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2화
척 봐도 척후대로 보이는 평범한 와이번과 마족들이다.
이놈들은 내가 넘어온 이 장막의 존재조차 모르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그냥 누군가가 막아놓은 게 아니라, 내가 넘어온 그 반투명한 장막은 말 그대로 이차원의 입장권과 같았다.
어째서 해안 도시 발카스의 중반부터 바다 전체가 이 세계에서 박탈되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중요한 건 나를 포위한 수십 명의 마족이 아니었다.
쿵!! 쿵!
“커헉!!”
본능적으로 감지능력이 뛰어난 블랙와이번이 가장 먼저 노출되었다.
폭기가 되어 퍼져나간 마나에 노출된 블랙와이번들은 그대로 거품을 물고 하늘에서 추락해 기절했고 그 추락 여파로 마족들의 절반 수 이상이 지상에 추락해 비명을 지르고 고통을 호소했다.
“끄아아악!!”
“끄으윽……. 사, 살려줘!”
처참한 꼴을 보아하니 에이리아가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는 하늘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나를 바라보는 듯한 그 섬뜩한 시선을 조용히 파악했다.
어지간해선 금방 찾아낼 법도 한데.
회랑에서의 힘을 모조리 되찾아버린 지금조차 그 위치를 특정하기 힘들다는 건 딱 하나밖에 없다.
지금 나를 보는 존재가.
최소 회랑의 상위 전투능력을 지닌 영웅급 중에서도 한둘.
혹은 그 이상급의 무언가라는 것이다.
나를 이 고생을 하게 한 심연의 공주 울드조차 이런 무식한 방식은 불가능했다.
아니 잠깐만, 이 세계에서도 그게 가능한 존재가 딱 하나 있긴 하다.
“음……”
그렇게 생각하던 중 나는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에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추락해 고통스러워 하는 마족 하나에 천천히 다가갔다.
그제야 마족 중 일부도 내게서 퍼져나오는 폭기에 놀라 눈을 부릅뜨는 이들이 있었다.
“끄윽…… 끅……”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나를 두려운 얼굴로 올려다보는 마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시선에 나는 아무리 뜯어봐도 인간이다.
그것도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인간.
하지만 그런 인간이 자신들의 상식을 벗어나는 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뿜고 있으니 쉬이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대체……”
그는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고통을 호소하며 내게 힘겹게 말했다.
이에 나는 폭기를 서서히 거둬들이고는 완전히 잠재웠다.
주변을 장악하던 마나들이 일제히 침묵하자 마족은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지 크게 숨을 들이켜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이봐. 이름이 뭐야.”
내 물음에 그가 두려움 반 경계심 반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인간이 감히……”
“뒤지게 맞고 협조할래? 그냥 협조할래.”
빙그레 웃는 내 모습에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고, 고르온입니다!”
반사적으로 존대가 튀어나올 정도로 내게 두려움을 품은 마족이었다.
“좋아, 고르온. 한 가지만 물어보자고.”
이윽고 내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연도는?”
내 물음에 그가 떨떠름하게 나를 바라본다.
“대답 안 해?”
“마계력 312년…….”
“니들 기준 말고, 인간 기준으로.”
내 말에 그가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정보를 종합한 나는 그제야 몇 가지 사실을 추릴 수 있었다.
지금 이곳의 시기는 레이나가 사망한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으로 소용을 다 했을 이 세계가 소멸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적어도 시간이 흐른 것을 보면 말이다.
고르온의 멱살을 잡은 채 쪼그려 앉아있던 나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현재 너희들을 지휘하는 마족은?”
“대, 대공 아스타로트님과 초대 리치 닉스님……, 그리고……”
이외에 4명의 대공까지.
종류는 다양했지만 레이나의 말대로 이곳에선 닉스가 생존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생존함으로써 페르세르크는 손도 쓰지 못하고 그들의 의도대로 부활해버렸다.
다만 심연의 힘을 빌리지 않은 만큼 내가 있던 곳에서의 계략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활을 꾀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좋아. 그럼 마지막 질문.”
이윽고 내가 조용히 물었다.
“이 세계의 세계수는 어떻게 되었나.”
내 질문에 그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이에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가볍게 후려쳤다.
빠각!!
