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5화
에이리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은 길어야 15분 정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복마법을 부어보지만, 당연히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왜 회복마법을 받지 못해.
어쩐지 재수가 좋더라니…….
씁쓸하게 중얼거린 나는 거의 반쯤 정신이 멍해진 채로 입을 뻐끔거렸다.
살릴 방법이 없진 않다.
신성계 최후마법인 리저렉션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그건 절대 해선 안 될 선택이기도 했다.
내 수명이 줄어든다는 건 단순히 내가 몇 초, 몇 시간, 며칠, 몇 달 일찍 죽는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내게 주어진 흐름이 바뀌고 주변 모든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소리였다.
모든 운명은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혀있으니까.
그런 주제에 운명의 흐름에서 벗어나서 멋대로 날뛰었으니.
주신 프리아 여신이 내게 얼마나 이를 부득부득 갈아댔을지는 안 봐도 뻔한 사실이다.
그녀는 여기서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다른 이는 몰라도 그녀만큼은 어딜 가서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안쓰러운 마음도 있었다.
이 대륙의 여성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외관을 어릴 때부터 잃어왔던 그녀였다.
지금껏 많은 이들을 치료해온 나였지만 그녀는 그중에서도 조금 애착이 가는 환자였다.
다른 환자와 다르게 주기적으로 내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 왔으니 말이다.
의원과 환자 사이에 생기는 나름의 정인 건지.
그도 아니면, 그녀가 보여주는 순수한 애정 자체가 고마웠기 때문인지.
뭐가 되었건 이건 옳지 않았다.
‘선택해라. 선택해라.’
한번 결정하면 번복은 없다. 제한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답은 뻔했다.
결국, 나는 아공간에 손을 밀어 넣었다.
문득 이것을 내려준 이유가 여기에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망설임 없이 쓰리다.
우웅…….
옅은 빛과 함께 광석이 서서히 분해되며 그 안에 타오르던 작은 화염이 불 조각이 되어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리고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에이리아의 몸에 스며들었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심장 부근에 손을 올리니 멎어있었던 심장이 아주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하이네스 힐]
곧바로 회복마법을 걸어 그녀의 상태를 안정시킨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고개를 돌렸다.
대부분이 즉사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 또 있었다.
소드마스터 벨로스 경.
뛰어난 소드마스터답게 육체 스펙이 좋은 탓인지 즉사하지 않고 간신히 목숨줄을 붙이고 있었다.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 상급회복마법을 건 나는 현재 전이마법을 견딜 수 있는 인물, 즉 이곳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 에이리아만을 제외하고 모조리 전이마법에 태워 하인스 영지로 날려 보냈다.
“륀느. 나다. 영지 전체 방어 결계 가동해. 비상사태 진입한다. 내가 연락이 끊어지면 적색경보 때려.”
반대편에서 무언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통신기를 아공간에 던져넣어 버렸다.
굳이 부술 필요는 없으니까.
내 목에 붉은 채찍을 건 채 그저 상황을 지켜보던 여성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울드냐?”
“글쎄요?”
“아…… 그래, 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담담하게 말하기가 무섭게 푸른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천마공]
[초 신속 발검]
[창월광검]
폐허가 되어버린 일대가 새파란 검기로 인해 수십 가닥으로 잘려나간다.
일검 하나하나에 수십 미터를 갈아엎어 버리는 공격이지만 정확하게 기사들이나 카트린느, 혹은 회복을 받는 에이리아에겐 닿지 않았다.
스르릉…….
뒤이어 표정을 굳힌 채 청단이를 한 손으로 쥐고 검 끝을 앞으로 보이게 당겼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강하게 밀 듯 받치고는 왼발에 힘을 주었다.
콰드득!!
강하게 힘이 가해진 발이 약해진 지면을 한 차례 더 부순다.
발이 눌리는 것만으로 수십 미터에 달하는 금이 가며 무너져 내리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다 개박살 난 곳이고 앞으로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을 생각이다.
이윽고 검신에 대량의 마나 입자가 모여들자 나는 망설임 없이 검술을 펼쳤다.
[초 중검]
[하늘 쪼개기]
쩌억!!
마치 검기가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아오르며 정확히 양단할 위력으로 파고들었다.
