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2화
많은 이들이 교수가 되기 위해 하인스 아카데미로 왔다.
분명 모두가 하나같이 대륙에서 어느 정도 입지가 있는.
누군가를 가르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춘 이들이지만.
기준치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던가.
가장 심하게 변한 것은 팔란 제국의 수석 황실 기사였던 올만경이었다.
소드마스터로 어딜 가도 대접을 받을 만큼 대단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흐흐……흐흐흐흐…… 내꺼야…… 내꺼라고……. 누구도 주지 않을 거야.”
지금 보이는 그의 모습은 정말 그가 대단한 소드마스터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안쓰러웠다.
그놈의 감자를 손에서 놓지 않는 올만 경이었다.
마치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파르르 떨며 감자를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그에게 귀족의 품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단시간에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사람이라는 게 언제든 극한 상황까지 갈아 넣어지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현재 그의 모습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존하는 생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음, 아주 좋아.”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뒤로한 채 아카데미의 거대한 본관을 나선 나는 드워프들이 모여 무언가를 열심히 설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골다 장로님. 그건 뭡니까?”
“오, 은사. 잘 오시었소. 마침 찾고 있었소이다.”
“저를 말입니까?”
“그렇소. 이놈의 마무리 작업이 끝나면 곧바로 시운전을 할 수 있어서 말입니다.”
황색 바위 부족의 드워프들이 보여준 것은 커다란 마차였다.
그것도 여러 대가 연달아 이어진 마차.
“사실 이전에 골고다 형님이 그 메라몽인지 뭔지를 만들면서 남은 마정석이 있어서 말이외다. 은사께서 알려주신 수식대로 구상해서 말없이 마차를 끌 수 있는 자동수레를 만들었소. 뭐, 말이 자동수레지 직접 조종해야겠지만 말이오.”
메가트론이 스스로 움직이는 시스템을 빌려와서 사용한 듯 보였다.
그가 마차의 전면부를 개방하자 그 내부에 마나석과 그 마나석 사이에 연동된 작은 마정석이 보였다.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 이 정도가 한계이오만. 굴러갈지는 직접 실험을 해봐야 해서 말입디다.”
만드는 것이야 가능하지만, 그 마법진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찾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아카데미가 어디 좀 넓소? 그래서 이런 이동수단이 있으면 어떨까 하고 말이오. 에오니샤 그 꼬마 왕녀님께서 발안한 아이디어외다.”
“괜찮네요.”
익숙하게 마정석에 손을 올린 나는 수식을 빠르게 검산한 뒤 손을 내밀었다.
“흑철칼 하나만 주세요.”
“이런 문제가 있나 보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미 예상했다는 듯 흑색의 조각칼을 내밀었다.
이에 나는 가볍게 마나를 일으킨 뒤 마정석 위에 쓰인 수식 일부를 뒤바꾸기 시작했다.
표면을 살짝 녹여 부드럽게 만든 뒤 다시 새기는 과정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워프들도 나도 제법 익숙한 작업이었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되겠네요. 마정석이 작아서 출력은 별로겠지만. 사람을 수송하는 데엔 충분하겠네요.”
“호오……. 내용을 이해하긴 어렵소만. 제법 모양이 사는군!”
순식간에 작업을 마친 내가 마나를 불어넣어 활성화를 시키자 침묵하던 마차의 전면부에 달린 발광석이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오오! 가동하는군!”
신이 나서 소리치는 드워프들의 모습에 페르세르크가 고개만 쏘옥 내밀었다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호오……. 제법 흥미로운 물건이 아닌가.”
“타볼래?”
내 물음에 그녀가 나를 보더니 생글거렸다.
“거부하진 않음이야.”
“이거 가지고 테스트나 해보겠습니다.”
“아하하! 여부가 있겠소! 혹여 문제점이 보이면 꼭 말해주시오!”
마차에 가볍게 뛰어오르자 페르세르크가 자신의 몸을 키우더니 내 곁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손잡이를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이내 버튼 하나를 가볍게 눌렀다.
삑.
동시에 작은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녀는 한 손으로 조종용 레버를 잡고는 어찌해야 할까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말없이 앉아있던 나는 그대로 발판에 비치된 두 개의 발판 중 하나를 강하게 틀어 밟아버렸다.
끼이이이익!!!!
동시에 마나가 대량 쏟아져 나오며 마차가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꺄악?!”
“잘 잡아라. 처박힌다.”
비명을 지르며 움찔거린 그녀가 내 말에 화들짝 놀라 레버를 강하게 틀어잡았다.
그리고는 마차가 벽에 처박히기 직전 가까스로 방향을 트는 데 성공했다.
“데이비!”
“속도감이 좀 있어야 재미도 살지.”
물론, 실제로 운용할 땐 인명사고를 생각해서라도 절대 규정 속도 이상 나오지 못하게 해야겠지만 말이다.
* * *
결국, 페르세르크는 마차로 시원하게 추돌사고를 내고 말았다.
그녀에게 마차의 속도가 마냥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몸에 페달을 내가 마구잡이로 밟아대고 있으니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일 리가 없다.
