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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404화 (403/1,559)

제 404화

127. 뒤틀려버린 거목 (2)

“빨리빨리 걸어!!”

퍼억!

거친 외침과 함께 넝마를 입은 한 소년이 바닥을 뒹굴었다.

“으윽…….”

고통스런 신음을 낸 소년은 아직 젊고 호기로운 나잇대였다.

하지만 자신을 닦달하는 이에게 반항할 만큼 용기백배할 순 없었다.

완전히 죽어버린 표정은 소년이 그동안 얼마나 모진 일을 당해왔는지를 절절히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이 패배한 세상.

언제까지고 대륙의 주인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이런 사태를 예측한 적도 없다.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노예처럼 취급당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연명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끔찍한 삶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마찬가지로 죽은듯한 표정으로 소년을 따라오는 소년보다 더 작은 소년을 보며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큰 소년의 이름은 록시.

록시 코로넬이었다.

이제 와서 성이야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주변에선 그를 록시라고 불렀지만, 한때에 그는 분명 한 왕국의 최고 위치에 있던 공작가의 장남으로 장래 유망한 소년이기도 했다.

태어나고 인생 대부분을 혼란스러운 전란에 휩쓸려 보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이봐! 죽고 싶어?”

쫘악!!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으윽!!”

“혀, 형……”

록시의 고통스런 신음에 다른 이들은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의 동생만큼은 공허한 눈동자로 록시를 바라보았다.

제발 보지 마.

이렇게 노예가 되기 전 전란을 겪고, 최후의 저항군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 마을을 일궈냈을 때.

그는 검을 수련하며 매번 동생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반드시 전쟁을 끝내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동생에게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힘이 없었던 그는 인류 최후의 저항군들이 전멸한 상황에서까지 저항할 수단이 없었고 무력하게 잡혀 노예가 되었다.

그들을 잡은 이들은 뒤틀린 세계수를 따르는 블러드 엘프라는 증오스러운 존재들이었다.

동화 속에서나 볼법한 요정과는 다른 악귀 그 자체나 다름없는 그들의 행실은 악랄했고, 잔혹했다.

이곳으로 끌려온 지 벌써 6개월.

이곳에 잡혀 와 죽어간 인간의 수가 하늘의 별만큼 많다던 같은 노예 출신 노인의 말이 떠오르는 록시였다.

철썩!! 철썩!!

벌써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 한번 하지 못한 탓에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록시를 블러드 엘프는 사정없이 채찍질했다.

지독한 고통에도 비명조차 지를 힘도 남지 않은 록시의 마음은 서서히 꺾여 만 갔다.

현실이 지옥이라면,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옳지 않을까.

동생을 지켜줘야 하는데, 도저히 희망이 보이질 않으니.

멍한 얼굴을 한 채 바닥에 엎드려 채찍을 맞던 록시는 조금만 더 이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모든 것을 놓고 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형……”

하지만 그의 동생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천천히 걸어와 채찍을 대신 맞으며 록시의 몸을 감싸는 동생의 행동에 록시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무리 죽고 싶어도, 동생을 방패 삼고 싶진 않았던 그였다.

“그으…… 그으으아아아!”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괴력으로 벌떡 일어나 동생을 감싸고는 악을 쓰자 붉은 머리의 블러드 엘프들이 인상을 대뜸 찌푸렸다.

“감히 반항해?! 더러운 노예 주제에!”

격한 외침과 함께 쉴 새 없이 채찍질이 날아들었다.

그 참혹한 공격 속에서 록시는 필사적으로 동생을 감쌌다.

얼굴, 등, 다리,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계속되는 무자비한 구타 속에서도 그는 거의 미친 것처럼 동생을 끌어안고 모든 채찍질을 감수했다.

“이 자식이!”

급기야 분노한 블러드 엘프 하나가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고 높이 치켜들었다.

인간이 패배한 이곳에서 인간 노예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흔한 일이다.

번뜩이는 새하얀 금속 빛을 보며 록시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쿠웅!!!!

뒤이어 들려온 거대한 폭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거대한 충격파가 한 차례 울려 퍼지고 그 뒤를 이어 어마어마한 지진이 일대를 전부 강타하자 사방에선 혼란에 빠진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록시를 죽이려던 블러드 엘프는 갑작스런 사태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물론, 그렇게 묻는다고 답할 존재가 있기야 할까.

