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3화
125. 심연의 공주
보름이 뜨는 날.
하필 그날이 바로 오늘 밤이라는 사실은 마치 이때를 노렸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들게 했다.
밀피유는 울드라는 그 심연의 공주가 당장은 내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기에 바로 나를 죽이려 들진 않을 거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가 밀피유에게 내린 명령은 나에 대해 간단히 알아오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대가 이곳에서 했던 일들을 들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유를 부릴 만큼 강자거나.”
아니면 그런 판단도 못 할 멍청이거나.
확률적으로 보면 전자에 가깝다고 판단하는 것이 현재의 내 생각이었다.
하나만 있어도 대륙을 들썩이게 만들고도 남을 그랜드마스터급 환수 셋.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강해졌을 그 세 환수를 단신으로 제압하고 강제 종속시켰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녀의 무력이 멀쩡하다는 전제조건을 깔면.
“지금 충돌하면 골치 아파지겠는데.”
그녀의 전투 센스나 실력, 깨달음은 둘째치고 기본적인 하드웨어 스펙이 압도적으로 불리할 거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나는 결국 밀피유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절대 뱀파이어라는 정체를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과 이곳의 인간에게 괜한 짓을 하지 않겠다는 조금 미심쩍은 약속을 거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어지간해선 금제라도 걸겠는데.
그녀는 청단이에 베이고도 빠른 시간에 회복할 만큼 특이한 뱀파이어였다.
내가 그녀에게 거는 금제나 저주는 현자의 돌이 가지는 힘 때문에 기이하게 뒤틀려 나로서도 장담하기 어려운 결과를 내놓으니 차라리 안 한 것만 못한 상황이다.
밀피유의 제안은 마냥 받아들이지 않고 내버려두기엔 아쉬운 감이 있었다.
“헌데 이상하단 말이야.”
페르세르크는 육신을 얻은 뒤로 생긴 취미를 쉽게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째서, 그 울드라는 심연의 공주는 자신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않지?”
그녀의 의문 자체는 나도 생각이 같았다.
실질적으로 현재 대륙의 수준을 볼 때 그녀보다 하드웨어가 한참 달린다고 판단되는 나조차 아무렇지 않게 대륙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대륙 전체를 뒤흔들어 당장 원하는 바를 이룰 수도 있을 그녀가.
대체 왜 이렇게 침묵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직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기도 했다. 밀피유 그 뱀파이어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닌 게지.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페르세르크를 속일 수 없다.
결국, 그녀가 한 말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것을 그녀를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제약이 있다고밖에 볼 수 없지. 노련한 계략이든 뭐가 되었든, 이 정도로 압도적인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으면 당장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그녀가 이곳에 나타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세상의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거라는 게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이곳에 제법 오래 있으면서도 모종의 이유로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상대가 제일 거지 같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파악이 안 되거든.”
차라리 계략을 꾸미던지. 아니면 그냥 저돌적으로 나오던지.
인과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그 인과를 잘 뒤집어보면 의도가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불규칙하게 저지르는 적이 상대라면 제대로 된 심리전은커녕 상대가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아내기 쉽지 않다.
“그대가 상대의 행동패턴에 대해 고민하는 날이 다 있다니 놀라운 게로고.”
“난 독심술을 가진 게 아니야.”
대충 예측할 뿐이지. 기본적인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상대를 함부로 유추하는 건 정말 위험한 짓이나 다름없다.
“해서? 벌써 보름달이 저 높이 떠올랐어. 이제 어쩌시게. 만약 그 밀피유라는 뱀파이어가 거짓말을 해서 그대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거라면…….”
“륀느가 감시 중이니까 괜찮을 거다. 그보다 느낌이 영 좋질 않아.”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영주성에서 아카데미 쪽을 바라보았다.
아카데미를 둘러싼 4가지의 강한 첨탑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요함이 감돌았다.
그래도 영주성은 제법 활발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지만 이상하리만치 오늘의 영주성은 벌레 우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릴 만큼 고요한 적막으로 가득했다.
기묘한 분위기에 잠시 침묵하고 있던 찰나였다.
“뭔가 이상한데.”
