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9화
수십 채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과 수많은 시설.
단순한 아카데미라고 보기엔 놀라운 기술들이 접목된 시스템도 존재했다.
가히 돈x랄의 극한을 보는 건물인 만큼 어마어마한 재정이 사용되었다.
실질적으로 영지에 존재하는 수로와 수력 마나 발전소까지 지어 올리고 있는 마당에 이런 건물을 착공했으니 재정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행 자체에 후회는 없었다.
언제고 해야 했을 일이었고, 제국이 고민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었지만 애초에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당연, 달의 풀 하나만으로도 제국급 재정을 쓸어담았던 하인스 영지이지만 분기별로 생각했을 때 현재 가장 기대받는 수익은 다름 아닌 내 눈앞에 있는 이 작은 꼬마가 만든 물건이었다.
“네 공로가 가장 크다. 에오니샤.”
“그……. 저는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걸 만든 것뿐인걸요. 오라버님이 대부분 지식을 빌려주셨죠.”
노예 계약이 이래서 좋다.
칭찬에 약한지 몸을 배배꼬면서도 절대 긴장을 놓지 않는다.
에오니샤는 내가 수틀리면 자신을 대뜸 때려죽일 만큼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경계심은 쉽게 놓지 않았다. 태생부터 겁이 많았던 그녀는 자신의 친모와 친오라비가 나와 반목하고 서로에게 검을 겨눌 때도.
그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때도 그 기세에 심취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녀가 이곳에 살아있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그래. 또 만들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지식과 자금은 언제든지 책정해줄 테니.”
“……”
“대신 네가 해야 할 건. 나를 설득시키는 거다.”
마음대로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해서 어디 흔들어보아라.
돈은 이쪽에서 풀어줄 테니.
에오니샤는 그런 내 결정 자체에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에오니샤와 함께 걸어가던 나는 아직 휑한 느낌이 드는 공터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에오니샤는 분명 이번 아카데미의 건축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시계의 왕녀로 불리는 그녀가 만든 시계를 팔아서 생긴 돈으로?
아니었다. 적색 바위 부족 드워프마저도 감탄할 정도로 재능이 좋은 그녀는 어린아이의 특유 순수함을 이용해 세간에 알려진 일반적인 느낌이 아닌 좀 더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고안해낸 바 있다.
실제로 아카데미 건물이 조금 생소하면서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리라.
“여기 좀 휑하다.”
“아……”
“적어도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공간이니까. 단순 효율적인 공간 활용이 아니다 해도 감성을 어느 정도 자극하는 조형물은 필요할 거야.”
내 말에 에오니샤가 고민하듯 공터를 바라보았다.
“자, 생각해봐 에오니샤. 여기에 커다란 연못이 있는 거지. 수로 시스템을 끌어오는 건 어렵지 않으니 이곳 아래에 물길을 터서 물이 고이고 썩지 않도록 유지할 수도 있어.”
내 말에 에오니샤는 그 모습을 상상하는지 눈을 천천히 감았다.
“한쪽 편엔 자연스러운 형태의 돌을 세워놓고 인공 폭포를 만드는 거다. 높을 필요는 없어. 물이 그곳에서 떨어지는 분수 형식이 되면 되니까.”
“아……”
“그리고 연못의 중앙엔 아름다운 조각상을 배치하고 연못 속엔 그래, 비단잉어 같은 녀석들을 풀어놓자고. 그 외에 정령사들을 조금 이용해서 물의 정령들이 모여들게 하는 것도 좋겠다.”
내 말에 에오니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생각하는 구도와 내가 생각하는 구도는 다르다.
하지만 녀석은 녀석이 생각하는 나름의 아름다운 구도를 벌써 떠올린 모양이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이윽고 눈을 크게 뜬 녀석이 나를 올려다보고 소리쳤다.
“그렇지? 정말 아름답겠지? 이곳을 지나가는 학생 녀석들이 잠깐 마음을 진정시키기엔 그만한 것도 없을 거야.”
“네! 오라버님 말씀대로예요! 정말 멋진 공간이 될 거에요. 남성과 여성이 만나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로맨틱한 장소가 될 수도 있을 거구요!”
신이나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따뜻하게 말했다.
“그럼 만들어.”
“네?”
“뭐해, 만들라고.”
녀석의 미소가 사라졌다.
* * *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나는 눈앞에 놓인 무난한 디자인의 인형을 바라보았다.
벌써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해왔기에 더는 실패할 길이 없다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좋아……. 좋아.”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벤저 편대를 주로 작업해온 골고다 장로와 새로운 후임의 완성장면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다가온 륀느가 있다.
그리고 한 차례 조정을 마치고 어디서 꺼내왔는지 모를 흔들의자에 앉아 삐걱거리고 있는 에나벨이 엘프의 귀를 까딱이며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멀쩡하게 생긴 녀석이 하는 짓은 왜 저렇게 괴기스럽게 변했는지는 조금 의문이다.
“자……! 시작해봅시다.”
