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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400화 (399/1,559)

제 400화

기억을 잃어가니까.

자신이라는 존재가 나를 마음에 담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게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차라리 죽여달라.

그것도 안 된다면.

차라리 몸이라도 기억할 수 있게 흔적을 남겨달라.

그녀의 절규는 차마 지켜보지 못할 만큼 절박하고 처절했다.

병으로 고통스러워 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희망을 한번 보았던 이가 그 희망의 불씨가 다시 꺼질 때 느끼는 절망감이 얼마나 클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던 로브의 앞섬을 풀어헤치려 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채며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엉엉 울며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그녀를 제지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정신 바짝 차려.”

내 반말에 그녀가 크게 움찔거렸다.

“싫어…… 싫어! 이건 싫어! 이제야 겨우 만났는데! 이제 겨우 용기를 내서 만났는데! 어떻게 하인스까지 찾아갔는데!”

하지만 패닉에 빠진 그녀의 발작은 다시 재발했다.

“내가 기억합니다. 황녀가 기억을 모두 잃어도 내가 황녀를 기억……”

“싫어요!!”

격하게 외치며 그녀가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드물게 화를 냈다.

“내가 더 좋아해! 내가 당신을 더 좋아한다고! 그런데 왜 당신만 나를 기억하는 건데요! 기억해도 내가 당신을 기억할 거야! 내가 더 좋아하는데, 내가……, 내가 더 당신을 연모하는데…….”

절박함이라는 감정이 절절히 묻어나와 그녀를 살린다는 선택을 내린 것이 몹쓸 짓이었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나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다른 건 다 가져가도 좋아, 하지만 이 기억만큼은 제발……”

눈물로 호소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칭호에 담긴 힘은 에이리아가 일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가져가는 대신 그녀의 영혼을 다시 한 번 육신에 안착시키는 불가능에 가까운 효능을 냈다.

여기서 섣부른 짓을 했다간 자칫 두 번째 달의 기적이 발현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이렇다 할 상황해결은 없었다.

“잘 들으세요. 황녀님.”

“……”

“기억은 완전한 게 아닙니다.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고 기억이란 건 굉장히 불분명하기 짝이 없어요. 그렇기에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게 완전히 지워지는 건 아닐 겁니다.”

갓난아기들이 왜 커서 어릴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건 여러 가설이 있지만 나는 한가지 가설을 믿는 편이다.

언어로써 그 기억을 저장할 수 없기에 기억을 못 하는 것이라고.

언어로써 상황을 묘사하고 기억해내지 못하면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이론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기억이 사라져버렸는가 하면 그건 아닐 거라 믿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니 꺼내올 수 없지 그 기억 자체는 분명 눈으로든 냄새로든 촉감이든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기억할 수 있어요?”

“반드시 기억나게 해줄게요.”

거짓말이라도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그런 내 의도가 빛을 발한 것일까.

에이리아는 그제야 마치 십년감수 했다는 듯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능성 자체가 아예 없는 거짓부렁은 아니었다.

실제로 페널티엔 기억이 지워진다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변수가 없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인스 영지.

그녀는 나인테일 종족으로 순간 각성하며 내게 절규하듯 외쳤었다.

하인스 영지에 찾아간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하인스 영지를 잊어버린 그녀가 그곳을 기억한다? 그렇다는 말은 완전한 삭제가 아니라는 뜻이거나, 혹은 삭제 과정 자체가 굉장히 불안정하다는 뜻으로밖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남들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정말 슬프기 짝이 없다.

반대로, 그녀가 정말로 소중하게 여긴 기억을 스스로 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본인이 자각한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의 경우로 고통스러운 일이 되리라.

“기억을 당장 해결할 순 없지만, 방법은 찾아보죠. 그전에 간단한 소원 정도는 이루어드릴게요.”

내 질문에 그녀는 한참 동안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제 가슴을 압박하며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말했다.

“하루만……”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루만 제게 마음을 허락해주세요.”

나를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바램이었다.

이에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네…….”

대답은 짧았다.

* * *

에이리아는 순수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는 아니었다.

알 건 다 알지만 부끄러운 건 별개의 문제이니까.

나흘의 시간 중 하루.

나는 그동안 에이리아의 바람대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어주었다.

어째서 내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신경 쓰고 챙기고 있느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저 눈부실 정도로 순수하고 애처로운 그녀에게 동정심이 들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남들이 보면 정말 못 할 짓이지만.

그런 반쯤 거짓으로 가득 찬 상황이라도 에이리아는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바란 것은 온전한 내 관심이 아니었다.

그저 내 곁에 있는 것.

나와 대화를 나누고 눈을 마주치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왕자님! 물렸어요! 뭐, 뭔가가!”

“실력 좋네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줄을 감으면 됩니다.”

내 말에 에이리아는 나무로 만들어진 낚싯대를 잡고 파르르 떨며 힘을 주었다.

태생이 수인이면서도 몸이 약한 편에 속하는 그녀가 바닷속에서 당기는 힘에 놀라 이리저리 휩쓸리자 나는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듯 안고 낚싯대를 잡아 줄을 빠르게 감아올렸다.

“힘 빼시고.”

“네, 네!”

“지금!”

철썩!!

그 말과 함께 새빨갛게 물든 바다에서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낚싯바늘에 꿰여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다만 그 생김새가 보통이 아니었다.

1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곰치의 등장에 에이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것도 네발 달리고 머리만 유독 거대한 기괴한 곰치였다.