모두가 의문에 휩싸여있던 그 순간.

“치, 침입……”

멀리서 블러드 엘프 하나가 황급히 소리치며 들어오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모두가 멍한 얼굴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안 그래도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블러드 엘프다.

그런 블러드 엘프가 피투성이가 되어있으니 진짜 새빨갛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런 싸구려틱한 감상은 곧이어 그의 뒤에서 나타난 한 인영 때문에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평화를 사랑하는 숲의 종족? 가관이네! 아주.”

담담한 중얼거림과 함께 굳어버린 블러드 엘프의 머리통을 낚아채 무릎을 꿇린 소년이 담담하게 말했다.

“차라리 대놓고 더러운 이중성을 지닌 인간이 훨씬 솔직하겠다. 안 그래?”

느긋한 목소리에 머리가 잡힌 블러드 엘프는 마치 괴물이라도 본 양 바들바들 떨었다.

투웅!!

하지만 곧 무형의 무언가가 그 인영의 몸에서 터져 나오자 블러드 엘프는 공포를 이기지 못했는지 그대로 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노예로 잡혀 온 구속된 인간들이 전부였다.

그 외에 블러드 엘프들은 하나같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방법을 쓴 것인가.

멍하니 있던 록시는 곧 하늘에 펼쳐진 거대한 빛으로 만든 마법진을 보고 입을 천천히 벌렸다.

인간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인간을 배신한 인류의 배신자들과 종족들의 가세로 인해 인간 말살정책이 펼쳐지면서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잃었다.

무기, 무력. 마법 모든 점에서 말이다.

소년은 인간으로 보였다.

하지만 몇 년 전 최후의 저항군이 전멸한 뒤로 인간이 마법을 쓰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뿐일까.

저만한 대규모의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이들 또한 본적이 없다.

최후의 저항군을 도와 공성전을 펼치던 그때에도 마법사들이 수십 명이 모여 저것보다 한참 작은 마법진 하나를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는 걸 직접 본 적이 있는 록시였다.

멍하니 있던 록시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소년은 과연 정말 인간일까,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쓴 무언가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처참한 꼴을 당한 인간을 가엽게 여긴 신의 현신일까.

무엇이 되었건, 록시는 소년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본능적으로 제 동생을 부서질 듯 끌어안았다.

소년의 눈에 담긴 감정은 익숙한 감정이었다.

섬뜩한 광기.

그 광기를 눈치챈 록시는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저 소년이 단순히 구세주는 아닐 거라는 두려움이 일었다.

* * *

광기가 시시각각 나를 잠식한다.

오랜만의 동기화 때문인지 잘 컨트롤해왔던 광기가 다시 머리를 들이미는 것 자체는 제법 신선한 축에 속했다.

이전에 보옥을 사용했을 때도 이런 적이 있었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었던 반응이기에 나는 익숙하게 광기를 짓누르며 힘을 갈무리했다.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그 광기의 수준이 어디까지 침식할지 몰라 처음엔 힘 조절을 조금 하긴 했지만 이렇게 어정쩡한 잠식이라면 차라리 [울드]가 내뿜던 잠식의 힘이 더 위험천만해 보인다는 게 퍽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완전히 걷어내진 못해도 대부분의 광기를 걷어낸 탓에 현재 내게 생긴 변화는 입가에서 사라지질 않는 이 음산한 웃음이 전부였다.

물론, 상당히 충동적으로 변한 것도 있지만 말이다.

신목의 성지를 지키던 블러드 엘프들은 한번 변한 이상 되돌아오지 못한다.

파괴의 본능에 노출된 그들은 말 그대로 마귀나 다름없었고, 나는 미련 없이 그들을 베어 넘겨버리고는 숲의 내부로 진입했다.

신목의 성지는 거대하다.

그렇기에 아직 남은 블러드 엘프야 많겠지만, 어차피 그들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었다.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안 나오고 버티고 있다?

나는 이 정도로 난리를 치면 당장에라도 모습을 드러내 줄 거로 생각했던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침묵하자 조금 귀찮다는 표정이 절로 나오고 말았다.