이전 티오니스로 넘어오려던 심연의 거대 생명체를 공간 채로 지워버렸을 때 구했던 심연의 파편이었다.
당장 사용하기엔 역시 이놈 또한 페르세르크를 찾아 헤매는 행동거지를 보였기에 나는 이것의 힘을 반쯤 중화시킨 뒤 성국의 성역에 넣고 마치 냉동하듯 추가로 정화해버렸다.
그 때문에 심연 자체의 힘은 극도로 약해졌지만, 그 특이한 힘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후 나는 몇 가지 시약과 마법진을 이용해 파편을 개조하는 데에 성공한 뒤 두 번째 어벤저 편대의 골렘인 메라몽의 심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심장이 곧 이식되자 아직 겉 외향이 만들어지지 않은 메라몽이 옅은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륀느! 새로운 후임을 매우 높게 평가!”
륀느가 눈을 반짝이며 소리친다.
하지만 지하 연구실의 다른 이들은 긴장한 듯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메라몽 프로젝트는 아웃이 된다.
두 번째 자식이 그렇게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았던 골고다 장로나, 이놈을 만드는데 돈이 많이 들어간 내 입장에선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실험이었다.
이윽고.
스르륵…….
옅게 빛나던 몸이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온다.
동시에 스스로 일어나있던 인형의 몸체가 일순간 액체처럼 꿀렁이더니 곧 다시 본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끼익…….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에나벨이었다.
말없이 품에 인형 하나를 끌어안고 다가간 에나벨은 무감각한 얼굴로 메라몽에게 다가갔고 이내 코가 닿을 거리까지 가까이 간 다음 천천히 메라몽의 반들반들한 얼굴 부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기이한 각도로 꺾기 시작했다.
멀쩡히 선 채로 고개만 왼쪽으로 눕히듯 꺾기 시작한 것이다.
“……”
“야. 저거 누가 시스템 설계했냐.”
내 타박에 누군가가 움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에나벨은 개의치 않고 한계치까지 목을 꺾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에나벨의 입에서 미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에나벨이 분석합니다.”
촤르르르르륵!!!!
그리고, 메라몽이 움직였다.
녀석의 양손이 액체처럼 뒤틀리더니 이내 수십 가닥의 촉수가 되어 에나벨의 전신을 포박한 것이다.
순식간에 팔다리가 포박당해 허공에 들어 올려진 에나벨의 행동에 륀느가 눈을 더욱 반짝인다.
“륀느! 두 번째 후임의 능력이 매우 출중하다고 분석해!”
“야이 미치광이들아……”
대체 또 뭘 설계해서 넣었나 싶어 골고다를 바라보자.
“커흠……”
내 시선을 피하는 그가 보였다.
기본성격에 관해선 내가 설정해주되 설계 자체는 그들에게 맡긴 게 후환이었다.
온몸을 포박당한 채로 고개를 꺾고 있던 에나벨의 눈이 점차 새카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치마를 입고 있는 터라 상당히 민망한 꼴이 되어있음에도 골렘은 골렘인지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에나벨이었다.
“검색. 검색완료.”
무엇을 검색했는지 에나벨의 등 뒤로 사령 마나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동시에 미리 준비된 마법진과 연동되며 그녀 특유의 흑마법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시커먼 그림자 같은 거인이 에나벨의 뒤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가차 없이 촉수를 찢어발겨 버리더니 멍하니 서서 에나벨을 포박하고 있던 메라몽을 낚아채 허공에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형세가 역전된다.
“같이…… 노올자.”
작은 목소리와 함께 메라몽의 육신이 에나벨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에나벨이 마치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짜악!
“셧다운.”
다만.
녀석들의 그런 신경전은 곧 이어진 내 목소리에 그대로 멈춰졌다.
다른 이들이 아닌 유일하게 나만이 이 녀석들을 말 한마디로 다운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대로 녀석들의 전원을 내려버린 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륀느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고는 골고다 장로와 그를 따르는 드워프들을 바라보았다.
“골고다 장로님.”
“커흠! 나, 나는 그저 개성 있는 자식들을 보고 싶었을 뿐이오! 서로 싸울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지.”
대체 왜 서로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메라몽과 에나벨은 같은 편대 소속의 생체 인형 형태를 지닌 골렘이지만 서로 상당히 앙숙이라는 느낌을 말이다.
전투력에 치중된 디셉티콘 편대와는 다르게 잠입을 목적으로 만들어져 커뮤니케이션과 기본적인 사고판단 능력을 갖춘 녀석들인 만큼 같은 팀의 충돌을 예상하기도 해야 했다.
“내, 내 금방 수정하리다! 은사!”
“아닙니다. 그냥 두세요. 이미 만들어진 녀석들의 자아를 바꾸는 것도 웃긴 일이니.”
결국, 엘더브레인인 륀느가 조율만 잘하면 되는 일인데.
녀석은 두 생체 인형이 치고받고 싸우는 꼴을 오히려 응원하고 있다.
“가만……”
메라몽의 행동을 가만히 되짚어보던 나는 문득 주머니 속에서 느껴지는 작은 떨림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페르세르크. 좀 나와볼래?”
