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0화
124. 갈아 넣으면 다 돼. 기술자 건, 교수 건
정확히 교수진들이 하인스 영지로 파견 왔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제공한 것은 맛있는 식사와 극진한 대접이었다.
긴장 정도는 푸시라고.
그 후 그들에게 하인스 영지의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이상을 알려주었고, 그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학교의 시스템에 불만이 가득한 교수가 존재한다면 아카데미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결과를 위해선 학생의 재능도 중요하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르치는 이들의 역량.
실제로 노래만 했다 하면 지옥의 세레나데를 펼치는 바람에 회랑의 영웅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내가 음유시인으로서 어엿한 존재가 되는 데엔 음악을 가르쳤던 스승인 뮤즈의 역량이 빛을 발한 케이스였다.
어찌 되었건 교수진의 재능을 딱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여긴 나는 어느 정도 기간을 계약으로 걸고 한가지 서약을 받아내었다.
이곳에서 익힌 그 어떤 것도 바깥에 유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개개인의 역량 상승까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현재.
다시 한 번 중요점을 인식시켜준 나는 그들에게 본색을 드러냈다.
살리반 황태자, 눈치만 빨라서 내게 수석 황실 기사를 파견하는 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낸 듯 보인다만.
아마 이들은 당신을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끄으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묵직한 바스타드 소드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거구의 체격을 지닌 사내가 체면도 잊은 채 비명을 지르며 몇 차례 바닥을 뒹굴었다.
“심각한데…….”
무려 소드마스터급 강자가 이토록 허무하게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모두가 황당한 표정으로 홀을 바라보았다.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기사를 멀리서 바라보며 손에 든 숏소드 형태의 목검을 가볍게 붕붕 돌리던 나는 곧 그것을 휙 던져버리고는 무기 거치대에 걸린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하급자 코스부터 시작합시다.”
“크, 크윽…… 자, 잠시만.”
“잠시만이 어딨습니까. 지금 개조 받아야 할 사람이 올만경 당신 하나가 아니야.”
담담하게 말하며 내가 손을 튕겼다.
[하이네스 힐]
상위 회복마법이 가해진다.
압도적인 신성력으로 찍어 누르는 회복능력에 온몸이 격통으로 정신을 못 차리던 그가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시원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자. 다시 시작합시다. 제가 해드릴 건 딱 하나뿐입니다.”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이를 상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인식시켜주는 것.
내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들도 눈이 있는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단순히 소문만 무성하던 내 무력이, 단순 성자라는 존재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짧은 시간에, 대륙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이가 드물어질 정도로 날뛰었으니 실체를 본다 해도 그 여파가 마냥 크진 않다.
나뭇가지를 휙휙 휘두르던 내 행동은 엄연히 그들을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후회하셔도 책임 못 집니다!!”
실제로 기사 중 하나는 그런 내 행동에 상당히 반발심이 생겼는지 검기까지 피워올리며 덤벼들었다.
하지만.
휘이익!! 빠아악!
도저히 얇은 나뭇가지에서 난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할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이 허공을 날았다.
“기사에게 검은 생명입니다. 하지만 결국 검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는 건 기사 본인입니다.”
그러니까요.
기사 간에 역량 차이가 압도적으로 심하면 무기는 소용이 없다고.
“뭐, 비전까지는 아니지만, 실전경험 정도는 시켜드릴게.”
내 미소에 기사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린다.
“저런……. 역시 기사들은 몸을 쓰는 게 쉽진 않겠네요.”
멀찍이서 이 사태를 관망하던 앨리스 대주교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를 따라 이곳으로 왔던 상급 신관들이 저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한다.
“그러게요…….”
“그나저나 정말 성자 데이비 왕자님은 대단하신 분이네요. 어떻게 저 어린 나이에 저만한 실력을……”
“성자가 된다고 검을 잘 쓴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말이죠.”
저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동감이오. 사실 우리 마탑에서도 데이비 왕자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소이다. 샤쿤탈라의 F반 하면 유명한 일화가 있지.”
