나 흘러버렸다.
그동안 흑요석에 대해 알아낸 건 하나도 없고 카드에 봉인시켜둔 메가로드리아 또한 아직 이렇다 할 차도가 없었다. 일단 상태를 정상으로 되돌려야 환수 계약을 하던 할 텐데 말이다.
또한, 현재 가장 중요한 요소로 치부되는 대륙 6대 미녀 베르단데에 관해 소재를 파악하고 있지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메가로드리아가 봉인된 카드 이외의 카드들은 이따금 내보내 달라는 듯 파르르 떨며 내게 시위를 보내왔다.
이 미친놈들이 들어있는 카드첩은 어지간해선 꺼내기 싫었는데.
영혼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회랑에서 가져오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다루기 까다로워하기에 가급적 꺼내기 싫었던 물건이기도 하다.
벌써 하인스 영지는 분기마다 판매하는 달의 풀 잎사귀를 경매하느라 정신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그 분야에 관해서 다룰 것은 기상조건과 토지의 상태뿐이니 말이다.
많은 이들 중 유능한 이들 몇몇을 뽑아 그 사업을 관리시키고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는다. 생각 이상으로 이 영지에서 나를 향한 충성심이 강했던 탓에 나는 충절에는 신뢰라는 답변을 내려주었다.
마족 벨리얼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저하. 준비가 모두 끝났어요.”
이윽고 나는 보고를 위해 찾아온 드워프 한 명과 에이미를 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담담하게 말한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고풍스러운 가위를 손에 가볍게 쥐고는 아공간에 휙 던져넣었다.
“완공식 하러 가자.”
선생들은 적당히 섭외해 두었고.
건물이 완성되었으니 샴페인 하나 터뜨리고 광역 보호마법 정도는 걸어줘야지.
그 정도는 돼야 대륙 최대규모 아카데미의 이사장이라 부를 자격이 되지 않겠는가.
보호마법?
까짓거, 마탑이 탑에 설치해둔 것보다 조금만 더 좋은 거로 가자.
그래야 자괴감이 덜 들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