기묘한 분위기와 미묘한 싸늘함이 피부를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든 나는 오랜만이다 싶을 만큼 맹렬하게 나를 찾아오는 이 직감에 벌떡 일어났다.
“데이비?”
“느낌이 영 이상하단 말이야. 잠깐 기다려봐.”
그렇게 말하면서 재빠르게 창문을 타고 허공으로 튀어 오른 나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영주성의 첨탑 꼭대기까지 빠르게 올라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일이 터질 거 같긴 한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아주 미약하지만.
익숙한 마나가 멀리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데이비? 데이비!”
뒤편에서 놀란 페르세르크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나는 이미 그곳을 벗어난 뒤였다.
제발 아니었으면 싶지만,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간다고. 이 마나의 주인이 따라왔을 인물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다.
* * *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마차였다.
마차의 한쪽 편에는 동부대륙 최강국이라 불리는 린디스 제국의 황실의 문양이 박혀있어 이 마차에 타고 있는 인물의 지위를 가늠하게 하였다.
“황녀 저하. 하인스 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카트린느…….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불안한 얼굴로 물어오는 에이리아는 누가 봐도 긴장감이 역력해 보였다.
“자고로 남녀관계는 부딪혀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데이비 왕자는 자유로운 인간이니까. 보통의 방식으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 하지만 이런 걸 여자가 먼저 한다는 건…….”
“확실히 에스코트에 관해서 여성이 먼저 신청한다는 건 어떤 의미로는 남성에게 굉장히 무례할 수도 있긴 하죠.”
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데이비 왕자는 귀족보다는 오히려 자유로운 용병 같은 사람이니까요. 그런 사람일수록 고풍스럽고 따분할 정도로 우아한 예법 따위는 모두 잊으세요. 단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그저 이성을 포획한다는 일념만 가지고 있으셔야 해요.”
카트린느의 조언에 에이리아는 불안해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도 지금 상황이 보통 여타 다른 남녀관계처럼 그저 마냥 기다리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일단, 너무 저돌적인 건 상당한 역효과만 날 거예요. 하지만, 살살 애태우는 게 중요하지. 저하, 제 남편이 말이에요? 절 꼬실 때 쓴 방법을 쓸 거예요.”
“대공의 부군이라면……”
대공의 부군은 상당한 애처가로 소문이 나 있다.
단신 능력만 치면 오히려 능력이 좋은 카트린느에게 빌붙은 별 볼 일 없는 하급 귀족 나부랭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카트린느는 깊이 그를 사랑했고, 그 또한 지독한 공처가로 알려진 만큼 제국 내에서 대공가의 신혼 스토리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었다.
중요한 건 다른 부분에 있었다.
여성을 꼬시는 데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당시 대공의 부군은 자유로운 성격을 지닌 카트린느 카라벨라가 단순히 대륙에 떠도는 로맨스 방식으론 절대 넘어오지 않을 거라는 판단을 빠르게 내렸고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사로잡은 바 있다.
“우리 낭군님의 말대로라면 그걸 두고 간질간질한 무언가라고 했죠. 저하, 저하의 장점을 살려야 해요. 쓸데없이 투덜거리는 건 절대 좋지 않아요. 좋다면 좋은 감정을 펑펑 드러내도 되지만 선을 넘지 않는 거죠. 그렇게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유지……”
끼익…….
대화를 한창 나누던 중 카트린느와 에이리아는 마차가 갑자기 멈추자 대화를 중단했다.
“벨로스 경. 무슨 일입니까?”
에이리아가 혹시 넘어질까 봐 그녀를 붙잡은 카트린느는 에이리아의 자세를 안정시킨 뒤 천천히 마차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그것이……”
황실 소드마스터, 그것도 린디스 제국에서 한편 영웅급 반열에 올라있는 그가 고작 황녀의 마부 노릇이나 하는 게 퍽 웃긴 일이다.
하지만 마부를 시켜서라도 데려가 달라던 것이 바로 벨로스 경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 또한 카트린느와 같은 생각이었다.
“응?”
벨로스 경의 말에 카트린느는 문득 마차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한 소녀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소녀라고 하기엔 조금 성숙한, 20대 중반 정도 여인의 모습을 가진 여성이었다.
