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9화
파도가 없어서 괜찮았는데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웁…….”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괴로워하는 에이리아의 모습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죄, 죄송해…… 웁!”
입을 막고 억지로 구역질을 참아내는 것이 뱃멀미가 심각해 보였다.
그녀는 수인족답게 자연과 친숙하여 정령친화도가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 능력이 마구잡이로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눈물이 방울 방울진 얼굴로 그녀가 내게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듯 필사적으로 숨어들었다.
이에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검지와 중지를 붙여 그녀의 귀밑에 가져다 대었다.
“읏?!”
깜짝 놀라 움찔거린 그녀는 얼어붙어 버린 것처럼 그대로 굳은 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댔다.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뿐만 아니라 귓불이 새빨간 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녀에게 이런 신체적인 접촉은 굉장히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 됐어요.”
이윽고 천천히 손을 뗀 내가 그녀를 보며 말하자 멍한 얼굴을 해 보이던 에이리아가 허둥지둥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다 눈을 크게 떴다.
“아……”
“잠깐 감각기관 일부를 마비시켰어요. 아마 뱃멀미는 좀 덜할 겁니다.”
“고, 고마워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물러난 그녀는 문득 의문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양손으로 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후우……”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면 꼭 말해야 합니다. 아닌 척 숨기고 있으면 제때에 치료가 안 될 수도 있으니.”
담담한 질문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라며 내게서 물러났다.
“아, 아니에요. 아이, 참……. 내가 정말 왜 이러지.”
그녀의 그런 태도를 보고 나는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슬슬 기억 망각에 의한 괴리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 태도를 보이겠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아마 그녀가 가진 나를 향한 연심들이 모두 지워지리라.
‘차라리 그게 더 잘 된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보다 정밀하게 기억삭제가 진행되는 그녀를 보며 나는 큰 문제는 없겠거니 넘겼다.
하지만 페널티라는 단어가 왜 페널티인지.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사라지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게 생각해볼 필요는 있었다.
적어도 그녀의 표정을 한 번쯤은 보았다면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진 않았으리라.
* * *
“여긴…… 어디인가요?”
불안한 얼굴로 에이리아가 질문을 던져왔다.
하늘은 새빨갛게 물들었고 세상은 마치 지옥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지만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해안 도시 발카스 같네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발카스, 저도 잘 알…… 네?”
뒤따라오던 그녀가 멈칫 굳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나는 이 도시의 일부분을 기점으로 펼쳐진 거대한 장막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발카스라구요? 그……, 대륙 남쪽에 있는……”
“네. 그 발카스 맞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당황한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도시이지만 마치 거대한 운석 수십 방은 맞은 것 같은 폐허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럴 수가……. 그 평화로움이 가득하던 도시가……”
“와본 적이 있습니까?”
“네…….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구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어서요…….”
그녀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왕자님이 그러셨잖아요! 여긴 다른 세상이라고. 아……, 음 그러니까 다른 세상이라는 게 저로선 이해하기 힘들지만……”
“여긴 티오니스 대륙입니다. 다만 시간대가 조금 달라요. 다른 가능성을 품고 저희가 살던 곳에서 10년 정도 더 흐른 곳입니다.”
내 말에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사실 이 세계에서 내가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이곳의 존재는 내가 살던 곳의 존재와 다른 이들이다.
내 주변인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고, 본래 이곳에 있었어야 할 나라는 존재는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망했다.
유일하게 미련이 남는 것은 마왕이 되어있을 페르세르크였지만, 그것조차 사실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배를 밀고 해안가로 들어와 육지에 상륙하고, 발카스의 절반을 지나기도 전에 정체불명의 장막이 나와 에이리아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뭔가 모종의 방법이 있으면 저 장막을 지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치 출발선에서 부정 출발을 막는 심판처럼 장막은 나를 안쪽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포기할 순 없었다.
장막에 닿았을 때.
나는 아주 순간적으로 내 몸에 생긴 변화를 눈치챘었다.
보옥의 효과.
혼과 육신의 완전동기화.
장막에 내 손이 닿았을 때, 보옥이 활성화되었을 때와 아주 비슷한 느낌을 전해 받았었다.