그 크기는 쭉 늘어뜨려놓고 보면 인간의 키와 흡사했다.

이놈의 세상은 바닷속에 방사능을 퍼뜨렸나.

애초에 낚싯대로 잡혀 올라 올만 한 녀석이 아니지만, 현실은 벌어졌다.

“꺄악!”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지는 그녀를 안아 든 채 나는 하늘에서 에이리아를 한입에 삼킬 것처럼 떨어지는 기괴한 곰치를 향해 한 손을 가볍게 말아쥐었다가 휘둘렀다.

[7서클]

[대 방전]

초고압의 전류가 순간적으로 번쩍인다.

에이리아를 향해 맹렬하게 덤벼들던 기괴 곰치는 순식간에 7서클의 뇌전 마법에 노출되어 노릇하게 구워져 버렸고, 그대로 갑판 위로 힘없이 추락해버렸다.

“하아…… 하아……”

“기가 막히는 크기네.”

“나, 낚시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요? 용병분들처럼 목숨을 걸고…….”

낚시꾼들의 삶을 본 적이 없던 에이리아에게 이런 낚시의 경험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괜스레 장난기가 돋아 씨익 웃어 보였다.

“당연하죠. 바닷속엔 위험한 생물이 가득합니다. 다리 수십 개가 달린 녀석이 꾸무럭거리며 전신에 들러붙는다고 생각해봐요.”

내 말은 사실 깊게 생각해보면 ‘이 새끼 약 파는구나!’ 할 만큼 빈틈이 많았다.

하지만 순진해 빠진 에이리아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기행을 보여주었다.

“세, 세상에…… 식용 생선을 구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 일줄 꿈에도 몰랐어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지식에 한해선 나와 별 차이가 없는 페르세르크나 세상을 돌아다닌 경험이 제법 되는 일리나에게선 볼 수 없는 신선한 반응이었다.

이 정도로 신선한 반응이라면 속이는 맛이 아주 좋다.

“꺄악! 왕자님! 고, 곰치가 새카맣게 타 버렸어요!”

처음 생선을 구워본 에이리아는 대뜸 불의 세기 조절을 잘못하여 애써 잡은 곰치를 시원하게 태워 먹었다.

“아…… 그거 제건데…….”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가 잔뜩 고팠던 에이리아는 야외에서 먹는 식사에도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상황이 두어 번 지속되니 이제는 그녀의 몫을 날름 빼앗아 먹어버리는 나를 향해 입을 삐쭉일 줄도 알게 되었다.

“쿡쿡…… 그게 무슨……쿡쿡…… ”

결국, 이것도 한때의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우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간단한 장난을 치자 결국 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였다.

처음 에이리아는 황녀로서 지켜야 하는 체면 때문에라도 감정의 일부를 계속해서 숨기려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가 지나고, 이곳에는 그녀에게 체통을 요구하는 그 어떤 제약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그녀를 감싸고 있던 아주 얇은 한 꺼풀을 드디어 벗어던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 그녀의 생에 다시는 보기 힘들 모습이리라.

하루라는 시간은 훌쩍 더 지나가 버렸다.

캄캄한 밤하늘에 고요하게 뜬 두 개의 달과 음산할 정도로 조용한 바다.

기온 조절 마법을 펼쳐 주변의 온도를 딱 좋게 맞춰놓은 탓에 에이리아는 제법 즐거워 보였다.

모포를 두른 채 쪼그려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에이리아가 말했다.

“정말 꿈만 같아요.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곳은 나와 그녀를 제외하곤 어떤 지성체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다.

아니 장막 너머에야 있겠지만 적어도 장막의 밖인 이곳은 그러했다.

에이리아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고요함 속에서도 단순히 나라는 인물과 단둘이 함께한다는 것이 행복한 듯 보였다.

“왕자님, 저 별 보이세요? 카트린느가 말해준 건데요. 저 별은 10년에 꼬리를 만들면서 하늘을 배회하는데 그때 소원을 빌면 그것을 이루어준대요.”

“소원을 빌 겁니까?”

“네.”

내 말에 그녀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소원을 빌 겁니까?”

“그, 그게……”

내 말에 그녀가 빨갛게 얼굴을 물들이더니 이내 얼굴을 자신의 양 무릎에 파묻어버렸다.

그리고는 몸을 좀 더 둥글게 말며 파르르 떨었다.

“마, 말 못해요.”

“뭡니까. 나랑 관련이 있어요?”

“……”

있으시다고?

“어떤 겁니까?”

“……”

말하기 부끄러운 소원이다라.

“지금 아니면 언제 기회를 볼겁니까. 말해봐요.”

내 말에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던 에이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는 거요.”

“네?”

“무, 무릎…… 왕자님께 제 무릎을 빌려드리고 싶어요.”

그 말에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거 소원입니까?”

“네? 아……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 손을 천천히 하늘로 뻗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주자 마치 환상처럼 별이 꼬리를 만들고 하늘을 원 형태로 돌기 시작했다.

진짜 천체를 돌리긴 힘들지만.

까짓거 보는 입장에서 얼마든지 속아 넘어갈 수 있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다.

놀란 얼굴을 하는 에이리아를 향해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별이 꼬리를 그린 이상 소원이 이뤄져야겠네요.”

그녀가 놀라거나 말거나.

나는 뻔뻔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때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문득 나는 나와 에이리아를 지켜보는 것 같은 묘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 생명의 눈이라기보다는 다른 초월적인 무언가라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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