“이런……”
나무로 만들어진 부분은 박살이 났고 금속 부분은 찌그러졌다.
전면구동부는 다행히 큰 흠집이 나지 않았지만 드워프들이 열심히 만든 작품이 순식간에 윤회의 길에 올라버린 꼴이었다.
“이게 다 그대 때문이야!”
“이것 봐라? 이걸 또 내 탓으로 돌린다고?”
“본녀는 분명 속도를 줄였어.”
“네가 밟은 게 브레이크냐?”
브레이크는 내가 밟았지. 네가 밟은 건 전진 페달이고.
지구의 자동차와는 다르게 아직 이런 부분에서 기술적으로 미숙한 점이 드러난다.
하지만 직접 완전히 개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 할 수 있다면 그걸 밀어주는 게 성장에 더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사고가 난 와중에도 인명피해는 전혀 없다는 게 놀랍지만, 그녀와 나를 생각하면 사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드래곤이 와서 몸통박치기를 해도 버텨낼 괴물이 고작 나무와 부딪혔다고 크게 다칠까.”
“아. 팔이 부러진 거 같은데.”
“거짓부렁.”
내 말에 눈을 흘기며 중얼거린 그녀가 다시 울상을 짓고 부서진 마차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이를 어째…….”
나름대로 열심히 만들었을 드워프들에게 이 사실을 어찌 전해야 하느냐는 둥 중얼거리던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던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웃겨? 그대는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안전 검사 하기 전엔 절대 허가 안 한다.”
내 말에 그녀가 침묵했다.
안전 검사만큼 중요한 게 어딨다고.
이 학교에서 누가 다치게 둘 생각은 전혀 없다.
“여기 있어. 잠깐 결계 좀 확인할 테니.”
내 말에 페르세르크는 주저앉은 채로 손만 흔들어 보였다.
분명, 이 부근에 아카데미를 감싸는 결계의 핵을 심어두었었다.
작은 결계를 만들어 초월의 종언으로 거대화하는 방식을 택한 결계였다.
그런 마당에 결계를 유지할 촉매로 다수의 마정석과 정령석을 사용했으니 어지간해선 소형 메테오 몇 방도 견뎌낼 만큼 강력한 장막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서 많이 본 기술이라고?
하인스 영지에서 멀지 않은 엘프 숲인 달의 숲의 결계와 매우 흡사한 시스템이니 당연할 수밖에.
아카데미 내의 숲 속으로 들어온 나는 익숙한 걸음으로 풀숲을 해치며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숲 내부에 존재하는 작은 연못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연못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흠……. 결계 자체는 잘 유지되고 있네.”
하인스 영지의 자랑이 될 아카데미이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이곳을 영지의 대피소 정도로 만들어두었다.
부지가 거대하니 피신 오는 이들을 숨겨주고 보호하기엔 제격일 테니 말이다.
털썩!!
그때였다.
내 귓가로 무언가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이에 내가 나서기도 전 륀느가 순식간에 소리가 난 곳으로 움직이려 했다.
“륀느, 기다려.”
그렇게 그녀를 제지한 나는 익숙하게 청단이를 뽑아 들고 천천히 연못의 근처 풀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건 죽여달라고 말하고 싶어서인가?”
담담한 질문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여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였다.
엉망진창일 정도로 참혹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흥미롭지 않은 인간, 그리고 흥미로운 연구소재…….”
“륀느는 연구소재가 아니라고 명시해. 이것을 륀느가 낮게 평가. 한 번만 더 연구소재라고 부르면 륀느가 자랑하는 인류의 구원자를 사용해.”
륀느의 경고에 쓰러져 있던 분홍빛 머리칼의 여성은 반쯤 찌그러진 안경을 고쳐 쓰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 목에 걸린 청단이를 무시한 채 내게 말해왔다.
“망명을 요청해.”
그녀의 말에 나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들었어. 이단 심문회와의 싸움. 그곳에서 내 패밀리어가 전해줬어. 인간, 네가 찾고자 하는 인물.”
그녀의 말에 내 인상이 찌푸려졌다.
뱀파이어 중에서 가장 별거 없을 것 같으면서도 가장 눈치가 빠르고 약삭빠르게 살아남는 것이 그녀였다.
“이름은 울드.”
그녀의 발언에 나는 검을 거뒀다.
“아는 대로 털어놔.”
그녀가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그 목숨값이 조금 오를 뿐이다.
* * *
“우선 약속해. 내 안전을 보장해줘.”
“네 입장을 잊었나? 지금 네가 먼저 요구사항을 던질 입장은 아닐 텐데.”
게다가 여긴 적진. 그것도 가장 위험한 장소일 것이다.
“나는 적대 세력. 현재 양지로 나가면 당장 처형당할 뱀파이어야. 하프지만 뱀파이어는 뱀파이어.”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사람이 없는 실내공간이라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 자체는 없었다. 그녀의 목숨 자체에는 미련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가지고 있을 정보는 제법 쓸모가 있었다.
“이 이상 숨어있는 것으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당분간 생존이 가능한 은신처가 필요해.”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싫은데?”