다만, 그것은 느낌일 뿐이고 정말 동기화가 된 것은 아니었다.
장막은 어지간한 힘으로 부서질 만한 놈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미련 없이 그녀를 데리고 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 번쯤 보고 싶었다. 레이나가 지키려고 했던,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세계가 어떤 지경이 되어있는지를 말이다.
최후 저항군이었던 그녀가 사망하고 나 뒤이니 사실 이곳은 살아남은 인간에게 희망 같은 게 있을 리는 없다.
에이리아에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그녀는 혹여 내가 귀찮다 여길까 봐 그런 궁금증에 대해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할 일이 없었다.
시간은 사흘도 넘게 남아있고 조사해본들 아무것도 없는 폐허가 된 도시가 전부였으니까.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절대 먼저 주의를 끌지 않는 에이리아를 그냥 두면 몇 날 며칠이고 침묵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행이론이라는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같은 세계인데 한사람이 1이라는 행동과 2의 행동을 했을 때 나오는 결과에 따라 세계 자체가 나뉘는 겁니다.”
내 말에 에이리아가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게 가능한가요?”
“불가능하죠. 둘 중의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 하나는 사라지는 겁니다. 이건 사실상 공상에 불과한 세계에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런 세계가 생겨났다. 아마 세상 어딜 뒤져보아도 이 같은 케이스는 단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여긴……”
“조금 이레귤러 같은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세계의 규칙 자체가 뒤틀려서 아마 오래가지 않아서 사라질 세계니까.”
나는 내가 속한 세계를 지키면 된다.
그 외의 세계까지 지킬 이유는 없었다.
“데이비 왕자님은…… 정말 다정하시네요.”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던 에이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를 배려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신 거겠죠?”
“그냥 입이 심심해서 그럽니다.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바쁘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지면 괜스레 불안해지는 것처럼.
지금 나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이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은 회복을 필요로 하니 빠르게 마나를 순환시키고 육신을 정비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헤헤, 그래도 배려해주신 거로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죠? 기사분들이 저를 지키다가 그렇게 크게 다쳤는데…… 저는 왜 왕자님의 곁에 있다는 이유로 안심하고 있는 게…….”
“사람은 본능적으로 우선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합니다. 마냥 이타적인 존재가 희귀한 거지 황녀님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진리는 아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자기방어를 하기 나름이니까.
“저……”
말끝을 흐린 그녀가 움찔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아, 아니에요! 제가 무슨……”
“편한 대로 말해도 좋은데.”
부드럽게 말하자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회피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데이비 왕자님은 제가 귀찮지 않으신가요?”
“귀찮을 게 뭐 있습니까. 적적한 마당에 대화 상대도 있고, 나쁘진 않네요.”
“그, 그게 아니라……”
발그레해진 얼굴로 그녀가 횡설수설했다.
그러면서도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게 묘하게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조금 더 쉬어두세요. 어차피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 말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몸을 웅크린 채 얼굴을 파묻었다.
고요한 침묵이 왔고, 나는 그동안 쌓인 피로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
마치 그동안 쌓인 모든 피로가 이때다! 하고 덤벼드는 느낌이었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수마에 나는 반사적으로 알람 마법을 발현해 주변의 침입을 막아 세우고는 천천히 벽면에 등을 기대고 잠들었다.
툭…… 툭…….
꿈조차 꾸지 않고 잠들었던 나를 깨운 것은 누군가의 고통스런 신음이었다. 피로감에 의해 누가 건드려도 깨지 않을 것처럼 잠들어있던 내 귓가에 울린 고통스런 울음소리.
이 배에 있는 것은 갇혀있는 바퀴벌레 잔당과 에이리아, 그리고 내가 전부였다.
바퀴벌레가 신음을 흘리고 엉엉 울 리는 없으니 범인은 뻔했다.
“에이리아…… 황녀?”
그녀는 내게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배의 갑판 벽을 붙잡고 주저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 아아아……”
그녀의 뜻밖의 행동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아…… 흐으윽…… 아아아아!”