검은 머리에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는 소녀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요청해 왔다.
“죄송합니다. 마차의 앞을 막는 것이 무례라는 것은 알지만 길을 잃어서요. 도움을 주실 순 없나요?”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여성은 뇌쇄적인 매력이 넘실거리는 모습이었다.
호위를 위해 따라온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넋을 놓고 그녀를 보고 있거나 말거나.
카트린느는 묘한 기시감에 빠지고 말았다.
‘뭔가…… 조금 이상한데……’
오랜 시간 전장에서 굴러본 그녀의 경험이 말하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용병이나 방랑자, 트레져 헌터, 혹은 상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이런 경우도 제법 존재하는 편이고.
“물론이랍니다. 카트린느, 이분을 도와주세요.”
뼛속까지 순해 빠진 에이리아는 그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듯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선 듯 내밀었다.
“호호 정말 고마워요.”
우아하게 웃으며 저벅저벅 다가온 그녀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서 더 이상 깊이 들어가는 건 힘들어 보이네요.”
“……”
여성의 말에 카트린느는 빠르게 고민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현재 날이 어두워져 숲길을 더 들어가는 건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호위병력도 쉬어야 하고 길이 어두워서 어디서 마차가 전복되지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발광석을 사용한다 해도 이토록 어두운 숲 속이라면 장기적으로 볼 때 이득이 될 수 없었다.
“제가 마침 이 근처에서 야영할만한 곳을 알고 있답니다. 그리로 가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에이리아가 눈에 띄게 반색했다.
“정말인가요? 안내해주시면 정말 고마울 거에요.”
“아니에요. 꽤 높은 귀족 영애분 같은데 이렇게 저 같은 하층민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신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죠.”
그렇게 말한 여성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며 사람들을 안내했다.
“대공? 왜 그러십니까?”
마부 대신 말을 몰던 벨로스 경의 질문에 카트린느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냥……”
동물적인 위기 감각이라고 해야 하나.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
대체 자신이 왜 저 아무것도 없는 홀몸의 방랑객을 경계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이후 여성의 안내를 받아 숲 안쪽으로 들어간 마차는 곧 야영하기 딱 좋은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밤하늘에 뜬 크리아스의 달빛을 받아 환한 곳은 야명초 덕분에 주변이 어느 정도 환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근처에 시냇물이 있습니다. 하인스 영지는 날이 밝으면 갈 수 있으니 이곳에서 야영하는 것이 적합해 보입니다.”
소드마스터 벨로스 경의 말에 에이리아가 양손을 치며 좋아했다.
“그러네요. 모두들 지쳐있을 테니 최대한 편하게 쉬어야 해요.”
그녀의 말에 벨로스는 귀여운 손녀를 보듯 허허 웃어 보였다.
“허허, 이 노인네가 비록 나이는 먹었어도 아직 정정합니다. 황녀 저하.”
“안 돼요. 오래오래 제 곁을 지켜주기로 약속하셨잖아요. 벨로스경.”
“이 근처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찾은 곳이에요. 마침 운이 좋았네요. 식사들은 하셨나요?”
입고 있던 마법사 로브의 후드를 넘기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기사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긴 흑발을 늘어뜨리는 그녀는 확실히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식사는 좀 전에 마쳤습니다.”
“아, 그런가요. 사실 며칠 동안 숲을 헤매느라 아무것도 먹질 못해서……”
굶주린 배를 살살 문지르며 그녀가 말했다.
“어머, 그러면 안 되죠. 리타 경. 마차에서 저분이 드실만한 것을 조금만 내어주시겠어요?”
그 말을 들은 에이리아의 말에 기사가 재빨리 뛰어가 작은 육포 몇 개를 꺼내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드십시오.”
“어머 고마워요. 맛있어 보이는 육포네요.”
환하게 웃으며 육포를 만지작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트린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저는 조금 특이한 몸이라 육포가 아니라 다른 걸 먹어야 해요.”
“엎드려!!!!!”
콰앙!!!
동시에 무언가 깨달은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고.
그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 시뻘건 섬광이 번뜩였다.
남은 것은 처참할 정도로 코를 찌르는 혈향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