낙제생. 최하점.
문제아 집단.
그런 F반을 짧은 시간 안에 괴물 같은 아이들로 키워놓은 것으로 이미 마법사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사실 다른 방법을 쓴 것인가 했소. 아무리 봐도 데이비 왕자님의 몸에선 마나가 한 줌도 느껴지지 않거든.”
한 마법사의 말에 앨리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도 마찬가지예요. 일반인, 아니 평범한 인간 이하의 마나라고 밖에 볼 길이 없는데 말이죠.”
기사들의 비명에 마치 음악처럼 들으며 느긋하게 사태를 관망하는 이들을 보던 나는 검기를 흉폭하게 피워올리며 덤벼드는 기사의 균형을 가볍게 무너뜨린 뒤 합공하는 기사에게 냅다 던지고는 말했다.
“그렇게 여유 부릴 틈이 있습니까?”
내 말에 앨리스의 몸이 떡하니 굳었다.
“신성마법은 서클 없이 신성력의 총량과 숙련도로 이루어집니다. 앨리스 대주교.”
“……”
“왜 그렇게 봅니까. 이제 내가 앨리스 대주교의 상관인데.”
빙그레 웃으며 나는 망설임 없이 사형선고를 때려 박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기사분들의 조정이 끝나면 다음은 신관분들 차례이니.”
내 말에 앨리스를 포함한 상급 신관들의 표정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 * *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지금껏 계급에 상관없이’라는 목표로 세워진 아카데미는 여럿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보통 아카데미의 경우 귀족 왕족의 구분만 없앨 뿐 평민 같은 하층민까지 받아들이는 곳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평민을 괄시해서?
그런 아카데미도 다수지만 실상 돈이 안 된다는 이유가 많기도 했다.
근근이 살아가는 평민에게 고가의 학비를 지원하고도 너끈할 만큼 여유로운 자금 사정을 가진 곳은 실상 그리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실제로 재능이 있는 이라면 평민이라도 받아 교육하는 게 현 대륙이지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제쳐놓고 배우고자 하는 이들 모두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건 사실상 그리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인스 영지에 대한 주목도가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하필 아카데미를 설립한 인간이 어디 보통 인간이던가.
마침 대륙에서 현재 절찬리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대륙의 성자,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이름값이 그 무게를 압도적으로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의 무력이 상식에서 벗어난 무언가라는 것은 어느 정도 소문이 돌고 있었고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동부대륙의 타국에서 라운왕국을 건드릴 때, 한때 호랑이라 불렸던 국왕 크리아네스 올 라운이나 왕국의 검인 페일트리스 후작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데이비 왕자라는 개인을 신경 쓰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카트린느! 카트린느! 소식 들었어요?!”
청록빛깔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작은 소녀가 후다닥 뛰어들어왔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그녀의 머리 위에 돋아난 귀가 쫑긋거리며 귀여움을 어필해왔다.
“어머, 황녀 저하. 아무리 제가 격식이 없는 년이라지만 황족이 그렇게 뛰어다니시는 걸 보면 말려야 하는 입장인데요.”
“아, 알고 있어요! 그보다 소식 들었어요?!”
소녀, 에이리아 알 린디스의 외침에 카트린느가 심드렁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이 앙큼한 황녀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또 이렇게 호들갑일까.
늘 그렇듯 불여우 대공이라 불리는 카트린느 카라벨라의 입장에서 이 청록빛 머리칼의 소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면 늘 충동을 이기기가 어렵다.
당장 납치라도 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말이다.
괜히 동부 최대 강국이라 불리는 린디스 제국의 황제와 황태자가 죽고 못 사는 소녀가 아니다.
“그래요. 황녀 저하. 무슨 소식인가요?”
“데이비 왕자님이 아카데미를 만드셨데요! 그것도 평민들도 입학할 수 있는!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겠다는 일념으로 아카데미를 만드셨데요!”
그녀의 외침에 카트린느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 그 이야기로구나.