애초에 내가 이곳을 방문한 건 이곳에 잡힌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굳이 위험부담을 안아가면서까지 이세계의 세계수를 말살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나를 쳐다보는 이 기분 나쁜 시선에 대한 단서도 찾을 겸, 혹시라도 에이리아의 기억삭제에 제동을 걸만한 요소가 없는지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이세계에서 내가 무엇을 해보려고 하기엔 시간이 너무 작았다.

고작 사흘 남짓.

그 시간 안에 대체 뭘 해봐야 얼마나 하겠는가.

완전히 책임도 못 질 오지랖은 안 부리는 것이 좋다.

‘정작 내가 그걸 어기고 있다만.’

가장 가까운 곳에 그런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는 수인 소녀가 하나 있지만.

나는 나를 향해 두려움을 표하는 이 작은 소년에게 무언가를 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신성력을 방울처럼 모아 그의 얼굴에 무신경하게 끼얹어버렸다.

옜다, 회복마법이나 먹어라.

새하얀 물방울 같은 것이 얼굴에 끼얹어지자 소년이 깜짝 놀란 듯 당황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곧 깨끗한 빛을 내뿜으며 소년의 몸에 스며드는 그 신성력의 방울은 곧 빠른 효과를 냈다.

지독할 정도로 일으켜진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어린 소년이니 회복속도 자체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윽고 그가 안고 있던 작은 소년에게도 똑같이 신성력 방울을 끼얹어버린 나는 미련 없이 그들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자, 잠깐만요!”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나는 인간 노예들 사이를 지나가다 멈췄다.

내 경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마치 모세의 기적마냥 갈라진 인간들의 시선이 모두 나와 소년에게 향했다.

“……”

말없이 소년을 바라보자 소년은 좀 전의 죽은 동태 같은 눈동자를 지운 채 물어왔다.

“당신은, 인간입니까?”

“보면 모르냐?”

내 심드렁한 대답에 소년은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저희를……”

“난 이 이상 아무것도 안 할 거다.”

“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구해줄 이유는 없지 않나?”

내 싸늘한 대답에 소년의 표정이 검게 죽었다.

이놈의 광기와 충동이 평소보다 말을 거칠게 내뱉게 한다.

“……”

침묵하는 소년과 절망에 빠진 인간 노예들이었다.

갑자기 이곳을 습격한 강한 힘을 지닌 인간.

그런 인간이 나타나서 자신들은 잠시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구하는 건 둘째 치고 그들을 애프터 케어해 줄 여력이 되지 않는다.

“그, 그렇군요.”

“그렇다고 너를 포함한 이들을 잡아둘 이유도 없지?”

내 말에 소년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 탄성을 흘렸다.

“영리한 인간이란, 기회가 있을 때 잡는 놈들을 두고 말하는 거다. 그리고 이런 웃기게 돌아가는 세상에선 영리한 놈이 오래 사는 거고.”

사방에 노예들을 감시해야 할 블러드 엘프들은 모조리 기절했고, 몇몇은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마법을 캐스팅하다가 마나가 역류하여 그대로 절명해버렸다.

애초에 손 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하, 하지만 저희의 몸엔 구속구가……”

그 와중에 눈치 없이 한 여성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구속구는 무슨 얼어 죽을, 알아서들 해.”

싸늘하게 말한 뒤 입맛을 쩝쩝 다신 내가 그들 사이를 심드렁하게 지나쳤다.

꽤 까칠한 태도에 화를 낼 법도 하지만 내 분위기 때문인지 그 누구도 나를 제지하진 않았다.

팅!!

그때였다.

한 노예의 팔다리를 구속하고 있던 금속 구속구가 균열을 일으키며 부서져 버렸다.

동시에, 그곳에 있던 수십 명 노예의 구속구가 일제히 부서진다.

자신에게 벌어진 사태를 인지하지 못한 노예들은 곧 구속구를 박살 내버린 게 누구인지 깨달은 듯 보였고 이내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들이 있는 곳을 지나쳐 신목의 성지 내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인간들이야 어찌 되었건 나는 나를 막아서는 블러드 엘프들을 굳이 막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나갔다.

한 차례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본 탓인지 블러드 엘프들은 그 흉폭한 성질머리를 억지로 죽이면서까지 쉽게 덤벼들지 못했다.