압도적인 중량을 품은 일검은 마치 땅을 반으로 가를 것처럼 흠집을 내며 파고들었고, 뒤이어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를 향한 내 공격이 또 이어졌다.
청단이의 검신이 파르르 떨리며 튕겨 나오는 것에 몸을 싣고 한 바퀴 빙그르르 몸을 돌린 내 손에 익숙한 거창이 쥐어진다.
언월도 형태를 지닌 신창 롱기누스였다.
[팔라디아식 행성 분열창]
[맨틀 깎기]
콰드득! 흉폭하게 지면을 뒤집고 맨틀을 깎아내듯 발톱 같은 무언가가 지면을 수차례나 할퀴었다.
보통 단 한 개의 공격으로도 위험천만하기 그지없지만 나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이런 거에 당할 상대였으면 애초에 이런 싸움이 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거대한 연기 속에서 시야가 차단된 나는 말없이 한 손에 창을, 또한 손에 청단이를 들고 빠르게 감각을 활성화 시켰다.
하지만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그때였다.
반사적으로 에이리아가 있는 곳에서 대량의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심연의 힘이었다.
새카만 블랙홀처럼 일그러진 공간이 열리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쓰러져 있던 에이리아를 안아 들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하지만 검은 균열에서 튀어나온 놈의 정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쩌어억……
주둥이의 크기만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괴물이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입을 쩍 벌린 것이다.
심해의 수왕. 베헤모스.
세 번째 환수였다.
환수왕 중 현왕이라 불리던 메가로드리아는 상당히 현명한 환수였기에 정신까지 침식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테지만, 베헤모스는 달랐다.
이놈은 태생부터가 본능에 의존해서 살아온 놈답게 아주 본능에 충실하게 잠식되어 나를 공격해왔다.
콰작!!!
한순간에 사지 육신 중 일부를 잃어버릴 뻔했다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에이리아에게 상당한 무리가 갈 단거리 공간이동을 사용해 피해내긴 했지만, 한번은 몰라도 두 번은 좋지 않았다.
“이 망할 년이.”
노려도 하필 에이리아를 노린다.
“당신은 미묘하네요. 다른 인간과는 달라. 제법 맛이 있어 보여.”
담담하게 말하던 그녀가 먼지를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새빨간 채찍을 만들어냈다.
“저항하지 말아요. 고통을 주면서 죽이는 취미는 내게 없어.”
쉬리리릭!!!
동시에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붉은 잔상이 일대의 폐허를 또 한 번 때렸다.
지금 당장이야 이 일대만 파괴된다지만 싸움을 지속하면 최소 이 영역 전체가 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빨리 끝내거나, 그 외에 해결책이 필요하다.
반사적으로 에이리아를 내려놓고 홍단이를 빼 든 나는 그대로 그녀를 향해 파고든 뒤 홍단이를 후려쳤다.
동시에 붉은 채찍이 홍단이의 검신을 막아내자 나는 미련 없이 그녀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명치 존나 쎄게 치기]
쩌엉!!!!
도저히 살갗을 친 것이라곤 생각하기 힘들만큼의 단단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말없이 주먹을 거둔 나는 얼얼해진 주먹을 바라보다 허공에 부유하는 청단이를 불러들였다.
“더럽게 단단하네.”
“의미 없는 저항하지 말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밀피유의 말대로라면 보름달은 그녀의 힘의 근원이다.
보름달이 크게 떠 있는 지금,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지금 시간대에 그녀의 힘은 현재 이상으로 증폭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달이 없는 곳으로 가는 수밖에.
동대륙은 현재 달이 떠 있지만 서대륙의 끝단에는 일이 거의 지고 있을 시간이다.
그대로 마나를 끌어모아 그녀에게 파고든 나는 에이리아의 몸에 추적 아티펙트를 던진 뒤 울드의 목과 어깨를 틀어잡고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무영창의 마법을 발현했다.
8서클 전이마법인
워프를 말이다.
치지지직!!!
하지만 그녀의 육신은 워프 마법이 적용되기도 전에 마법을 튕겨내 버렸다.
순식간에 마법이 끊어진 나는 곧바로 그녀의 공격을 맞고 허공을 날았다.
투쾅!!!