사실 그딴 게 아니라 뮤우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을 위해 아카데미를 지어 올린 것이지만 에이리아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카트린느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 그 사람, 고자 같고 성질머리 난폭하긴 하다지만 제법 상식적인 선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요.”
상식적인 선?
어떤 놈이 대륙 최대강국의 황제를 개 패듯이 팬단 말인가.
카트린느의 입장에서 상식적인 선을 가장 어긋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데이비라는 인물이지만 다른 점은 그녀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태생부터가 고귀한 왕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인간이 가지는 선악의 개념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키는 사람이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고, 잘했으면 상을 받는다.
그 점에서 카트린느는 데이비라는 인물을 꽤 고평가하고 있다.
딱 한 가지를 제외하고 말이다.
“황녀 저하. 솔직히 말할까요?”
“네?”
“데이비 왕자가 뭐가 좋다고 그래요?”
“그, 그게 무슨……”
“아, 뭐 좋아요. 대륙 최고 신랑감이라고 요즘 귀족 영애부터 왕가의 여식까지 하나같이 침을 질질 흘릴 정략혼의 대상인 건 사실인데.”
정작 그 인간, 황녀 저하께 지금까지 편지 한 통이라도 보냈어요?
그 질문에 에이리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펴, 편지라니……. 여, 연서라니요! 아직 저는 왕자님께 그런 걸 받을 정도는……”
“후우……. 답답해 죽겠네.”
카트린느가 쓰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오르트 황제의 수작으로 한때 약혼식까지 거론된 바 있다.
하지만 데이비 왕자는 어물쩍거리며 그 일을 넘겨버린 바 있었다.
친구부터 시작하자고? 빛 좋은 개살구도 그런 개살구가 없다.
“솔직히 말할게요. 황녀 저하. 제 부군이 하인스 영지에 무역문제로 들렀다가 무슨 소식을 들어서 왔는지 알아요?”
카트린느의 말에 에이리아가 멈칫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아이처럼 그녀의 얼굴이 대뜸 울상으로 찌푸려졌다.
“시, 싫어요!”
“이미 데이비 왕자의 속에 다른 여인이 있어요.”
“시, 싫어!”
그녀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고자가 아닌 이상 그렇게까지 선을 긋는다는 건 데이비 왕자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했죠. 차라리 일부다처제라도 이용해서 황녀 저하를 그 사람의 옆에 붙여두는 게 옳은가하고요.”
“……”
“그런데 그 인간, 보기와는 다르게 제법 순정파라 머릿속에 주지육림 같은 건 없더라고.”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물었다.
“자신 있어요? 이미 그 은발의 엄청나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결혼한다는 말까지 나도는데?”
잘못 자극해선 곤란했다. 카트린느는 잘 알고 있었다.
에이리아의 종족은 엄연히 나인테일 종족. 그녀 본인은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그녀의 본능은 그녀가 데이비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참 가혹하디 가혹한 종족의 운명이지만 그것이 현실인 것을 어찌할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저하. 이제라도 마음을 정리하는 게…… 더 늦어지면 본성은 저하를 옥죄어올 겁니다. 나인테일은 더럽게 이기적인 종족이에요.”
“싫어요!”
단호한 외침에 카트린느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것도 안 해보고 놓치고 싶진 않아요……. 이전엔 왕자님께 폐가 될까 멀리서 기다렸지만…….”
그녀의 외침에 카트린느가 진지하게 물었다.
“이를 테면요?”
“우, 우선은……”
고민하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선은……”
짧게 침묵한 그녀가 울상을 지어 보였다.
“어, 어떻게 하죠? 남자를 어떻게 꼬셔야 할지 모르겠어요.”
결국, 흐느끼는 에이리아였다.
그녀는 오랜 시간 병을 앓아왔기에 이성을 꼬시는 기본적인 기술조차 알지 못했다.
프리아님 맙소사.
카트린느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저하, 우선 이렇게 해보죠.”
그녀의 입가가 음흉하게 미소를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