“싫어하지 않을 조건. 나는 적진 한복판에 숨는 것으로 눈을 속일 수 있어. 당신은 필요한 인재를 획득할 수 있어.”
“인재는 개 풀 뜯는 소리 하네.”
내 독설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나를 설득했다.
“조사했어. 당신, 연금술을 가르쳐줄 인물을 모집한다고.”
“그랬지.”
“이래 봬도 현자의 돌을 만들어낸 경험이 있어. 동족들 사이에선 파라셀루스라 불렸고.”
“현자의 돌을 만들었다고?”
그녀의 발언에 나는 그제야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현자의 돌.
그건 륀느의 심장을 구성하는 데우스 액스 마키나(기계장치의 신)과 같이 현재 이 대륙의 연금술로는 만들 기술도 없거니와 재료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실력은 충분하다고 자부해. 나쁘지 않은 거래. 흥미롭지 않아?”
“전혀. 아니올시다. 네가 돌았구나. 가장 지켜야 할 애들이 있는 곳에 위험분자를 선생으로 놔둔다고? 어떤 미친놈이 그딴 제안을 승낙하나.”
“죽이지 않아. 현자의 돌 때문에 내게 흡혈 자체는 필수요소가 아니야. ”
“그래서.”
“피, 빨지 않아. 뱀파이어라는 것을 들키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 있어.”
“그렇게까지 해서 숨으려는 이유는?”
차라리 자신을 쫓는 걸 그만두라고 할 것이지.
그런 내 의문에 그녀는 간단하게 답했다.
“자신을 심연의 공주라고 말했던 울드. 그녀에게 나는 목숨을 빚졌어. 하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자 나를 죽이려고 해.”
“울드……, 그 여자가?”
“……”
그녀는 말없이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소매를 걷어내자 참혹한 형상이 드러났다. 새하얗고 가늘었던 그녀의 왼팔에 새카만 핏줄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다.
“그녀가 만든 것. 회복 불가. 지금도 나를 잠식하고 있어.”
그녀의 말에 내가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푸확!!
동시에 그녀의 왼팔이 잘려나가자 밀피유의 눈이 크게 떠졌다.
“끄윽……”
비명을 억지로 삼키며 무너진 그녀의 왼팔에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인간과 다르게 뱀파이어는 혈액이 조금 특이한 편이다.
하지만 곧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이 마치 재생하듯 다시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각인. 절대 사라지지 않아. 이 부분은 잘라내도 다시 돋아나.”
그녀의 말에 내가 침묵했다.
“울드. 그녀는 생각보다 이 땅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 매우 흥미로운 연구소재지만 내 목숨, 현재로썬 상당히 소중해.”
그녀의 말에 나는 손에 피워올렸던 천마공을 거두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계속해봐. 울드라는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지?”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할 순 없어. 다만 마지막으로 만난 곳은 동대륙.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어. 동생을 찾고 있다고.”
“그런 뻔한 거 말고.”
“그리고……, 자신의 심장을 찾고 있다고 했어.”
심장?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흑요석 형태라고 들었는데.”
그녀의 말에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아공간을 열어 손을 밀어 넣은 나는 곧 그 의심이 되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이단심문회의 지하 비밀공간에서 찾아냈던. 바로 그 흑요석이었다.
“……”
말없이 흑요석을 손에 쥐고 있자 그녀가 의아한 듯 흑요석을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를 배신하지 않고 굴종했어. 그렇기에 그녀는 내가 자신의 수하라고 판단해.”
“그래서.”
“당신이 그녀를 막아줘. 다만 그녀는 너무 강해. 당신이 강한 건 알지만, 그녀의 규격은 존재 외의 문제야. 그러니 준비를 할 수 있게 도와줄게. 나는 그녀에게서 얻어낸 모든 정보를 당신에게 제공하고 그녀의 약점을 파악할 거야.”
“내게 원하는 건?”
“울드는 내게 당신의 정보를 얻어내라고 했어. 목숨의 생존. 하지만 그녀를 따른다고 한들 결국 내게 남는 건 죽음뿐이라는 판단이 타당해.”
어차피 서로 죽을 위기라면 차라리 말이 통하는 쪽에 빌붙으시겠다?
그녀의 거래에 나는 짧게 고민했다.
그리고 답했다.
“뭐라도 좀 내놔야 하지 않겠냐? 그 정보라는 거.”
“그녀는 보름이 되면 활동을 시작할 거야. 그녀를 상징하는 힘이 보름달이라고 했으니까.”
보름이라면…….
마침 오늘 밤이다.
“위치는 알고 있겠지?”
“충돌할 생각?”
“아니, 당장은 지켜봐야지.”
싸워서 당장 이길 상대가 아니면 간이나 보는 것이다.
“아마, 그녀 쪽에서 먼저 당신을 찾을 거야. 그녀를 구분할 수 있게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좋아, 적이 어떤 년인지는 직접 봐둘 필요가 있겠지, 네 처분은 그 이후에 정한다. 불만 있나?”
“없어.”
단호하게 말하지만 나는 비소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이중 스파이라……. 건방지게 저울질을 하다가 큰코다친다는 걸 나중에 알려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