“절대 싫으니 꿈도 꾸지 마시게!”
역시 그녀에게 메라몽은 극도로 가까이 가기 어려운 존재인 듯싶었다.
* * *
성국에서 받아온 물건을 이용해 두 번째 어벤저 편대가 완성되었다.
그동안 나는 열쇠가 활성화될 때마다 꾸준히 문을 열어두었고 쌍둥이 골렘이 열일을 하며 벌어다 준 환골탈태 스택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24스택.
석 달 경과를 생각하면 상당히 적은 수치였다.
하지만 차원 열쇠의 쿨타임 돈다고 무작정 문을 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로부터는 굳이 시간에 맞춰서 그것을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실제로 아직 열쇠가 벌어다 준 추가 시간은 고작 120분, 그때 이후로 30분이 늘어난 게 전부였다.
처음 30분이던 것을 생각하면 4배에 가까운 발전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거, 유르기안 대륙말고는 아직 이어주질 않나 보네.”
“언제까지 그 골렘들에게만 맡겨두는 것도 웃긴 일이 아닌가. 직접 가서 상황을 확인해보는 것도.”
“그래야겠지. 그전에 내가 없어도 영지가 돌아가게는 만들어놔야 하지 않겠냐.”
아카데미 자체가 완공되면서 여러 소식이 전해져 왔다.
검의 제국이라는 팔란 제국에서 하인스 영지의 아카데미 소식을 듣고 수석 황실 기사 몇몇을 파견해준다는 소식도 전해져왔다.
아마 눈치 빠른 살리반이 자국의 전력을 올리기 위해 먼저 손을 쓴 것이리라. 내 성격이라면 학생들을 키우기 위해 먼저 교수진들을 조질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실제로 그러했다.
“뭐든 학교는 학생을 가르치는 곳이죠. 당장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인 전쟁고아들은 빠르게 확보되는 대로 이곳으로 보낼 수 있도록 여기저기 손을 써두었습니다. 부모를 잃고 살길이 막막해진 아이들입니다. 부모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어간 유공자들이고요. 당연히 책임져야지요.”
목숨을 걸고 땅을 지킨 이들이다. 그들을 살릴 순 없어도 자식들을 그렇게 홀대하는 건 웃긴 일이니까.
대륙 각지에서 이전의 전쟁으로 인해 생긴 전쟁고아들을 찾아 하인스 영지로 데려오게 시킨 나는 눈앞에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익스퍼트 최상급에 한둘은 마스터급 기사들이다.
“팔란 제국에서 오셨다고요.”
내 말에 팔란 제국의 기사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성이 자자하신 데이비 왕자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수석 황실 기사 올만입니다. 왕자님과 비교하면 미천한 실력이지만 황태자 저하의 명에 따라 당분간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드마스터급 기세를 풍기는 기사가 겸손한 발언을 하며 내게 말해왔다.
“뭐, 돌아가는 건 여러분들의 마음입니다. 실제로 학생도 사람이지만 교수진도 사람이니까요.”
내가 그의 어깨를 잡아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하자 그가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키도 크시네. 체격도 좋고.
검 휘두르기 딱 좋은 몸이긴 하다.
갑옷을 입고 있는 그를 바라보던 나는 주변의 공간을 대충 확인한 뒤 빙그레 웃어 보였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계급에 무관하게 이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가르쳐주셔야 합니다. 비전까진 아니지만 보통 수준의 검술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스스로 개척하면 되니까요. 불만 있으신가요?”
내 말에 기사 몇몇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대륙을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명예로운 병사들의 유가족입니다. 비록 평민이라 하여도 그들의 명예는 지켜 져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기사의 나라다운 마인드였다.
이게 선진국의 시민의식이렷다.
평민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깽판을 놓을 기사였다면 살리반이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볼 손해가 막심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만 해선 타 아카데미와 비교할 때 경쟁력이 달리죠. 소드마스터가 직접 교편을 잡고 있다는 것만 봐도 경쟁력이 없진 않지만 우린 그거론 부족합니다. 당장 계급을 떠나 공평한 학우생활을 해야 함에도 이 학교를 고집할 만큼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해요.”
빙그레 웃어 보인 내가 목검을 하나 꺼내 들었다.
“전원 덤비시죠. 우선 학생들 가르치기 전에 교수진을 괴물로 만들어야 하니.”
걱정 마세요. 사람이 쉽게 죽진 않으니까요. 한 일주일만 고생하면, 만족할만한 수준이 나올 듯싶습니다.
내가 속성으로 가르치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다만 조금 있다가 린디스 제국과 마탑에서 지원한 마법사분들도 조금 손을 봐야 할 듯하니 빠르게 움직입시다.
내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덤벼.”
이윽고 내 표정이 싸늘하게 굳자 그들은 마치 귀신을 본 듯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이후 기사들과 대면한 강당에선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들이 울려 퍼졌다.
그 때문에 아카데미 괴담이 아카데미 개장 전부터 생길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