처절하게 울면서도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는 그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그동안 그녀의 여러 면을 보았지만, 지금만큼 그녀가 불안정해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뱃멀미가 심해졌습니까?”
그새 마법이 풀렸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던 그 순간.
고개를 숙인 채 고통스레 흐느끼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 품에 안겨 머리를 파묻었다.
“아아…… 아아아아아!”
어찌할 줄을 몰라 괴로워하는 그 모습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가.
반사적으로 몸을 살짝 튕겨 그녀의 얼굴이 보자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그녀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어, 어떻게요, 왕자님…….나 이상해…… 내 머리…… 뭔가 이상해요! 나 어떻게 해…… 어떻게 해……흐으윽!”
절대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던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왔다.
“진정하세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조심스레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써보지만, 그녀는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에 그녀를 어떻게 깨워 보려던 그 순간.
내 품에 쏙 들어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울던 그녀가 나를 밀쳤다.
콰당!!
동시에 내 몸이 바닥에 쓰러지자 그녀가 내 위에 올라타고는 한 손으로 자신의 눈시울을 훔치며 소리쳤다.
“왕자님……, 제발……. 나 이렇게 잊고 싶지 않아…….”
“망할…….”
역시 이 빌어먹을 페널티는 에이리아 본인에게 그 사실을 알게 했다.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기억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잊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제발! 나…… 왕자님의 얼굴이 기억이 나질 않았어! 왕자님의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았어!”
처절하게 울부짖는 그 모습에 나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좋아하고……, 정말 사랑하고 있단 말이에요……. 정말 연모하는데……”
절규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왕자님을 잊고 싶지 않은데…… 지금 이 마음 평생 가지고 있고 싶은데……”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다른 무언가가 아닌 에이리아 본인의 의지로 이렇게 강렬한 의사를 내비친 것은 말이다.
절대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이유로 필사적으로 좋은 일 싫은 일 모두 꽁꽁 싸매던 그녀가.
그 임계점이 폭발하면서 진실을 호소해오는 모습은 실로 고통스러워 보였다.
“머릿속에서 왕자님에 대한 기억이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어……. 제발 도와줘요. 나, 이대로 왕자님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잃고 싶지 않아……. 나 이상해진 거 같아요. 제발…….”
“황녀님. 그걸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내 말에 그녀가 움찔거렸다.
“부활을 무효화 하는 것.”
두 번째 달의 기적이라고 하였나. 첫 번째 달의 기적은 그녀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대신 그녀의 목숨을 살리는 기적을 선보였다.
반대로 두 번째 달의 기적은 목숨을 다시 빼앗는 대신 그녀에게 가해진 기억삭제의 페널티를 다시 본래대로 되돌린다.
그것은 선택의 차이였다.
“잊고 싶지 않아…….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건 싫어……. 그 어떤 것보다도 왕자님과의 추억, 기억을 모두 잃고 싶지 않아!”
처절하게 외친 그녀가 머리를 파묻었다.
“그렇게 살 거면……, 차라리 기억을 가진 채 죽는 게 나아…….”
동시에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성을 홀리는 데에 탁월한 종족인 나인테일 종족답게 그녀의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우면서, 슬퍼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 그녀는 내 배를 깔고 앉은 채로 빠르게 자신의 허리를 숙였고 요염할 정도로 익숙하게 자신의 입술을 내 입에 포개었다.
본능이 각성한 것도 아니고, 그녀 본인의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 차이는 정말 거대하다 여길 만큼 놀라웠다.
동시에 그녀의 치마 아래에서 청록빛을 띤 9개의 꼬리가 쑤욱 자라나듯 돋아나기 시작했다.
어둡고 붉은 달이 더욱 반짝이는 달밤의 빛을 받아 그녀의 꼬리에 붉게 빛나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차라리…….”
동시에 말투가 변한 그녀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죽여줘요……. 당신에 대한 기억을 더는 잃어버리지 않게…….”
“웃기는 소리 집어치웁시다.”
내 말에 그녀가 내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쥐어짜듯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 몸에 당신의 흔적을 남겨주세요. 나를 안아줘요……. 이렇게 당신을 잊기 전에…… 이 몸뚱어리라도 당신을 기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