“커헉!”
동시에 그의 치아가 서너 개 튕겨 나간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줘!”
“대답만 하면 살려준다니까? 난 마족에게 큰 유감이 없어.”
물론 놈들이 내 영역을 건드렸으니 아작을 내버리긴 했지만, 종족이 마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배척하지 않는다.
적어도 뱀파이어도 본래는 같은 이유였지만 말이다.
내가 종족만 두고 이 새끼들은 아니라고 단정 짓는 건 딱 두 가지밖에 없다.
앞뒤 없이 난장판을 치고 있는 심연 놈들과.
하인스 영지에 처음 부임했을 때 한바탕 쓸어버렸던 소악마라 불리는 고블릿 놈들이 전부였다.
“모, 모릅니다! 저, 정말이에요! 저는 말단 척후병일 뿐이라…….”
그의 말에 나는 미련 없이 그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털어버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신목의 성지는 내가 살던 티오니스 대륙처럼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수가 존재한다.
즉, 내 손에 소멸한 전대 이그드라실과 신목의 성자가 아직 집권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그드라실은 인간과 협력하는 대신 모종의 수단을 이용해 자신들, 즉 신목의 성지만을 보호할 방법을 찾아냈다.
만약 뒤틀린 이그드라실이 맞다면,이런 시선의 주인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좌표가 다른 이곳에서 어떻게 신목을 찾아 들어가냐는 것인데.
당장 떠나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이곳에 남겨둔 에이리아가 마음에 걸렸다.
차원 자체가 격리된 만큼 에이리아에게 손을 대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확인해봐야겠네.”
뭐가 되었건 그 미친 세계수가 관음질을 했고 그 시선이 차원 균열의 밖인 내가 있던 곳까지 이어진 게 맞다면 그 망할 눈을 한번 비틀어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불닭아.”
이에 나는 익숙하게 신수 주작인 불닭이를 소환했다.
……
하지만 역시 소환될 리가 만무했다.
이에 나는 다음 타자인 정령왕 노아스를 소환해보았다.
[내 부름에 답하라, 노아스.]
……
하지만 정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격리된 차원에 본래 존재해선 안 되는 괴리 차원답게 타차원에서 추가로 무언가를 불러들이는 건 불가능한 듯 보였다.
결국, 탈것이 하나도 없다.
블랙와이번들은 죄다 거품을 물고 기절했기에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은 놈들이 대부분이다.
제대로 날 수 있는 놈은 없다.
그렇다면.
탈것을 소환하는 수밖에.
나는 미련 없이 카드첩에 남아있던 두 번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장난 가득한 광대 놈들이 아닌.
거대한 용왕의 모습이 그려진 카드였다.
“나와라! 메가로드리아.”
이윽고 내 발언과 동시에 카드가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거대한 크기의 검은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했다.
콰지지직!!
그리고 빛으로 변한 카드가 거대화하며 그 안에서 흰빛의 존재를 꺼내놓고 사라졌다.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창공의 폭풍 용왕 메가로드리아의 출현에 아직 살아있던 몇몇 마족들이 숨을 크게 삼키며 침묵했다.
그르르르르…….
강대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힘의 반절 이상을 제약당해도 역시 그랜드마스터급 환수는 어디 가는 타이틀이 아니었다.
이윽고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천천히 나를 바라보는 놈을 향해 나는 말없이 손을 벋었다.
[5급 성마법]
[정화]
화아아악!!
순수한 흰빛이 놈에게 쏘아지자 놈은 가소롭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내게 적의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전에 싸울 땐 어느 정도는 이성이 남아있는 듯싶었는데 그 이후로 나와의 싸움에서 충격이 많이 전해졌는지 이성이 대부분 날아가 있는 놈이었다.
“안 먹히네. 그럼.”
[7위계]
[정화]
또 한차례 정화마법이 발현된다.
하지만 놈에겐 차도가 없었다.
2급이나 올렸음에도 먹히지 않는다.
애초에 이 정도 수준으로 먹힐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보통 7위계라고 해서 같은 위계의 신성력으로 때려 박은 게 아니라 평소 양의 10배에 가까운 양을 때려 박았기에 가능할 줄은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결국, 나는 어찌할까 고민하다 짧게 혀를 찼다.