가벼운 주먹질이지만 그녀의 공격에 내 몸의 뼈 일부가 가볍게 부서져 나갔다.
와, 이거 생각 이상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대처법에 대해 빠르게 강구하기 시작했다.
쉽게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내게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운이 없었네요. 나는 식사를 해야 해요. 그리고 이곳에서 빨리 찾아 돌아가야 할 게 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쓰러진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에이리아는 운이 좋아 아직 큰 상처는 없다. 일대는 완전히 폐허.
달은 점점 커지는 만큼 그녀의 힘도 점차 강해진다.
침묵하고 있던 나는 이윽고 부러진 팔을 천천히 움직여 허공 속에 밀어 넣었다.
소프트웨어는 내가 압도적으로 높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녀의 전투 실력은 형편없었고, 당장 이길 방법 자체도 있다.
하지만.
하드웨어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내가 한차례 환골탈태를 더 하지 않는 이상 이기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환골탈태 스택은 현재 24개.
아직 환골탈태가 가능하다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더 모아야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결국, 환골탈태로 역전하는 방법 또한 캔슬.
결국, 남은 건 하나뿐이다.
어떻게든 보름달이 없거나, 보름달이 떠 있어도 이곳보다 훨씬 먼 곳에 떠 있는 곳으로.
그녀를 날려버리는 것.
생각할 것도 없이 내 위에 올라앉아 기대하는 눈길로 내려다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다 끝나고 부질없는 발악을 한다고 여겼는지 그녀는 천천히 내 뺨에 손을 올렸다.
“당신, 역시 신기하네요. 맛있어 보이지만 수집 욕구가 생겨요. 소개할게요. 심연의 공주 울드라고 해요. 비록 공주들 사이에서 마냥 강한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신을 지켜줄 정도는 되지요.”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내가 그녀의 팔을 잡건 말건 말을 이어나갔다.
“제 고향은 현재 과도기에 들어있어요. 그래서 강한 힘들이 필요해. 가능성이 있는 하수인. 그러니까 당신도 내게 종속이 되어주세요. 당신이라면 이전에 얻은 그 세 마리의 환수왕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급이 될 테니까.”
그녀의 말에 그녀의 팔을 잡고 있던 내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는 그녀의 멱살을 강하게 틀어잡았다.
“다 네 생각처럼 될 거 같지? 내가 널 잘 모르듯이 너도 날 잘 몰라.”
“어?”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기가 무섭게 나는 아공간에서 빼낸 열쇠를 그대로 바닥에 찍었다.
“열려라. 참깨.
우웅!!!!!
쩌어억!!!
동시에 일대 지면 전체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고.
에이리아와 나 그리고 내가 멱살을 틀어잡은 울드를 포함한 셋을 모두 차원 저편으로 던져버렸다.
“아까부터 보름달을 자꾸 쳐다보던데 거기에 꿀이라도 발랐냐? 빌어먹을 년아?”
“……”
달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밀피유가 그녀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굳이 들먹일 필요는 없지만, 그녀에게 어느 정도 긴장감을 조성해줄 필요는 있었다.
그래야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 테니까.
나는 너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뻥카를 치는 건 내 전문이다.
순식간에 달을 잃고 눈을 크게 뜬 그녀의 육신이 일순간 흔들리고 나는 역으로 그녀를 바닥에 처박듯 제압한 뒤 그대로 오른 주먹을 들었다.
부서진 팔은 계속해서 활성화하는 신성력에 의해 회복된다.
아름다운 여성? 뇌쇄적인 미를 가진 미인?
아 모르겠고!
나는 왼뺨을 맞으면 상대의 오른쪽 강냉이를 모조리 뽑아버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것이 남자건 여자건.
울드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섣불리 충돌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의 힘이 강한 건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충돌한다면. 겁을 먹고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내가 아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적을 제거한다는 신조는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오른손에 머금어진 거대한 힘을 느낀 그녀는 그동안 내가 한방을 숨겨왔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의 힘이 순식간에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금니 꽉 깨물어, 이 망할 년아.”
“자, 잠깐!”
콰아앙!!!!
균열 너머로 빨려 들어가는 도중에 이어진 싸움이다.
내 주먹은 끝끝내 그녀의 죽빵을 후려갈겼고 그 일격에 크게 몸을 경련한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흩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