그렇게, 신목의 성지 중앙까지 들어간 나는 곧 전신이 새빨갛게 물든, 아니 검붉은 색으로 변색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나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앞에 있는 거대한 광장의 중앙에 매달린 세 개의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

말없이 십자가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나와 망할 년아.”

조용히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에 주변이 침묵했다.

그러기를 잠시.

노예가 탈출하건 말건 내게 온 신경이 집중된 블러드 엘프들 사이에서 한 남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네놈은 누구냐. 마족같이 보이지는 않는데, 인간 중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만.”

꽤 느긋한 말투를 구사하는 사내의 질문에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뭐, 어떻게 어머니의 결계를 뚫고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만 겁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이곳은 어머니의 힘으로 보호되는 곳이다. 특히 이 중앙 성역은 어머니의 힘이 가장 극대화되는 장소이기도 하지.”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하는 사내.

나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블러드 엘프가 된다고 해도 얼굴 전체가 변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신목의 성자.

유리아 헬리샤나와 아이나 헬리샤나를 그 지경으로 만든 인물이며, 전대 이그드라실과 손을 잡고 엘프가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아주 재밌는 놈이렷다.

“신목의 성자.”

이윽고 내 입에서 천천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 네놈…… 나를 알고 있는 것이냐?”

‘그래, 잘 알지, 넌 나를 모르지? 난 널 아는데.

작게 중얼거린 내가 청단이를 땅에 천천히 떨어뜨려 꽂은 후 손가락을 뻗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매달린 인물들을 가리키고는 물었다.

“재미있나?”

“뭐?”

“아직 성년도 안 된 엘프를 저렇게 묶어서 효수해놓고 즐겁냐고.”

내 말에 그가 무어라 소리치기도 전에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적으로 내 눈과 마주친 그의 눈이 쟁반마냥 크게 뜨여지고 본능적으로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8서클 흑마법인 [피어]였다.

“뮤우가 니들 전쟁과 무슨 상관인지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세 개의 십자가에 묶인 엘프는 모두가 내가 알고 있는 이였다.

아이나 헬리샤나와, 뮤우, 그리고 유리아의 스승이었던 메디스.

세계수는 마족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마왕 페르세르크의 존재를 경계하여 유리아를 희생시켜 무언가를 이뤄내려 했다.

아이나라면 제 동생이 허무하게 희생되는 꼴을 죽어도 못 볼 테니 분명 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저기에 매달려있는 것도 이해는 하는데.

뮤우는 무슨 잘못인가.

저 순수하고 어린아이가 말이다.

유리아 헬리샤나의 스승인 메디스라는 엘프는 면식은 없지만, 나머지 둘은 달랐다.

비록 다른 이라고 해도 얼굴 맞대고 친분을 쌓아온 이가 이렇게 살해당하고 시체조차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묶여있는 꼴은 안 그래도 억누르고 있던 충동과 광기에 불을 지피게 했다.

아주 조금만……

조금만 충동대로 놀아보자, 그래.

뭐가 되었건 이런 꼴을 봤으면 그냥 넘어갈 생각은 사라진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고 나발이고.

성자답지 않은 잔혹함은 전문적으로 흉내 낼 자신이 있다.

결정을 내린 나는 곧 망설임 없이 신목의 성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바닥에 꽂혀 있던 청단이가 파르르 떨며 스스로 허공에 떠올라 내 손으로 돌아왔고 내 걸음이 내딛어질 때마다 발밑에 수십 겹의 원형 마법진이 중첩되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이 정교한 마법진인데 이것이 수 겹 겹쳐지며 마치 거대한 무언가를 형상화하기 시작한다.

흉폭해지는 거지, 멍청해지는 게 아니다. 블러드 엘프들은 내가 벌이는 기행에 놀란 듯 침묵했고.

곧이어 하늘에서 생긴 변화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늘이 새카맣게 변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하늘에서 새하얀 광구 수십 수백 개가 거대한 거목 이그드라실을 포함한 내 주변 일대를 향해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가 압도적인 힘을 품고 있는 8서클 역회전 마법.

폭염 계통의 파이어볼인 화이트 노바였다. 단 한발 쓰고 뻗어버리는 이전과 다르다는 걸 저들은 운이 없다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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