그래 까짓거, 대 출혈 서비스 한번 가자.
짜악!!
빠르게 양손을 모아 신성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주신 프리아 여신께 고하오니.]
[여기서 난리 처도 상관없잖아요. 안 그래요? 원하는 게 있으니까 날 이곳으로 내던진 거 같은데. 그러니, 은총 빌려 갑니다.]
[9위계 최후 성마법]
[신의 성역]
세인트 생츄어리.
광역 성역화 마법이다.
순식간에 새하얀 깃털 수십 수백 개가 허공에 날아오르고 거대한 빛이 일대를 모조리 집어삼킨다.
따스한 빛은 나를 감쌌고 이내 곧 가장 심각하게 뒤틀려있던 메가로드리아의 육신에 씌워졌다.
울드가 걸어놓은 제약이 어떤 시스템인지는 어느 정도 파악해둔 바 있다.
그녀의 힘은 잠식이다.
닿은 존재에게 자신의 힘을 심어 끊임없이 잠식하고 끝내 잡아먹어 버리는 힘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일단 그 잠식하는 놈만 처리하면 된다는 거 아닌가?
폭풍 용왕 메가로드리아는 지금이 아니면 정화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양손을 모은 채로 다시 한 번 경건하게 기도문을 읊었다.
[추가 은총, 급히 요망]
[9위계 성마방진]
[데아 생츄어리]
성마방진을 설치하고 그 뒤를 이어 8위계이지만 추가 신성 마법을 발현했다.
바로 효율 증폭마법을 말이다.
순식간에 신의 성역과 성마방진, 그리고 증폭마법을 3중첩해서 깔아버린 나는 아직도 잠식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버티고 있는 놈을 바라보았다.
-그아아아아아아!!!
이윽고 신성력이 가져다주는 고통에 견디지 못한 놈이 거대한 앞발을 내게 휘둘러온다.
분명히 알면서도 당할 만큼 빠르고 위협적인 공격인데.
콰지직!
약해진 놈의 공격이 지금 내게 먹히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문제였다.
순식간에 놈의 발톱 하나를 붙잡아 으깨버린 내가 섬뜩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 여기선 내가 굉장히 유리한데……”
내 말에 놈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생각해보니까 너 지난번에 꼬리로 날 말아서 몇 번이고 패대기쳤지?”
그 외에 브레스로 몇 번이고 지졌고 멀쩡한 사람 팔 수십 번 부러뜨렸고.
아니 x, 생각하니 열 받네! 이놈 이거.
다 집어치우고 여기서 10분만 맞고 정화해주마.
섬뜩하게 웃는 내 미소에 놈이 한차례 움찔하며 내게서 물러났다.
하지만 세 가지의 성마법이 압도적인 신성력 양에 의해 유지되면서 놈의 움직임을 더디게 만든다.
놈은 이성이 반쯤 날아갔지만 날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혼란스러워 보였다.
분명 그때엔 이런 급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아주 조금이나마 하고는 있을 것이다.
바로 봤다. 설마 나도 여기 와서 혼과 육신이 동기화 상태가 될 줄은 몰랐거든.
내 육신은 현재 인간의 피륙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혼의 힘으로 파생된 에너지체와 같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당장 환골탈태를 한 번도 제대로 겪지 않았다고 해도 단번에 필요한 만큼의 출력을 끌어다 쓸 만큼 진화하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가 놈에게 다가가자 그제야 놈은 불안함을 눈치채고 우물쭈물하며 필사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도도한 병신미를 지닌 고양이들이 후진하면서 도망치는 모양새라 퍽 귀엽게 보였지만 나는 그저 다른 이유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이런 기회, 다시 없다.
반사적으로 틈을 발견한 놈이 온몸을 일으켜 젖먹던 힘까지 다해 내게서 도망치려 하지만.
놈은 벌써 한 가지 사실을 잊은 듯 보였다.
메가로드리아.
이미 한번 내 영혼으로 만든 카드에 갇힌 바 있는 놈이라는 것이다.
순식간에 바닥에서 빛의 사슬이 뻗어져 나와 놈의 육신을 묶었고 나는 그런 놈과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웃고는 한마디를 던졌다.
늦었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